도대체 우리나라 디자이너의 처우는 왜 이렇게 안 좋을까?
“나는 기획이 하고 싶어! 기획자가 되고 싶다”
주변에 취업에 임하는 친구들뿐 아니라, 현직에서 이직을 고민하는 지인들도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물어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은 기획에 관한 것입니다. '기획자가 되고 싶다', ‘멋진 기획이 하고 싶다.' 그런 아이디어를 던지고 반짝반짝한 일들을 꿈꾸는 것이죠. 반면에 어떤 친구들은 기획이란 아이디어가 좋은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기획자란 특출 난 아이디어를 던지는 사람 혹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보편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기획자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기획이라는 업무의 분리와 이런 환상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기획만 해놓고 끝!이라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이죠. 누군가의 머릿속에 있던 아이디어를 세상 밖으로 꺼내서 구체화를 시키는 과정이 기획입니다. 그런데 구체화를 시키는 그 과정에서 러프한 아이디어만, 머릿속에 떠오른 대로 그냥 말한다고 그것이 기획은 절대 아닙니다. 포인트는 추상적으로 떠다니는 아이디어를 잡아 현실 속에 구체화를 시키는 것에 있는 건데, 구체화라는 건 효과적으로 생각을 표현해내는 수단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즉, 기획을 했으면 디자인이든 개발이든 편집이든 제작의 과정에 뛰어들어서 방향을 같이 잡아가야 하는데, 사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 자체가 기획자를 넘어서 디자이너, 개발자, 편집자로서 기능해야 가능한 것이죠. 애초에 기획을 하는 사람이 디자인, 개발, 편집의 과정을 모르면서 진행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디자인을 모르는 기획자, 개발을 모르는 기획자가 그냥 기획이랍시고 뭔가를 던져놓으면 결국 고통받는 건 일선에서 일하는 제작자들이니까요.
따라서 흔히 말하는 기획자의 역할이 오퍼레이션 및 프로젝트/팀의 커뮤니케이션을 담당이라면, 기획자는 디자인이나 개발 등 자기가 속한 분야에 대한 예리한 감각 있어야 하며 동시에 기교적인 테크닉까지도 알고 어느 정도는 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말은 기획자가 곧 디자이너이자 개발자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디자이너나 개발자는 이미 기획을 다 하는 기획자란 말이죠. 자기들의 생각을 구체화된 결과물로 세상에 내놓으니까.
"도대체 우리나라 디자이너의 처우는 왜 이렇게 안 좋을까?"
이점에서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디자이너의 처우가 왜 안 좋은 지도 어느 정도 알 것 같습니다.
사실 기획이라는 직무를 이렇게 세세하게 분리한 것은 특히 우리나라가 심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영어에서는 디자인, 기획, 설계 등을 모두 포함해서 ‘design’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부적인 디자인의 영역은 “ visual design”, “art design” 등, 기획은 “product design”, “software design” 혹은 “system design” 등으로 명확히 한정 지어 표현한다고 합니다. IT와 관련한 원서에서 특별한 맥락 없이 “design”이라는 표현이 나온다면 십중팔구 “기획”으로 해석하면 된다고도 하고요.
design을 디자인, 기획 등으로 나누어 부르는 우리의 문화가 분야와 부서 간 소통의 단절 등을 야기하는 원인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면 한국의 디자이너 처우가 안 좋은 이유도 이런 분리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건 디자이너들의 기획력과 감각이 아니라, 툴을 다룰 수 있는 단순 기술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죠. 기획자로서의 직원이 아닌, 정직원으로 쓰는 하청업체 직원이죠. 아니 애초에 정직원으로 쓰는 경우도 많이 없군요. 기획자라는 자리가 이미 있으니까.
결국 좋은 기획자가 되기 위해선 디자인 등 제작의 영역까지 알고 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디어는 그냥 아이디어일 뿐이죠.
그걸 어떤 방식으로 구체화를 시켜서 세상에 결과물로 내놓을 수 있는지, 거기까지를 해낼 수 있어야 좋은 기획자이자 동시에 제작자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