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르크하르트 앤 파트너스 & 라데르샬 조경건축사무소, 스위스 취리히
회색빛 공장, 초록빛 공원으로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르듯 초록빛 기둥이 우뚝우뚝 서 있다. 기다란 샴페인 잔 같은 초록 기둥은 자갈이 깔린 중앙 홀에 굳건히 자리잡았다. 양 옆에 철제 구조물을 타고 오른 덩굴 식물 기둥이 일렬로 주위를 둘러쌌다. 고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초록빛 식물로 채웠다면 아마도 이러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중앙홀에 둥글넓적한 철제 물그릇이 놓였다. 아이리스 꽃을 심어둔 큰 물동이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물동이에 손을 넣고 쥐락펴락하며 물을 흩트리는 아이, 유아차를 끌고 나온 엄마는 아이의 물장난을 사랑스럽게 본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샌드위치를 나누어 먹는 소녀들의 모습이 상큼하다. 평상에 대자로 누워 낮잠을 청하는 청년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하다. 한손에 지팡이를 세워 짚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동네 할머니들의 얼굴에 평온함이 가득하다. 저 위 돌출된 테라스 높이에는 덩굴로 싸인 철제 벽을 사이에 두고 오페라극장의 박스석처럼 작고 아늑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벤치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골똘히 책을 읽는 학생이 눈에 들어온다. 또 다른 벤치에는 마주 보고서 연신 함박웃음을 터트리는 연인들의 모습이 풋풋하고 싱그럽다. 일상의 평화로움은 이토록 소소하면서도 그대로 눈에 넣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취리히 올리콘의 MFO공원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거대한 강철 구조물이 격자 형태의 뼈대를 세우고 덩굴 식물로 옷을 해 입었다. 이곳에는 아기 손바닥 같은 버지니아 덩굴부터 노란 꽃술이 빼죽한 인동덩굴, 동글동글 탐스러운 덩굴장미, 별 모양 꽃이 향기로운 자스민, 치렁치렁한 분홍빛 꽃이 달리는 등나무 등 백여 종이 넘는 덩굴 식물이 심어졌다고 한다. 강철 구조물의 바닥 쪽에 물을 모았다가 위쪽으로 펌핑해서 뿌려주는 방식이라, 촉촉해진 식물도 이곳에서 행복하겠다 싶었다.여기에 격자형 울타리는 이중벽 구조로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데, 철제 구조 아래로 호젓한 오솔길이 만들어졌다. 장대한 기둥의 나열과 좌우 대칭형 배치, 3면이 열린 구성을 눈여겨보자면 고대 로마식 정원의 디자인과 닮았다.
바빌론의 공중정원Hanging garden of Babylo이 실존한다면 이곳이 아닐까. 바빌로니아 왕은 진흙 벽돌로 거대한 계단식 정원을 짓고 사랑하는 여인의 고향에서 피는 꽃과 나무, 덩굴을 심어 사랑의 증표로 바쳤다. 평지에 조성된 정원과 달리, 높이감이 강조된 수직 정원은 바빌론의 공중정원으로부터 시작됐다. 공중정원에 담긴 왕의 순애보적 사랑은 지금 여기로 이어진다. MFO공원을 찾는 이들의 얼굴과 작은 몸짓을 통해 공중정원으로 표현한 왕의 사랑과 존중의 마음이 여전히 전달되는 셈이다.
사실 MFO공원은 꽤 아픈 과거를 지닌 곳이다. 지난 100년 동안 올리콘 기계 공장, MFOMaschinenfabrik Oerlikon라는 이름을 달고 운영됐던 이곳은 회색빛이 자욱한 무기 공장이었다. 1906년에 열어 1999년에 문을 닫을 때까지 세계 전쟁의 흥망성쇠를 따라 그 한복판에서 무기를 대량 생산하고 공급하는 일을 도맡았다. 화력이 좋은 기관총부터 파괴력이 엄청난 대전차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무기를 만들어 전 세계로 실어 날랐다.
이곳은 마치 무수한 전투에서 승전보를 울린 퇴역 장군을 떠올리게 한다. 어느 한쪽에게는 승전의 기쁨이지만 다른 한쪽에는 패전의 고통을 안겼을 것이다. 그들은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일했지만 그것이 모든 인류를 위한 길은 아니었다. 이곳이 모두를 위한 공공 정원으로 탈바꿈한 이유도 어쩌면 그때의 과오를 씻어내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사람을 죽이는 생산물을 만들던 무기 공장이 어느덧 사람을 살아 숨 쉬게 하는 공원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를 읽어내게 한다.
그러한 지점에서 MFO에 공원이라는 새 옷을 입힌 부르크하르트 앤 파트너스lanning Burckhardt+Partner와 라데르샬 조경건축사무소Raderschall Landschaftsarchitekten AG의 선택은 옳았다. 있던 걸 새롭게 바꾸는 건축으로 MFO가 나아갈 시공간의 방향을 정해주고 의미의 두께를 더해주었기 때문이다. MFO공원은 시간이 지날수록 회색빛 철제에 덩굴이 얽히고 설키며 초록빛이 깊어지면서 이곳을 찾는 모두에게 다채로운 추억을 안겨다 줄 것이다.
우리 마음의 정원
덩굴 식물이 감싸 안은 철제 계단을 오른다. 5층 높이의 옥상에 이르면 햇볕을 쬘 수 있는 나무 데크가 우리를 맞이한다. 이미 당도한 이들은 평상이기도 하고 의자이기도 한 나무 데크의 등받이에 기대어 햇빛 샤워를 즐기고 있다. 여행의 막바지라 내게도 쉼의 시간이 꼭 필요했다. 새로운 풍경과 사람들을 만나 설렘과 흥분이 가득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계속된 자극에 긴장해서 피로하기도 했다. MFO공원은 여기 취리히에 사는 사람뿐 아니라 나와 같이 스쳐가는 여행자도 기꺼이 끌어 안아주었다.
옥상 나무 데크에 저마다 편안한 자세로 자리를 잡았다. 누군가가 바닥에 젖은 빨래처럼 철푸덕 널부러지길래 한바탕 웃었다. 문득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시간과 공간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축해진 마음을 말리고 산뜻하게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시간, 그로써 다시금 힘내서 살아가게 하는 공간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에게 허락된 공간이 집과 일터라는 작은 공간뿐이라면, 이렇게 모두에게 허락된 공공의 정원은 꼭 필요하지 않을까. 그곳은 어쩌면 우리 마음의 정원과도 같아서, 가끔 들러 돌보아주어야 여전히 푸르고 싱싱하게 숨 쉬고 있을 것이기에.
MFO공원의 봄에는 물푸레나무에서 핀 보랏빛 꽃이 가득 차 꽃내음이 황홀하다 했다. 가을에는 덩굴 식물에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낭만적이라 했다. 그 풍경 속에서 연극 대사를 읊고 음악을 연주한다 했다. 봄날과 가을날의 MFO공원에 재차 와보고 싶어졌다.
(이미지는 아래 링크에 올려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