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is unfair
“네? 무슨 말씀이시죠?”
동네 친구 집에 모인 우리는 맥주 한 잔과 함께 보드게임을 하며 한창 왁자지껄한 불금을 보내고 있었다. 자정이 다 된 시간이라 연락 올 데가 없는데 남편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 위로 평상시 통화를 거의 하지 않는 A 음악감독의 이름이 떴다. 전화를 받은 남편은 얼굴이 굳어지며 조용한 곳을 찾아 들어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자리는 갑자기 ‘영업 마감’이라는 팻말이 붙은 술집처럼 조용해졌다.
“이게 무슨 일이지?” 잠시 후 남편이 반쯤 얼빠진 표정으로 돌아왔다.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인지 아직 듣지 않았지만 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남편은 멍한 얼굴로 어떤 단어를 먼저 입 밖으로 내야 하는지 찾는 듯했다. “B 감독님이 내가 자기를 욕하고 다닌다며 난리를 쳤다는데?” 나는 그 설명을 듣고는 더 이해할 수 없어 조금 전 남편처럼 얼빠진 모양새가 됐다.
남편이 B 음악감독과 함께 일하지 않은 지 2년이 넘었다. 일손이 부족할 때 종종 남편에게 ‘건 by 건’으로 프로젝트를 맡겼으나 그마저 연락하지 않은 지도 1년쯤 됐다. B 감독은 남편이 10년 가까이 함께 일한 사람이다. 남편이 작곡가 초년 시절에 실력이 부족하고 일거리가 많지 않을 때 꾸준하게 일거리를 준 덕분에 기본 생계를 유지했고 경험도 키웠다. 우리 부부에게는 은인과 같은 사람이었고 서로 명절이나 생일을 챙길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남편은 프리랜서이지만 그를 상사 모시듯 따랐다. 아니, 순진한 말인 걸 알지만 남편은 그를 가족처럼 생각했다. 그분이 요청하면 보수가 적거나 없더라도 기꺼이 일할 정도로 신뢰하는 사이였으니까.
그전까지 이렇다 할 대표작이 없던 B 감독의 커리어는 남편과 일하며 성장했다. 한 프로젝트가 성공하자 업계에서 함께 일하려는 사람이 많아졌고 남편도 그만큼 바빠졌다. 자연스럽게 남편이 일하는 업체가 B 감독으로 고정됐다. 다른 곳에서 연락이 와도 남편의 시간과 체력이 허락되지 않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안정된 수입은 좋았으나 남편은 프리랜서이면서 스스로 매인 꼴이 되었다.
B 감독은 업무 외의 전화를 빈번하게 했다. 처음에는 업체 미팅에 다녀왔던 일을 얘기했다. 남편이 참여하는 프로젝트이니 당연히 받아야 할 업무 전화였다. 하지만 그 내용이 점점 스트레스 풀이나 험담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남편이 참여하지 않은 프로젝트로 주제가 확장되더니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하루 한두 시간씩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남편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는 것 같았다. 한 번은 남편이 밤샘으로 작업을 마감하고 오랜만에 나와 외식하는 자리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나는 식사 후에 통화하라고 했지만 남편은 잠깐이면 된다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밖에서 식사 중이라 오래 통화하기 힘들다고 설명했지만 나 혼자 식사를 마친 뒤에도 남편은 통화 중이었다. 아내 눈치를 보며 남편이 어떻게든 끊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밥 먹어. 나는 계속 얘기할게.” 급한 일도 아니었고 업무상 전화도 아니었다. 이런 일이 일상이 되었다.
프리랜서이니 일과 일상을 두부 자르듯 나눌 수 없고 그런 감정적 불편함과 애매함을 전달하기가 어렵다. 쉽게 말해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쩌면 이게 남편이 프리랜서로 살아남은 처세술인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기회를 얻은 감사함으로 스트레스가 있어도 기꺼이 참았다. 다만 이런 남편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일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권리에 관한 것이다. 남편은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저작권이 있는지 ‘바이아웃’(저작권이 없는 프로젝트. 이런 경우 저작권이 있을 때보다 작업비를 많이 받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때도 많다)인지를 확인한다. 먹고사니즘과 커리어의 문제가 달렸으니 저작권이 없는 일이라고 해서 무조건 거절하지는 않는다. 다만 창작자의 권리를 사전에 분명히 해둔다. 그렇게 해야 적어도 ‘화병’은 나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남편은 작업비가 적더라도 저작권이 있는 쪽을 선호한다. 그게 창작자의 자존심과 자부심이라 여겼다.
그런데 어느 날 B 감독에게 연락이 왔다. 막 어느 애니메이션의 주제곡을 완성해 넘긴 참이었다. 제작사에서 작곡에 감독의 이름을 올리길 바란다는 얘기였다. 이미 작업이 다 끝난 곡이고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난처해하는 B 감독을 위해 남편은 처음으로 공동 작곡으로 이름을 올렸다. 사실 B 감독은 음악감독이지만 작곡을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인맥으로 프로젝트를 따와 작곡가에게 일을 나눠주는 식으로 회사를 운영했다. 일감을 가져오는 건 중요한 능력이었기 때문에 남편은 그 방식을 존중했다. 무엇보다 그동안 그가 작곡가의 권리를 침해한 적이 없었으므로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남편은 공동 작곡으로 이름을 올리는 일이 일회적이라고 생각해 허용했다. 그간의 정을 생각해 그의 체면을 세워준다고 여겼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선택을 후회했다. 두 번째 노래 곡을 완성했을 때도 같은 이유로 공동 작곡에 이름이 들어갔다. 다만 이번에는 ‘사후 통보’였다. 남편은 그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동안 영상 BGM을 주로 만들었고 노래 곡을 만드는 일이 드물었다. 자주 하는 일이었다면 상황판단이 빨랐을까? 아니다. 가끔 있는 일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동안은 작곡가의 권리를 그런 식으로 침해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번째 노래 곡을 완성했을 때, 남편은 노래 파일을 보내며 ‘작곡/작사’에 자기 이름 세 글자만 적어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귀여운 시도이지만 어쨌거나 나름의 방법을 강구한 것이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최종 크레딧에는 B 감독의 이름이 공동 작곡가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사후 통보조차 없었다. 극장에서 공동 작곡으로 올라가는 스크린을 확인할 때의 착잡함이라니. 남편과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나는 머지않아 B 감독과 헤어질 것 같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남편은 끝내더라도 최악의 관계는 피하고 싶었고 그때부터 살얼음 위를 걷듯 언행을 조심하기 시작했다.
사실 B 감독은 자신의 행동을 이미 예고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그쯤부터 B 감독이 이상한 얘기를 한다고 했다. 업체 미팅을 해보면 자신과 같은 감독이 없다는 둥, 공동 작곡으로 감독 이름을 올리는 일이 업계 관행이라는 둥 이해할 수 없는 얘기뿐이었다. “네가 업계를 몰라서 그래. 넌 아직 어려.”라는 말이 자매품처럼 따라왔다. 그런 비상식적인 얘기가 경력 10년의 남편에게 통할 리 없었다. 그러던 중 저작권을 이해하지 못한 어떤 업체에서 무리한 요구를 했다. 남편은 함께 일하던 몇몇 작곡가를 대표해 B 감독에게 업체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B 감독은 일언지하로 거절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남편이 자신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고 여긴 것이다. 이 일이 있은 뒤로 B 감독은 이유 없이 감정적인 말로 남편을 긁어댔고 점점 심해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감독 본인도 양심에 찔리는 짓을 하려니 불편한 데다 남편이 다른 작곡가와 달리 고분고분하지 않으니 제대로 찍힌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 뒤로 남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일이 몇 번 더 있었다. 결국 남편은 일거리가 줄어드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B 감독을 찾아갔다. 그와 장시간 대화했고 그동안의 협업 관계를 정리하기로 했다. 남편이 자발적으로 관계를 정리했지만 오래 함께 일했기 때문에 아쉬움이 컸다. 남편은 1년 가까이 수시로 나와 대화하며 그 이별을 천천히 받아들일 정도였다. 상처도 있었지만 그만큼 아끼는 관계였다. 남편은 시간이 지나 서로 이해할 날이 오길 기대하며 가끔 안부를 묻는 사이로 남는다면 당장에는 더 바랄 게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 소망은 2년이 지난 뒤 어느 금요일 밤의 전화 한 통으로 물거품이 됐다. 뒤늦게 확인해 보니 남편이 모르는 사이 몇몇 사람의 이간질로 B 감독의 오해가 쌓일 대로 쌓인 것이다. 사실 나는 오해라기보다는 여전히 공동 작곡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B 감독 스스로 제 발이 저려 그랬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그는 남편에게 직접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남편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남편의 악담을 해댔다. 남편이 모르는 사람에게도 남편의 이름을 들먹이며 험담한 일을 전해 듣자 남편의 마음은 참담했다. 하지만 어쩌랴. 업계는 생각보다 좁고 (계약서조차 없는) 고용관계에서 약자인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남편은 그동안 말을 조심하며 살았으나 그 전화 뒤 1년은 외부인 만나는 일조차 꺼리며 속앓이를 했다.
관계가 완전하게 깨진 데에는 이간질과 오해가 분명 있었으나 남편이 ‘헤어질 결심’을 한 것은 공동 작곡으로 처음 이름을 올린 그 순간이었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누구든 함께 일하다 보면 감정적인 마찰은 피할 수 없고 거기에서 파생하는 감정적 찌꺼기가 쌓이기 마련이다. 함께하는 동안은 서로의 입장을 고려해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양보할 수 없는 어느 지점에 이르면 더는 함께할 수 없다. B 감독은 감독으로서의 체면과 권위가 중요했고 남편에게는 작곡가의 권리가 무엇보다 소중했다. 작곡가에게 자신이 만든 곡을 빼앗는 일은 부모에게서 자식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다.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어도 자신이 만든 곡을 아끼지 않는 작곡가는 없다. 설령 일자리를 잃고 관계가 깨져도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몇 푼 벌어주지 못한 곡이지만 남편은 할 수만 있다면 억만금을 들여서라도 저작권을 되찾길 바란다. 그게 창작자의 마음이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 마음 같지 않다. 도둑질한 사람보다 도둑질당한 사람이 숨죽이며 산다. 금요일 밤 우리가 즐긴 보드게임 ‘달무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Life is unfair. 인생은 불공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