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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정희 Oct 15. 2022

군 생활 대장정 1

 평일 저녁 꽃구경에 나섰다. 주말에 내린다는 봄비에 여린 벚꽃이 다 떨어질까 봐 조바심이 났다. 한 달 전 입대한 아들의 빈자리가 휑했지만 우리끼리 벚꽃 아래서 기분을 냈다. 아들이 빠진 가족사진을 군에 있는 아들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아들은 정성껏 쓴 손 편지로 답장을 보내왔다. 편지 안에는 초코파이와 바나나 우유 한 개에 행복해하는 아들이, 저녁노을과 밤하늘의 별을 보며 가족을 그리워하는 아들이 들어있었다. 어릴 때 신발 끈을 못 맨다고 꾸중 들었던 것이 가슴에 맺혔는지 그곳에서는 자신이 군화 끈을 가장 잘 맨다며 우스갯소리를 얹었다. 군에서 온 아들의 소식은 밝고 활기찼다. 

 

 주말 저녁,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아들이 있는 부대의 중대장이라는 분이었다. 

 “… 아들…팔… 병원… 수술…”

 “….”

 귓가에 윙윙 소리가 스쳐갔다. 한기가 느껴졌다. 두툼한 카디건을 꺼내 입었는데도 자꾸만 몸이 떨렸다.

 

 아들이 운동 중에 팔을 다쳐서 춘천 군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데 훈련병인 아들에게 핸드폰이 없으니 직접 통화를 할 수가 없었다. 팔이 많이 부어서 일단은 진통제만 맞고 있다는 말을 간호사에게 들었다. 월요일에야 수술 여부를 알 수 있다는 말에 당장이라도 올라가서 아들 곁에 있어주고 싶었으나 팬데믹으로 면회가 금지되어 있어 그마저 할 수 없었다.

 

 이틀이 지나서야 아들은 국군 수도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받았다. 자식이 다쳐서 수술을 했다는데 얼굴 보는 것은 고사하고 목소리조차 들을 수가 없었다. 안타까움이 불안이 되고, 불안이 두려움으로 변할 즈음,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수술 후 마취가 깬 아들의 목소리는 약간 잠긴 듯했으나 걱정했던 것보다는 좋아 보였다. 아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마침 아들을 보러 온 의사가 수화기 너머로 내게 말했다. “뼈는 아주 예쁘게 맞춰졌으니 염려 마세요.” 골격미까지 바라진 않았으나 의사의 말은 적잖이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아들에게는 지루한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민간인이라면 퇴원해서 통원치료를 해도 될 일이었지만 군인 신분이라서 부대 복귀가 어려우니 퇴원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팬데믹으로 시끄러운 시기라 다른 누구와의 접촉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아들 혼자 외로운 병원생활을 해야 했다. 

 

 다행히도 병원에서는 정해진 시간 동안 핸드폰 사용이 허용되었다. 시간은 많은데 딱히 할 일이 없으니 가족과 통화하는 시간이 늘었다. 나는 의도치 않았으나 아들의 하루 일과를 다 꿰게 되었다. 평소에 말이 많지 않던 아들인지라 오히려 같이 살 때보다도 더 많은 이야기를 전화로 나눴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에 감사했고 내일의 밝은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며 언제나 희망적인 말로 전화를 끊었다. 아들의 다친 팔은 우리의 대화 속에서 회복되어 갔다.  


 아들은 4월 하순에 들어간 병원에서 7월 초에야 나올 수 있었다. 누구보다도 군 생활을 열심히 하고 싶어 했던 아들은 부대에 복귀하면서도 팔을 조심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심난해했다. 복귀한 날 저녁에 군에서 전화가 왔다.

 “… 아들… 면접… 성실… 청년…”

 “….”


 이번에는 정확히 말을 알아들었는데 바로 답을 할 수 없었다. 행정보급관이라는 분이 아들과 면접을 했는데 생각이 바르고 성실한 청년이라며 칭찬을 하셨다. 부모에게 으레 할 수 있는 칭찬이지만 몇 달의 시련을 겪고 제 자리로 간 아들에게 감정 이입되어 나는 울컥했다.

 

 아들이 첫 휴가를 나왔다. 제복을 차려입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밤늦게 군복을 다리고 군화를 닦았다며 아들은 늠름하게 경례를 했다. 팔에 새겨진 커다란 흉터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건강미 넘치는 아들의 얼굴을 보니 대견하고 감사했다. 동생과 물놀이를 하는 아들은 아직 어린아이 같았다. 나이는 성인이 되었지만 저렇게 어린 젊은이들이 나라를 지키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 한쪽이  아렸다. 

 

 꿈같은 휴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고 말았다. 부대로 복귀하는 아들과 냉면을 먹었다. 한 그릇을 채 비우지 못하고 젓가락을 내려놓는 아들이 안쓰러워서 나도 다 먹지 못했다. 서울을 거쳐 강원도 부대로 가야 하는 먼 길을 아들은 씩씩하게 나섰다. 훈련소에서 “잘 다녀오겠습니다!”라며 당차게 인사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아들을 태운 버스가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중천에 떠있는 해가 조명이 되어 버스를 비췄다. 아들을 비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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