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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묘염 Dec 19. 2023

핸드폰#서울#크리스마스#

갑자기 핸드폰이 고장 났다. 떨어뜨리지도 않았고 딱히 이유도 없다. 반으로 접히는 핸드폰인데 접힌 부분을 기점으로 반은 되고 반은 안된다. 마치 인생처럼. 아니지 인생이 반이나 될 리가 없잖아. 관계가 고립되다 보니 점점 자의식만 비대해지나보다.

여튼 내 폰의 윗부분은 보이긴 하는데 터치가 안된다. 카톡이 오면 메시지 내용은 보이지만 누를 수 없으니 답을 할 수 없다. 전화를 걸 수는 있지만  받을 수가 없다. 평소에 오는 연락도 없으면서 괜히 엄청 불편하다. 근데 뭐 불편한 게 대순가. 내일 출근하는 노예 인간은 그저 알람 맞추기가 아래쪽에 있는 것이 천운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아무리 연락 없는 핸드폰이라도 노예가 출근을 못하면 연락 올 일이 생길 테니까.



내일은 나머지 반쪽도 안될 수 있으므로 ( 이번엔 정말로! 마치 인생처럼...) , 아래쪽에 있는 클라우드로 옹색하게 터치가 되는 사진들을 급하게 옮겨보았다. 한참 올리고 있는데 클라우드 용량이 부족하다고 정기 결재가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뜬다. ㅈ같은 자본주의 .... 핸드폰도 돈 달라, 클라우드도 돈 달라, 아암 염병할 알람이 맞춰지는 게 다행이고 말고.


이깟 핸드폰이 안된다고 해서 내가 잘 못 지내고 있다거나 갑자기 화가 난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럴 리가 있나. 알람도 여전히 잘 되는데. 사일 동안 쉬다가 내일 출근할 생각을 하니 약간, 아주 약간 예민해졌을 뿐이다.



지난주 목요일 금요일에는 서울에 다녀왔다. 연말에 아이와 함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가장 잘 느끼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 생각해 봤는데 크리스마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성스러운 어떤 종교!! 가 아니라 쇼핑! 가장 많은 상품을 파는 곳이 바로 베리해피크리스마스땡큐베리베리머취 일 것이기 때문에 서울의 번화가, 그냥 번화가 말고 쇼핑의 번화가로 가면 되지 싶었다. 이 낙후된 지역에서도 백화점만큼은 크리스마스인 것을 감안하면 서울의 크리스마스는 얼마나 삐까뻔쩍할까 가슴이 좀 설렌 거 같기도 하다.


번듯한 쇼핑몰이 없던 어린 시절에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교회에 가곤 했다. 크리스마스에 교회에 가면 귤이나 과자를 몇 개 쥐여줘서 잠깐 크리스마스 기분을 느끼게 한 후 메인으로 돈 대신 달란트로 다양한 것을 사 먹을 수 있는 파티 비슷한 것이 열렸었다. 그때에도 가진 달란트가 없으면 교회에 간들 메인인 떡볶이는 사 먹을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현대의 쇼핑몰들이 종교의 크리스마스 정신을 어찌나 훌륭하게 되살려내었는지! 삐까뻔쩍한 야외 트리 아래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사진이나 몇 장 찍으며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고 나면 가진 달란트가 없는 외부인들은 결코 함께 누리지 못할 무언가가 저 따뜻한 건물 안 어딘가에 전시되어 있을 뿐이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점은 그땐 노골적이고 눈에 띄게 내가 몇 살이든 얼마나 어리든 달란트가 없으면 떡볶이는 못 먹는다는 자각이 있었다면, 지금은 뭔가 손에 닿을 것처럼, 마치 내가 그 안에 안전하게 속한 것처럼,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도대체 내 주제에 대한 자각이 어려워진 것뿐이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고장 난 핸드폰의 아침 알람에 매달려 있는 위태로운 달란트에 모든 것이 달려있을 뿐인데. 은 되고 반은 안 될 확률, 혹은 내일이면 그 반쪽마저 안될 확률 게임을 하고 있는 인생처럼.


이래서 오세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어머니의 글에 자꾸 ㅈ같다는 표현이 등장하고야 만다. 고상하기도 하지.



서울에 가기 전 주말에 아이가 아팠다. 아이는 열이 잘 안 나는 편이고, 열이 나도 잘 안 뜨거워진다. 이번에도 몸이 차가워서 열이 나는 줄 모르고 있다가, 손이  얼음장같이 차갑고  템포가 평소보다 좀 부자연스러운 느낌도 들고, 행동에 쉼표가 많아진 것 같았다. 한참 놀다가 묘한 표정으로 잠깐 멍 때리고 있는 일이 잦고, 달콤한 음식을 먹다가 내려놓는다. 어디가 아픈가 해서 여러 번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는데, 이마가 미지근하거나 차가웠다. 그러다 문득, 오늘 내가 애 이마를 유난히 자주 만져봤구나 하는 자각이 들면서 얼른 체온계를 가져와서 귀에 넣어봤는데 39.5도였다. 놀라서 해열제를 먹이고 나니 그제야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옷을 다 벗기고 미지근한 수건으로 계속 닦아주면서 열을 내린 후 일요일에 응급실로 달려갔다. 요즘 유행한다는 독감 폐렴 코로나 검사까지 다했는데 모두 음성이었다, 해열 주사를 맞고 약을 지어서 집에 돌아왔는데, 해열 주사가 효과가 좋긴 좋은지 그때부터 컨디션이 돌아와서 다음날 딱 한 번 더 해열제를 먹고 다시 정상 컨디션으로 되돌아왔다. 뭐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뭔들 그냥 지나갔으려니 하고 여행을 갔다.


여행 내내 비가 왔고, 최대한 실내에 있었는데도 차를 안 가지고 가서 우산 하나에 의지한 채 빗속을 돌아다니는 일들이 생겼다.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많이 걸었고, 특히 실내에서 많이 헤맸다. 식성이 보수적인 아이라 새로운 음식을 절대로 시도하려 하지 않아서 먹는데도 제약이 많았다.


그래도 아프지 않고 잘 버텼고 힘들었지만 즐거워해줬다.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는데 갔다 와서는 잘 갔다 왔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아이가 다시 열이 나거나 아팠다면, 아이의 컨디션이 완전하지 않은데도 강행군을 한 나 자신을 탓하며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원인이고 결과라 생각하는 것들은 결국 흘러간 상황이 만들어낸 착시일 수도 있다. 인생의 반이 운일지도 모르는 것처럼, 육아를 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탓일 필요는 없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아이랑 둘이 있는데, 아이가 혼자 놀다가 식탁에 부딪혀서 눈썹 아랫부분이 찢어졌다. 성형외과에 가서 무려 아홉 바늘이나 꿰매고 17만 원짜리 피부 재생 주사를 맞고 일주일간 매일매일 소독하러 가고, 비싼 흉터 연고를 바르고 있다. 일주일 후에는 흉터 레이저치료도 시작할 생각이다. 최대한 얼굴에 흔적이 남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눈썹 아래 생긴 빨갛고 가는 줄을 볼 때마다, 그 순간 내가 애를 잘 봤어야 했는데, 안 다치게 했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대도, 나는 아마 애를 잡거나 안 다치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 육아를 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탓일 필요는 없다. 알고는 있지만 막상 사고가 터지고 나면 그게 또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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