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지 연구의 가장 큰 매력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미지의 땅을 탐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23년 여름, 나는 북반구 극지에 위치한 그린란드 국제 심부 빙하 시추 현장을 다녀왔다. 이곳은 빙상 깊숙이 자리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었다. 시추 현장에 도착하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이 이어진 빙하와 하늘뿐이었다.
극지의 환경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혹독했다. 현장은 해발 약 2,500m의 고지대에 위치해 도착한 후 며칠 동안 약한 고산병 증상을 겪었다. 빙하의 90%에 달하는 높은 반사율 때문에 선글라스를 써도 선글라스를 쓴 걸 잊을 만큼 눈부셨다.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눈이 아파 눈물이 절로 났다. 여름철 백야로 인해 해가 지지 않아 몸이 계속 깨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온은 영하였고 날씨는 하루에도 여러 번 급격히 변했다. 이런 극한의 환경 속에서 일과를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와 술 한 잔은 잠시나마 긴장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독일인 과학자 셉이 칵테일을 준비하던 나에게 105m 깊이에서 채취한 지름 10cm, 길이 1m의 원통형 빙하 코어를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빙하 코어를 작은 조각으로 잘라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망치로 빙하 코어를 두드려 작은 조각으로 만들었다. 셉은 빙하 조각을 붉은빛이 도는 칵테일에 넣었다. 칵테일 잔에 들어 있는 빙하조각이 마치 기후변화로 인해 뜨거워진 붉은 바다 위를 떠도는 유빙처럼 보였다. 칵테일 잔을 한참 바라보던 중, 빙하 조각에서 공기 방울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칵테일에 담긴 빙하 조각을 바라보던 중 셉이 내게 물었다. "이 빙하가 몇 년 전에 형성된 것 같니?" "약 300년 전에 형성된 것 같아요."라고 답하자 그는 얼추 맞다고 했다. 그러고는 창문 밖 얼린 얼음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왜 우리가 얼음 대신 빙하를 넣어 마시는지 아나?" 당시 캠프는 추워서 얼음을 만드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그의 의중을 알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야기는 1965년 남극에서 빙하 시추 작업을 하던 프랑스 과학자 클로드 로리우스(Claude Lorius)로부터 시작된다. 로리우스 박사는 러시아의 남극 관측 기지인 보스토크 기지에서 시추 작업을 수행했다. 남극 내륙에 위치한 이 기지는 해발 3,488미터에 자리 잡고 있으며 1983년 7월 21일에는 지구에서 기록된 최저 기온인 -89.2°C를 관측한 곳으로 남극에서도 가장 추운 지역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혹독한 남극 환경에서 매일의 고된 작업을 마친 후 밤마다 위스키 한 잔을 즐겼다. 얼음을 넣어 마시곤 했는데 하루는 얼음 대신 시추 작업 후 남은 빙하 코어의 얼음 조각을 넣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마치 위스키에 샴페인을 따른 것처럼 공기방울이 터져 나왔다. 그는 한참 동안 위스키 잔을 응시했다. 터져 나오는 공기방울을 보고 빙하 속에 과거의 대기가 보존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는 남극 탐험을 마친 후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 빙하에 포집된 공기를 분석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빙하는 오랜 세월 동안 눈이 쌓여 형성된다. 처음에는 빙하의 최상단에서 눈송이들 사이로 대기가 자유롭게 대류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눈이 쌓이고 눈송이 간격이 좁아지며 대기가 확산의 원리에 따라 이동한다. 최종적으로 약 50~100m 깊이에서 대기는 완전히 빙하 속에 포집된다.
로리우스 박사는 남극 빙하에 포집된 과거 대기를 통해 이산화탄소 농도를 복원하기 시작했다. 이후 수많은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지난 80만 년 동안의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복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지난 80만 년 동안 오늘날처럼 따뜻한 간빙기 동안에도 이산화탄소의 평균 최대 농도가 약 280ppm을 유지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24년 7월 하와이 마우나로아 관측소(Mauna Loa Observatory)에서 측정된 대기 중 이산화탄소 평균 농도는 425.55ppm였다. 이는 과거 간빙기 동안의 평균 최댓값보다 100ppm 이상 높은 수치다. 이러한 80만 년 동안의 이산화탄소 데이터는 인류의 산업 활동으로 인해 이산화탄소 농도가 급격히 증가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활용되고 있다.
클로드 로리우스 박사는 2023년 3월 21일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빙하 코어 연구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일상의 작은 변화가 때로는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줄 수 있다. 과학은 성실한 연구와 끊임없는 탐구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때로는 예상치 못한 일상의 작은 순간에서 위대한 발견이 탄생하기도 한다. 나도 로리우스 박사가 과학에 품었던 열정과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이 글은 틴매일경제에 발행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