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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인공 Dec 02. 2023

꼭 불어가 아니더라도,

여기가 어떻게 선진국이야?

어느덧 프랑스에 온 지 1달, 매일반 불어 수업을 들은 지는 1주일.

프랑스에서의 삶을 돌아볼 수 있을 만한 사건의 발단이 터졌다.

지문 혹은 번호키 도어록을 사용하는 한국과 달리 프랑스는 아직도 구시대처럼 수동키를 사용한다. 어떻게 이런 나라가 선진국이야? 공룡이 살았던 시대에 사는 것도 아니고 완전 구닥다리에다가 엘리베이터도 툭하면 없어서 맨날 계단이야 또.

.

집을 여는 수동키를 잃어버렸는데 당최 버스에서 떨어트린 건지 어학당에 놓고 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집에 들어가서 쉬고 싶은데 그러려면 L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

근처 카페에서 끼니를 때우고 도서관에서 불어 복습을 한창 하고 있을 때,

L한테 전화가 왔다.

“퇴근하고 가는 중인데 가방을 아무리 찾아봐도 열쇠가 보이지 않아. 집에다 두고 온 거 같아.”

2명이서 같이 살기 때문에 키가 2개인 상황.

L마저 키가 없으면 집에 못 들어간다는 거를 알았기에 매우 스트레스를 받았다.

“평소에 좀 일찍 일어나서 챙길 것 좀 챙기지 왜 맨날아침에 허둥지둥 서둘러서 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이렇게 시작된 싸움.

결국 L을 만났지만 핸드폰 충전기도 없어서 설상가상 상황이었다.

다행히 프랑스의 건물은 다 낮았고 우리 집은 2층이라 베란다 벽을 타고 올라가겠다는 L.

그러더니 위험천만하게 베란다를 올라가서 창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가는데 (사실 거의 도둑이 잠입하는 수준이었다) 그저 신기해서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무튼 이제 집에 들어갈 수 있겠다 싶었는데, L이 아무리 찾아도 집에 열쇠가 없다고 한다.

프랑스의 건물 구조는 신기해서 문을 잠그면 안에서도 열쇠가 없으면 문을 열 수가 없다.

망할 놈의 구조.

이게 어떻게 선진국이야?

즉 밖이나 안에서 문을 잠그면 키가 없는 한, 집 안에서도 문을 열 수 없는 것이다.

L은 열심히 열쇠를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다시 베란다 벽을 타고 밑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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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두고 온 걸 수도 있으니 회사로 다시 가보겠다는 L을 보는 데 너무 화가 났다.

아니 프랑스는 왜 시스템이 이렇게 구려?

원시시대에 살고 있는 거 같아.

한국이었으면 애초에 수동키를 가지고 다니지 않을뿐더러 전화만 하면 사람을 부를 수 있어.

그리고 안에서 문을 못 여는 게 말이 안 돼. 집에서 자고 있는데 불이 나거나 비상상황이 생기면 어떡해키가 없다고 문을 못 열어? 한국은 그냥 문을 돌리거나 밀면 안에서도 열리는 데 이렇게 만들어야 되는 게 맞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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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은 불만들을 다 토로했다.

여기가 어떻게 선진국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으며 GDP가 높은 게 말이 안 된다고.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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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L의 회사에서 열쇠를 찾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3가지를 깨달았다.

1. 내가 한 거라고는 불평불만 말고 없구나,

다른 것들을 원망하고 비난한다고 해서 절대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는 것.

2. 애초에 열쇠를 잃어버린 건 나인데, 나는 남 탓 시스템 탓을 하기 바빴다는 것.

3. 모든 순간에도 L은 한 번도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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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학당에 가다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버린 적이 있다. 환승구간인 곳이라 하필 사람이 많은 역에서 내리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의 출근시간이었기 때문에 지하철역이 붐볐다. 그러나 아무도 먼저 들어가려고 사람을 밀지 않았고, 어느 정도 지하철이 꽉 차 보이면 그냥 안 타고 지하철을 다 보내버리는 모습을 보며 한국의 지하철 끼임사건 혹은 밀치고서라도 구태여 타는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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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한테 물었다.

“왜 프랑스에는 스크린도어가 없어? 한국은 지하철 선로에 가까이 가면 위험하니까 스크린도어를 설치해 두는데 말이야. 여기는 안전불감증인가?”

“스크린 도어가 왜 필요해?”

“뒤에서 사람들이 밀 수도 있고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할 수 있잖아.”

“뒤에서 사람들이 왜 밀어?”

“글쎄. 타려고 밀겠지?”

“다음에 오는 거 타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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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한국만큼 반도체가 발달하지 못했고 흔하지 않아서 수동 열쇠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하드웨어 즉 기술적인 측면은 한국이 더 뛰어날지 몰라도 소프트웨어, 즉 시민의식은 프랑스가 더 뛰어나구나.

그렇기에 여기가 선진국일 수 있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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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온 지 1달 차

나는 피상적인 불어 이외에도 이곳에서 엄청난 삶의가치를 배우고 있다. 단순 L한테 배우는 건지 이 나라가 나에게 주는 미덕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님의 내리사랑을 당연하게 여겼던 나는, 늘 작은 거에도 감사해하는 L을 보면서 위가 아닌 아래를 보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매달 적은 돈이라도 기부하며 전쟁에, 세상의 굶주림에, 부당함에 관심을 두는 L. 가진 것에 만족하기보다 가지지 못한 것을 늘 우러러보며 쫓아가려고 애썼던 나를 한탄하며 인생에서 추구해야 하는 궁극적인 가치를 매번 일러주는L. 행복의 역치가 낮아 작은 일에도 늘 행복해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발전시키며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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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부모님의 그늘 아래서 호의호식하면서 더 가지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질투를 했던 지난 나의 모습을 반성하며,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소소함 안에서 여유와 행복을 찾는 독립적인 자아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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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까지도 문화시민이 되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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