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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Jul 05. 2024

부모님의 결혼사진

불행의 시작

  어린 시절, 나는 부모님의 결혼사진을 종종 꺼내 봤다. 낡아서 자꾸만 스프링이 삐져나오는 무겁고 곰팡내 나는 파란색 앨범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썩 아름다운 사진은 아니었다. 깡마른 체형에 구레나룻을 기른 장발의 신랑이 어색한 양복을 입고 서 있다. 왠지 모를 자신감에 찬 표정이다. 강렬한 눈빛은 사진을 뚫고 나올 것만 같다. 아직 볼살이 통통한 스물세 살의 신부는 결혼식 내내 우는 바람에 눈이 퉁퉁 부어올랐다. 화장이 다 번져서 우울한 피에로 같은 모습이다. 한껏 어깨를 부풀린 웨딩드레스에 피아노 덮개 같은 하얀 레이스를 쓰고 양파링 같은 귀걸이를 했다. 모두 교회 집사님이 여기저기서 빌려온 것들이라고 했다. 어쩐지 엄마에게 어울리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표정만 봐서는 한 사람은 결혼식, 한 사람은 장례식에 온 것 같다. 이미 결혼사진에서부터 두 사람은 어울리지 않았다.  

   



  아빠는 가난한 농사꾼의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제법 공부에 흥미가 있었지만, 중학교를 마치고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공장에서 일하고, 학원 칠판을 닦아주고 창고에서 쪽잠을 자면서 검정고시를 봤다. 농사짓기는 죽어도 싫어서 9급 공무원 시험을 쳤고 좋은 기회를 얻어 시골 면사무소에서 시청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나이는 많은데 시골에 계신 아버지는 암에 걸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적당한 처자를 만나 얼른 결혼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엄마 역시 가난하고 형제 많은 집에서 태어났다. 6남매 중 다섯째였으니 엄마에게 돌아갈 관심도 돌봄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의 아버지, 즉 나의 외할아버지는 훤칠한 외모에 한량 같은 사내였다. 농사는 짓지 않고 여러 가지 사업을 궁리했으나 성공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또 다른 사업을 위해 가족을 데리고 친척이 사는 도시로 이주했다. ‘갱변’에서 송사리 잡으며 유년 시절을 보냈던 엄마는 도시 생활이 낯설었고 사투리가 부끄러웠다. 엄마가 고등학생 때 어머니, 즉 나의 외할머니가 위암에 걸리셨다. 가난 때문에 진통제 한 알 맘 편히 삼키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어머니가 들어왔다. 이전 결혼에서 낳은 자식을 데려와 대놓고 편애했다. 장성한 형제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엄마도 고등학교를 마치고 집을 나와 시청의 계약직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빨리 안정을 찾아 계모 밑에서 천덕꾸러기로 지내는 동생을 데려와 함께 사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다.     




  이것이 내가 아는 부모님의 결혼 전 스토리이다. 비록 지금은 둘이 티격태격하지만, 예전에는 로맨틱한 시절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빠 엄마는 결혼 전에 어떤 데이트를 했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아빠는 이런 얘기를 했다. “느이 엄마랑 다방에서 데이트를 하고 집에 바래다주는데, 꽤 번듯한 2층 양옥집으로 들어가더라고 그래서 부잣집 딸인가 보다 생각했지.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는 거였어. 에이 가난한 집 딸인 줄 알았으면 결혼 안 하는 건데 말이야.” 농담이라고 한 얘기였겠지만 어쩐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평소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보다 욱해서 소리 지르고 싸우는 모습을 더 많이 봤기 때문이다.      

  당시에 아빠는 결혼할 여자가 필요했고, 엄마는 기댈 수 있는 울타리가 필요했다. 순수하게 사랑하는 마음과 서로에 대한 필요가 어느 정도의 비율로 작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둘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아직 결혼하기에 이른 나이였던 엄마가 망설이자 아빠는 두 가지를 약속했다. 첫째, 엄마의 동생이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함께 데리고 살겠다고 했다. 둘째, 엄마가 공무원 시험을 볼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하겠다고 했다. 첫 번째 약속은 지켜졌지만, 두 번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것은 두고두고 화근이 되어 나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끼쳤다.


    



  둘의 결혼 생활은 어긋남의 연속이었다. 아빠는 자신의 가난과 학력 콤플렉스로 인한 결핍을 아내의 관심과 찬사로 메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본인도 그런 것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엄마는 남편에게 입에 발린 말조차 해줄 수가 없었고, 해주고 싶지 않았다. 결혼과 육아로 인해 자신의 모든 꿈과 희망을 빼앗겼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엄마는 어린 딸에게 남편의 험담과 신세 한탄을 하며 자신이 얼마나 큰 희생을 했는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를 강조했다. 나는 고작 일곱 살이었지만, 가여운 엄마를 나라도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집 아이들이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철없이 어리광 부릴 때, 나는 엄마의 표정을 읽고 감정을 살피며 어떻게 해야 내가 엄마 마음에 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아빠는 종종 어린 자식들 앞에서 물건을 부수고 욕을 하며 험악한 모습을 보였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불행한 결혼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나에게 쏟아냈다. 어려서 이해 못 할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 건지, 아니면 그래도 장녀니까 엄마를 이해할 거라고 생각한 건지 그 의도는 잘 모르겠다. 너를 임신하는 바람에 공무원 시험을 볼 수 없었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다면 피임을 철저히 하는 것이 어른으로서의 상식 아닌가? 그리고 세상에는 임신한 몸으로 열심히 공부해 시험에 합격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 나는 그저 두 사람에 의해 이 세상에 소환된 것뿐인데, 저런 원망의 말을 듣다니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다. 하지만 어린 나는 내 존재로 인해 엄마가 불행해졌다고만 생각했고, 오랜 시간 잘못된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필터링 없이 던진 말에 아이는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른들은 알아야 한다.   


  



  분명 본인들의 의지로 결혼했고 자식을 낳았을 텐데, 어쩐지 나는 내가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내 존재 가치가 희미하게 느껴질 때마다 나의 근원을 찾기 위해 부모님의 결혼사진을 보고 또 봤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텅 빈 내 마음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낡은 사진 속의 신랑 신부가 서로 마주 보고 활짝 웃는 모습이었다면 나의 어린 시절은 좀 덜 불행했을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이지만 씁쓸한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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