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에 집착하고 자꾸만 실망한다면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나는 여러 명의 친구와 어울리지 않고 늘 단 한 명만을 사귀었다. 같은 시기에 두 명이 내 마음과 생활에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주위 친구들은 늘 2-3명이서 혹은 더 여러 명이서 어울렸다. 그래서 내 베스트 프렌드(이하 베프)는 해마다 바뀌었고, 오래가지 못했다.
초등학생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여자친구들 사이의 삼각관계 같은 일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1년 동안 김xx이라는 친구와 베프였다.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정xx이라는 친구랑 김xx이 가까워졌고, 김xx은 나에게 ‘나 이제 정xx이랑 놀거라 너랑 못 놀 것 같아.‘라는 편지를 써서 줬다. 어린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마음도 많이 아팠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땐 어려서 그 친구의 마음이 그러니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세상을 잃은 사람처럼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그 아픔을 잊기 위해서였을까?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 탁구부 생활을 시작했고, 같이 운동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그곳에서도 베프를 만들었다. 이xx. 알고 보니 이 친구가 나와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고 있어서 학교에서도 같이 놀고, 하교해서도 우리 집, 그 친구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놀았다. 이xx은 정말 착한 친구였다. 나는 자기주장도 세고, 고집도 세서 늘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는데 그걸 모두 같이 해줬다. 밖에서 꽃이나 이파리를 따와 과학 실험을 하기도 하고, 제빵 애니메이션을 보고 빵, 쿠키를 만들기도 하고,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돗자리를 깔고 드러눕기도 하고 맛있는 것을 먹기도 했다. 나에게 베프는 안정감을 줬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를 싫어한다고 하더라도 베프 한 명만 있으면 나는 괜찮았다. 그러나 이 친구와의 인연도 내가 탁구부를 그만두면서 끝났다.
(코치님, 선배들한테 자주 맞기도 하고, 몸이 약한 탓에) 탁구부 생활이 너무 힘들었던 나는 탁구를 그만두고 1-2년 방황하다가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그 당시 내 베프는 우리 반에서 매번 1등을 하는 정xx이었는데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베프가 된 것 같기도 하고, 그 베프를 만나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비밀교환일기도 쓰고, 같이 공부도 하고, 서로의 집도 드나들었다. 그러다 6학년 말 그때의 우리에게는 꽤나 큰 선택의 기로에 섰다. ‘어느 중학교에 갈 것인가.’ 근처에는 두 개의 중학교가 있었고, 다른 중학교들은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상의해서 1 지망, 2 지망을 똑같이 쓰기로 했는데, 제출하기 직전 친구가 나에게 말하지 않고 1 지망과 2 지망을 바꿔 썼고, 우리는 다른 중학교에 가게 되면서 멀어졌다.
계속된 ‘베프 찾기’의 실패 때문이었을까? 중학교 때는 여러 명의 친구와 사귀며 많이 방황했다. 차라리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겠다는 마음을 가졌던 것 같기도 하다. 늘 예쁘게 꾸미고 다니기 위해서 새벽같이 일어나 단장을 했고, 화장을 하지 않으면 집 밖에 나가지 않기도 했다. 예쁘면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무리에서 왕따를 당해서 혼자가 되기도 하고(그때는 무리에서 돌아가면서 왕따를 시키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그러다가 다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이 무리와 놀았다가 저 무리와 놀았다가 하는 아주 심란한 중학생 시절을 보냈다. 그럼에도 학구열이 있는 편이라서 늘 공부는 놓지 않았고, 어울렸던 친구들이 전문계 고등학교에 갈 때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렇다 보니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또다시 혼자였다. 외로웠다. 그래서 밴드부 동아리에 지원했고, 키보드 파트로 들어가게 됐다. 처음에는 밴드부 친구들과 어울렸는데 개성이 강한 친구들이 모여있어서 그런지 늘 다툼이 많았다. 가끔은 내가 표적이 되기도 해서 마음이 늘 불안했고, 어울리기 쉽지 않았다. 그러다 다른 반인데 나와 친해지고 싶다는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가 내 친구한테 나의 휴대폰 번호를 물어봐서 연락을 해왔다. 처음에는 학교가 끝난 후에만 놀았다. 함께 배스킨라빈스도 먹고(이전까지 나는 배스킨라빈스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0), 노래방도 가고, 치킨도 먹고, 학교가 있는 동네를 저녁 내내 걸어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가 학교에서도 그 친구랑 놀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 친구랑만 놀고 있었다. 주말에도 그 친구집에 놀러 가고, 그 친구 부모님이 하시는 가게에 가서 밥도 얻어먹고, 친구 부모님과 같이 식자재 마트에 구경도 가고, 우리 집 가족여행에 그 친구가 함께 가기도 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때까지 그 친구와 베프로 지냈고, 우리는 서울, 경기권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며 대학생이 되어서도 함께 하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로 둘 다 서울, 경기권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다. 나는 서울의 북쪽에 있는 대학교, 그 친구는 수원 소재 대학교라서 오가는 데에 편도 1시간 30분이 걸렸지만, 대학교 2학년 초반까지 주중, 주말 할 것 없이 자주 만나서 서울 구경을 했다. 그 친구가 있어서 1학년 땐 대학생활에 소홀했다. 그저 강의를 듣고 시험공부만 했다. 그런데 1학년 말 나는 참석하지도 않은 학회장&부학회장 선거에서 부학회장으로 당선? 됐고, 2학년 때부터 부학회장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우리 학과는 입학하면 거의 모든 학생이 학회에 가입해야 했다.) 그때의 내 베프도 워낙 성격이 활달해서 과 행사나 모임에서 주축이 됐고, 우리는 각자의 생활에 집중하다가 마음이 멀어져 더 이상 왕래하지 않게 됐다. 그렇게 또 하나의 베프를 잃었다.
그 후 나는 생각했다. ’남자친구면 헤어지지 않는 이상 늘 베프가 있는 거잖아?‘ 그래서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평소에 괜찮다고 생각했던 주변 사람들을 사귀기 시작했다. 그런데 연애는 또 다른 일이었다. 이상하게 친구라고 생각하면 용납이 되는 것들이 연인이 되면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비슷한 사람을 만나도, 완전히 반대인 사람을 만나도 자주 다투고 결국 헤어졌다. 그러면서 연인에 대한 나만의 기준을 한 사람에게서 하나씩 만들어 나갔다.
반복되는 연애에 지쳐서 꽤 오래 베프도 연인도 없는 시기를 보내던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에서 대시를 받았다. 사실 나도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라 평소에 말도 좀 붙이고, 간식도 주고 그랬는데, 내가 퇴근할 때쯤 온 그가 드라이브를 가자고 했다.(그때 코로나 시국이라 저녁 늦게 연 가게가 없었고, 한겨울이라 무척 추워서 야외는 불가했다) 나는 드라이브에 응했고, 차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호감이 커졌고 며칠 뒤 우리는 연인이 돼서 2년 2개월을 만났고, 나는 지금 그와 1년 7개월째 동거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이 동거인과 자주 부딪히는데 주로 동거인이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것 때문이다. 나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인간의 어떤 외로움을 베프로 해소하고 싶어 했고, 나는 내 베프를 동거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동거인은 다수의 다양한 친구를 사귀는 것을 선호한다.
동거인은 내게 베프인데 나는 동거인의 수많은 베프? 중 하나인 내가 더 아쉬운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자 절을 하고 있는데, 기도문을 외우며 절을 할수록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임을 깨달으니 조금씩 놓아지고 있다. 동시에 내가 외로움을 해소하는 데에 집착하고 있었고, 내 존재를 과소평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에 썼듯이 인간에겐 해소되지 않는 어떠한 외로움이 있고, 아직 혜안이 부족한 나지만 추측해 보자면 그건 타인에게 온전한 이해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모든 일을 겪는 나를 늘 보고 있는 내가 있지 않은가? 내 자신이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지만 그저 온전히 안아줄 수 있진 않은가? 그런 생각들이 들면서 내가 하고 싶다는 것을 더 많이 하게 해 주고, 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 자신을 잘 보살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부터 내 베프는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