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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 개 성(城)의 나라

한국의 도성과 산성 1

by 윤슬

오래전,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겨난 성(城)은 동서양은 물론 같은 동양권 나라들 안에서도 역사, 문화에 따라 그 형태가 다르고 쓰임이 다양하다.

대한민국은 성곽의 나라다. 한반도 전역에는 무려 3천여 개에 달하는 성곽들이 있다. 왜 좁은 한반도 땅에 그처럼 많은 성곽들이 있는 것일까.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어떻게 98일 만에 쌓을 수 있었을까. 정조는 왜 수원화성을 쌓았으며, 진주성 전투가 임진왜란 3대 대첩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도시와 마을 그리고 백성을 수호했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도성과 읍성들을 탐방하며 그 비밀들을 풀어본다.



한양도성

우리나라 성은 몇 가지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성이 축조된 지형에 따라서는 산성, 평지성, 평산성, 장성 등으로 분류되며, 축조 목적에 따라서는 행정구역을 다스리기 위한 치성과 적의 침략을 방어하는 군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특히 성곽이 많은 이유가 뭘까? 이에 관해, 국내 최고의 조선시대 궁궐 전문가로 자타가 인정하는 홍순민 전 명지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전투 방식의 차이와 또 지형지세의 차이가 함께 고려돼야 될 것 같은데요. 기마 민족들 몽골이나 여진족, 만주족 같은 사람들은 말 타고 달려가서 적의 본진을 점령하면 전투 끝인데 우리나라는 산이 많은 산지이기 때문에 그게 잘 안되고요. 또 기마에 익숙지 않으니까 이 부대가 이렇게 이동하면서 점령을 해가는 거죠. 그러니까 산꼭대기에 성이 있어서 저 아래 길로 가면 화살도 미치지 않고 그 당시에 무슨 포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부대가 간 뒤에 뒤를 차단당하면 보급이라든지 이런 게 다 끊어지고 그 부대가 고립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 산성을 점령해서 이 지역을 다 차지한 다음에 다음으로 나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 진지전의 전통이랄지 그런 조건 때문에 산성을 많이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만리-horz.jpg 만리장성(좌) / 오사카성(우)


어느 나라에나 사람 사는 곳에는 적이 있고 성이 있다. 달에서도 보인다는 유일한 건축물인 중국의 만리장성은 기원전 220년 진시황이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았다. 험준한 산과 협곡은 물론이고 사막까지 이어진 만리장성은 무려 3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규모로 유명하다. 일본의 오사카성은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 쟁탈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축성했다. 5층 8단 검은 옻칠을 한 판자와 금장식을 붙인 호화로운 망루형 천수각으로 유명하다.

유럽에서 성이라는 말은 대개 왕이나 영주가 자신의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영토 안에 구축한 요새를 가리킨다. 유럽의 성과 일본의 성은 주로 평지성이어서 적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성 주변을 해자로 에워싸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홍순민 교수의 설명을 더 들어본다.


“유럽은 영주 귀족들의 저택이면서 방어를 겸한 성이고요. 영어로 하자면 castle입니다. 그런 데 비해서 일본의 오사카성을 비롯한 그 성들은 천수각이라고 이렇게 뾰족한 건물 중심으로 작은 도시를 이루고 그 바깥에 이제 배후 도시가 있어요. 그런 것은 군사적 요새 즉 포트리스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걸 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고, 그런 데 비해서 우리나라의 성들은 그냥 큰 돌담을 둘러놓은 것이기 때문에 시설의 면에서는 화려해 보이지 않아요. 웅장해 보이지도 않고 그거는 wall이죠. 그래서 이 한양도성은 한양이라는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외곽의 담장 큰 담 city wall이라고 구별할 수 있겠습니다.”


도성1-horz.jpg 4개의 산을 따라 둘러싼 한양도성과 8개의 문


이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평지 성들인 도성과 읍성들을 탐방해 보자. 동서남북으로 에워싼 산줄기 안에 아늑하게 들어앉은 서울 도심을 둘러싼 4개의 산을 따라 18.5km에 이르는 성곽이 있다. 바로 한양도성이다. 이때 4개의 산이란 백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을 가리킨다. 이 구간들을 연결하는 성벽에 8개의 문을 달아서 한양도성이 완성됐다.


낙산-horz.jpg 한양도성 내 낙산 구간(좌) / 인왕산(우)


혜화문을 출발하여 창의문까지 이르는 백악 구간에서는 서울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야트막한 비탈과 마을 길을 따라 굽이굽이 펼쳐진 도성길이 아름다운 낙산 구간은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요즘 <케이팝 데몬 헌터스> 덕분에 이 낙산 구간은 한양도성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관광 코스가 되었다.


겸재 정선의 그림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기도 한 인왕산은 화강암 덩어리들로 이루어진 바위산. 그래서 자연 암반이 성벽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 흥인지문에서 숭례문에 걸쳐 있는 남산 구간은 도성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이 대개 그러하듯 한양도성 역시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축조했다. 또한 보기 드물게 능선을 따라 산성과 평지성이 연결되어 있다. 홍순민 교수는 이에 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런 도성 같은 경우는 규모가 워낙 크고 도시 규모가 크기 때문에 저 안에 평지에만 성을 쌓아서는 의미가 별로 없으니까 이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가다 보니까 산성도 있고 평지를 가는 성도 있는 그런 모양이 됐죠.”

한양도성의 역사는 곧 조선의 역사다. 1396년 태조 이성계는 종묘, 궁궐, 성곽을 갖추고 조선의 기틀을 잡는다. 이때 정도전은 한양도성에 터를 정하고 ‘도성주축도감’을 설치해 축성을 지휘한다. 태조대에 쌓은 토성은 흙으로 된 부분도 일부 있었는데 세종대에는 이를 석성으로 완비하였다. 두 차례의 전란을 겪으며 한양도성은 황폐화되었는데 나라가 다시 안정을 찾은 뒤 숙종은 버려졌던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다시 세운다.


남산(목멱산) 성벽 돌의 다양한 모양

목멱산. 오늘날 남산으로 일컫는 이곳의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한양도성의 또 다른 표정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곳 남산 구간의 성벽을 이루는 돌들의 모양이 독특하다. 돌의 모습이 모두 제각각이다. 태조 대의 돌은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고 그 사이사이에 괴임 돌을 박아놓은 형식인 데 비해서 숙종 대는 반듯반듯한 돌의 면을 다듬어서 놓았다.

조선 전기, 태조 시대에 거칠었던 돌들은 중기 그리고 후기로 갈수록 그 모양이 더욱 정교하고 반듯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다. 18.5km에 이르는 이 거대한 규모의 한양도성을 쌓은 기간은 불과 98일.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축성에 동원된 연 인원은 이십만 명. 당시 한양의 인구는 십만여 명에 불과했다. 전국 각지에서 백성들이 동원되어 한양도성을 쌓은 것이다.

그렇다면 육백 년 전 당시 이 대규모 공사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성벽에 그 비밀이 새겨져 있다. 다시 홍순민 교수의 설명을 들어본다.


한양도성 하단부를 잘 살펴보면 공사 책임자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저기 글자를 새겼다. 돌에다 그래서 ‘새길 각’ 각자라고 그러는데요. 그러니까 이 성의 이 부분을 쌓을 때 공사 감독 책임자는 누구이며 기술 책임자 말하자면 석수 중에서 우두머리는 누구다 그런 걸 새긴 글씨예요. 석수 변수 이 돌을 다루는 석수들 중에서 변수라는 건 편수라고 도편수 이렇게 말할 때 그 기술자 조직 중에서 책임자 그가 누구냐면 ‘안이토리’ 이름이 좀 특이하죠. ‘안이토리’라는 사람의 이름 그러니까 양반의 이름은 아닐 거예요. 신분적으로 일반 평민일 텐데 평민인 석수 중에서 아주 기술이 좋아서 이제 이 책임자를 했겠죠.”


‘안이토리’의 이름은 훗날 승정원일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죽음을 알리는 기록이다. 수구문을 개축하던 도중 그만 돌에 깔려 중상을 입고 죽은 것이다. 이러한 기술자들의 이름은 맨 아래에 새겨져 있어서 신경 써서 살펴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쉽지 않다.


한양도성 벽에 새겨진 각자

한양도성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각자는 약 300여 개. 각자들은 간단히 군현의 지명으로만 이루어진 것도 있고, 관청이나 관직, 직책, 성명, 연도 등 비교적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것도 있다. 그런데 왜 공사 담당자의 이름을 써서 공사를 진행했을까. 공사 후 나중에 성곽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책임 소재를 묻기 위해서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책임 실명제라고 할 수 있다.


한양도성의 각 성문에는 위계가 있었다. 가령 임금은 대부분의 경우 숭례문으로 출입하였으며, 외국 사신은 돈의문을 이용하는 식이였다.

백성의 눈물과 피땀으로 쌓아 올린 한양도성은 일제 강점기에 그 맥이 중간에 끊어져 버린다. 일제는 내각령 제1호로 ‘성벽처리위원회’를 설치하고 한양도성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숭례문 좌우 성벽은 일본 왕세자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올 수 없다 하여 헐려나갔다. 결국 1930년대 말에 이르면 소의문과 돈의문, 혜화문이 철거되기에 이른다. 자연 지형을 이용해 유려하고 장엄하게 쌓아 올린 항양도성. 이 골짜기의 주인공은 바로 이 땅의 백성들이었다.


수원화성

또 다른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평지 성으로 가보자. 바로 수원화성이다. 조선시대 성곽은 평상시 읍성에서 살다가 전쟁과 같은 유사시에 산성으로 피신하는 이원 체제. 하지만 이는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그러던 17세기 중반 반계 유형원은 산성에만 의존하지 말고 읍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유형원의 꿈은 18세기 들어 비로소 수원 화성에서 현실화됐다.

수원 화성은 주민의 생활을 위한 읍성으로 축성됐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군사용 방어시설. 그런데 군사용 시설이라고 하기엔 무척 우아하고 아름답다. 수원 화성은 팔달문, 장안문, 창룡문, 화서문 등 4개의 대문을 비롯하여 4개의 적대, 5개의 안문, 3개의 공심돈, 4개의 각루, 5개의 포루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중기-horz.jpg 거중기도(정리의궤 수록)와 복원한 거중기


성벽 길이만 5.7km에 달하는 이 거대한 성곽은 단 2년 9개월 만에 완공되었다. 비결이 뭘까? 바로 거중기. 정조의 명을 받은 정약용이 당시로서는 첨단 건설 장비였던 거중기를 고안해 냈다. 거중기를 이용해 40근(24kg)의 무게로 그것의 625배 무게인 21,000근(12,600kg)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덕분에 수백 명이 오랫동안 해야 할 일을 최소의 인원과 거중기의 힘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다.

화서문에 이어진 반월형의 옹성은 평지에서 진격해 오는 적들을 효율적으로 막기 위해 둥글게 축성했다. 기존의 전통 축성 기술을 대신한 새로운 기술과 배치, 아름다운 외형 안에 갖춰놓은 단단한 방어 능력. 수원 화성은 조선 성곽 축성술의 백미다.


진주성(사진 출처: 진주관광)

이제 경남의 대표적인 읍성으로 가보자. 바로 진주성이다. 남강 가에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운 진주성은 임진왜란 때 왜적의 호남 진출을 철통같이 막아낸 성이다. 진주성은 운주헌을 비롯해 진남루, 공북문, 촉석루, 창렬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진주성. 특히 임진왜란의 3대 첩으로 손꼽히는 진주성 싸움은 매우 유명하다.

진주성은 남강 변의 암반을 따라 조성되었다. 사실 성곽으로서는 그다지 유리한 지형 조건이 아니다. 여기엔 진주성만의 특별한 축성 기술이 적용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주성은 원래 토성이었다가 석성으로 바뀐 것인데 고려시대, 조선시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고의 공법을 이용하여 축성되고 보강된 것이다.


조선 사회를 뿌리째 흔들어 놓은 임진왜란. 진주성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두 번에 걸친 큰 전투가 벌어졌다. 그중 1차 진주성 전투는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손꼽힌다. 진주의 지형은 전투를 치르기에 최적화된 곳이다. 진주성 앞으로는 남강이 흐르는데 이 강을 건너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또한 성의 북쪽에는 산이 있어서 적들이 산을 타고 넘어오는 것이 어렵다. 성의 바로 앞에는 대사지라는 큰 연못이 있어서 이 또한 건너기 쉽지 않다. 이처럼 천혜의 지리적인 이점을 갖고 이는 곳이 바로 진주성이다.

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엿새 동안 왜적과 조선군 사이의 대혈전이 진주성에서 벌어졌다. 왜군은 약 3만, 아군은 약 8천6백여 명. 게다가 왜군은 오롯이 정예병이었고 아군은 방금 농사를 짓다가 농기구를 들고 쫓아온 의병까지 모두 합한 숫자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아군이 이겼다. 도대체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 전투에서 어떤 전략 전술을 사용한 것일까?

사실은 전략 전술이랄 것도 없었다. 농사를 짓다가 온 훈련되지 않은 일반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그저 자신들의 선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솥에 물을 끓여서 성 아래로 붓는다든지, 성곽 밖에 이불을 친 후 그것에 불을 붙여 던지기도 했다. 정말 보잘것없는 방법이었지만 농민 10명이 훈련된 군사 100명을 상대로 싸워 이겼다는 것은 천혜의 지리적 이점과 함께 오르기 힘들고 공격하기도 어려운 성 덕분이었다.

왜군은 진주성을 점령한 후 전라도로 진격하려 했는데 진주성 패전으로 그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의 흐름이 바뀐 것이다. 진주성 1차 전투의 놀라운 승리는 바로 진주성을 전투에 적극 활용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진주성 촉석루(사진 출처: 진주관광)

진주성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은 북장대다. 장대란 성 안에서 전군의 군사를 지휘하거나 전시 상황을 살피는 장소를 일컫는다. 진주성 북장대는 군사 건물의 모범이라 할 만큼 잘 건축된 망루다.

진주성 안에 북장대가 있다면 남장대도 있다. 남장대의 다른 이름은 바로 촉석루. 남강 가 벼랑 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아있는 촉석루는 남원 광한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큰 규모를 자랑한다. 강 맞은편에서 보는 촉석루의 모습은 강과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처럼 고즈넉하다.

촉석루 안에서 살펴보면 밖으로 들어오는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고 밑으로 외성에 있는 군사들의 동태를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장대가 위치하기에 매우 좋은 곳이다. 원래 이 주변은 모두 암반이었다. 이 암반이 울퉁불퉁하게 올라와 있는 모습을 한자로 표현하면 ‘촉’이다. 그래서 ‘촉석’이라 했고 그 위에 누각이 있었다고 해서 촉석루가 된 것이다.


이 촉석루에서 논개는 왜장을 끌어안고 꽃잎 지듯 난간으로 떨어져 내렸다. 남강 가에 작은 섬처럼 떠 있는 바위는 논개의 충절을 기려 의안이라 부른다. 촉석루 바로 옆에 있는 ‘의기사’는 논개 사당. 우리나라 최초이자 유일하게 여성을 기리는 사당이다.

진주성을 관광지로만 아는 이들은 관심을 갖지 않을 것 같은 시설이 있으니, 바로 우물이다. 전쟁이 장기화되면 가장 필요한 것이 물이다. 물은 사람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산성의 경우엔 계곡을 포함해 성을 쌓았고 도성이나 읍성은 우물을 팠다.

진주성은 본래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도시 개발로 인해 외성은 모두 허물어지고 현재 남아있는 진주성은 조선 후기에 수축되었던 내성의 일부다.




한반도는 유사 이래 끊임없는 침략의 역사를 겪어왔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보이는 곳마다 그토록 많은 성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 그 비극적인 역사의 기억을 온몸에 아로새긴 채 끝내 이 땅을 지킨 한국의 성과, 어떤 시련에도 무릎 꿇지 않는 한국인의 기상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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