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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의 기억을 새긴 산성

by 윤슬

한반도 전역에는 3천여 개의 성곽들이 산재해 있다. 그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산성이다. 왜 한반도에는 유독 산성이 많은 것일까? 단지 이 땅의 70%가 산지로 이루어졌기 때문일까? 산성 안에서 옛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했으며 진격해 오는 적을 맞아 어떻게 싸웠을까? 산성이 품고 있는 대답을 찾아 그 문을 열어본다.



역사적으로 유난히 외침이 많았던 우리나라 선조들은 훈련된 적을 대항해 죽음의 결기로 맞서 싸웠다. 그리고 침략이 있을 때마다 산성은 백성들을 품고 백성들과 운명을 함께 했다. 그 역사의 기억들은 성곽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많은 부침을 겪었던 시기는 조선시대. 때문에 산성 또한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활용되었다. 그런데 의외로 대부분의 산성들이 축성된 시기는 삼국시대. 한반도에 현존하는 산성 중 60에서 70% 이상이 삼국시대에 축성되었다. 그 대표적인 곳이 행주산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던 곳이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쌓았을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신라 후기에 축성된 산성이다.


덕양산에서 바라본 전경

한강이 서울을 막 빠져나온 지점에 아담하게 터를 잡고 있는 덕양산은 해발 125미터에 불과한 낮은 산이지만 동서남북을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라고 불리는 곳이다. 서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북쪽은 창릉천과 습지대로 서남과 동남이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였으며 동면과 남면은 경사가 급한 험준한 지역이다. 때문에 산에서 사방을 관찰하면서 적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곳이다. 당시 육로로 진격하는 왜군이 전쟁 물자를 보급받기 위해 수로를 이용해야 했지만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면서 아군의 수도를 보호하는 면에서도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고구려 시대 이 일대의 지명은 왕봉현, '왕을 만난 곳'이란 뜻이다. 이후 고려 초에 지명이 행주로 바뀌게 됐다. 이곳에서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의 격전이 벌어졌다. 그래서 덕양산이란 이름보다 행주산성으로 더 유명하다. 당시에 부녀자들까지 나서서 치마에 돌을 나르며 전투를 도운 일화가 전해지면서 이곳의 지명과 함께 행주치마란 말이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행주산성

1593년 9월 선조 26년. 3만 대군을 이끈 왜군이 행주산성을 공격했을 때 권율 장군이 이끈 조선군은 불과 2천3백 명에 불과했다. 9차례에 걸쳐 공격을 퍼붓는 왜군을 대적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하지만 행주대첩은 의외로 대승을 거두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권율 장군은 왜군의 접근을 막기 위해 이중 목책을 설치하고, 화살을 아끼기 위해 근접 전술을 펼치는 등 효과적인 전략 전술을 펼쳤다. 3면 공격이 가능하고 조총보다 긴 사거리를 자랑하는 화차는 적의 선봉을 궤멸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기전과 비격진천뢰 같은 무기들 또한 제 역할을 충분히 발휘했다. 군인들은 물론 민간인들 특히 부녀자들까지 나서서 치열하게 전투에 임했던 것도 승리의 요인이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행주산성의 지형 자체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배수진을 치기에 매우 유리한 지형 덕분에 적군의 진입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행주산성 유적

그동안 행주산성은 행주대첩의 전승지로만 유명했다. 하지만 이곳은 우리나라 산성 축성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란 사실이 삼국시대의 유구와 유물들을 통해 드러났다.

행주산성은 석성이 아니라 의외로 토성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돌의 물성이 더 단단하기 때문에 석성이 더 견고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토성을 쌓을 때 그저 흙만 쌓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재질을 겹겹이 다져서 쌓는다. 때문에 토성이 견고하게 잘 유지만 되면 오히려 석성보다 유리한 측면이 있다. 물론 일부 구간에서는 석성도 함께 구성되어 있다.

행주산성의 토성 내부에서는 신라시대, 6세기 중엽 이후의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병사들이 생활하면서 사용했던 토기 그릇 조각들이나 건물에 사용했던 기와들이다. 철제 무기류도 일부 출토되었다. 이로써 산성의 역사가 적어도 통일신라 시대까지 올라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2017년 봄 지금까지 토성으로만 알려져 있던 행주산성에서 매우 견고한 구조의 석성 또한 발견되었다. 이와 함께 수많은 유물들도 쏟아져 나왔다. 특히 철정, 철제, 화살촉 등도 발견됐는데, 이로써 행주산성 안에 군수물자를 만드는 공방지나 군수품 저장 시설이 존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남한산성 행궁 후원

놀라운 승리를 거둔 행주대첩과 달리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뼈 아픈 굴욕과 참패를 겪은 산성이 있다. 남한산성이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최고의 축성술이 더해져 산성의 걸작이 만들어졌다.

남한산성은 해발 500미터가 넘는 험준한 자연 지형을 따라 본성과 외성을 합해 12km에 가까운 성벽을 구축하고 있다. 남한산성 역시 병자호란의 뼈아픈 패배로 잘 알려져 있어서 흔히 조선시대 산성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672년 신라 문무왕이 쌓은 주장성으로 추정된다. 그 단초는 삼국사기. 삼국사기에는 672년 신라 문무왕 12년에 지금의 경기도 광주인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남한산성은 신라시대 성의 구조나 축조 기법,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완성된 성곽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성곽의 구조와 변천 과정을 한 곳에서 모두 볼 수 있어서 산성 축성술의 교과서 같은 곳이라고 불린다.

완벽한 군사 방어 기지였지만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전쟁사에서 가장 처절한 패배의 기억을 새긴 성이기도 하다. 병자호란 당시 전란을 피해 들어간 인조가 47일 동안 남한산성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이곳에서 고립무원의 외로운 싸움 끝에 인조는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올리며 치욕을 겪었다.


아차산성 성벽 인근

이제 삼국시대에 축성돼 당대의 각축전이 벌어졌던 아차산성으로 가본다. 아차산성은 서울에 있는 산성임에도 불구하고 그 실체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차산성은 삼국이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었던 곳이다. 삼국시대에는 이곳이 도성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차지하는 나라가 서해를 통한 한반도 남북의 교통을 주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이 차례로 이곳을 차지해서 전성기를 누렸다.


그동안 아차산성은 고구려가 한강 건너 백제의 도성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근거리에서 압박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아차산성에서는 수많은 고구려 유물과 함께 신라의 유물들도 다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게다가 문헌상으로는 백제 한성시대 책계왕 당시에 아차산성을 축성한 것으로 나와 있다. 아차산성은 정확히 어느 시대의 산성일까? 이 부분에 관해 고고학 분야 전문가인 고려대 최종택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시대 성이 있어야 되고 또 고구려 시대 관련된 시설이 있어야 되고 신라성이 있어야 되는데 이게 시대가 중첩되니까 제일 마지막에 점유하고 있던 세력인 신라 유물이 가장 많이 나오고요. 고구려 유물 나오고 백제 유물이 나오는 층까지는 아직 조사가 안 됐습니다.”


아차산성_발굴유적-horz.jpg 아차산성 발굴 유적


아차산성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삼국시대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발굴은 계속 이어질 예정이어서 땅속 깊이 잠자고 있던 고대의 또 다른 유물들이 앞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도 누구든 아차산을 걷다 보면 우연히 삼국시대의 유물을 주울 수도 있다. 그만큼 이곳에 큰 건물이 있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아차산에는 현재 수많은 보루가 남아있는데 주로 고구려 때의 것이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대규모 선박 대신 소규모의 보루들을 중심으로 방어 체계를 형성했다. 이러한 보루들은 아차산성을 중심으로 20여 개소가 산재해 있다. 400~500m 간격을 두고 있는데 각각의 보루에는 100명 내외의 병사가 주둔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구려가 이곳을 차지하고 있던 6세기 전반 무렵에는 약 2천여 명의 고구려 군사들로 이뤄진 부대가 이곳에 상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학계에선 보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서 고구려가 이곳을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남중의 전방 기지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홍련봉 보루에서는 건물지와 온돌 유구, 저수시설, 배수시설 등이 발굴되었다. 유물은 주로 투구를 비롯해 활과 함께 사용되었을 화살촉 등 다양한 무기류들이다. 대부분 토기류와 철기류인데 남한에서는 처음으로 고구려 연화문 수막새가 출토되었다. 대부분의 유적에서 농기구인 보습이나 괭이, 쟁기 등도 많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이곳에서 농사도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차산성은 고대 삼국의 역사를 품은 채 묵묵히 그곳에 서 있다. 이렇듯 긴 시간의 부침을 겪어낸 유물들이 그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마로산성 성곽

이제 백제시대의 산성을 찾아 멀리 광양으로 가본다. 백제시대 광양의 이름은 마도현이었다. 이곳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접경 지역으로 바다와 접해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동안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적 가치와 의미가 매우 깊은 산성이 그곳에 있다. 사적 제492호인 마로산성은 해발 208.9m의 마로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마로산성은 6세기 초에 축성되어 9세기까지 백제와 통일신라 시대에 걸쳐 이용된 고대 성곽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구와 유물로 인해 우리나라 고대 산성 연구에 매우 중요한 곳일 뿐만 아니라 당시의 생활상을 살필 수 있는 보기 드문 문화유적이다. 특히 백제시대 석성의 역사를 쓰는데 매우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로산성의 규모는 주변 둘레가 약 한 450m 정도 되는데 이 정도 규모의 성곽은 백제시대에 한 지역을 다스렸던 행정기관이 있었던 곳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시대에 석성을 축성할 때 돌을 다듬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큰 돌을 단순히 깨서 쌓는 방법과 벽돌처럼 네모나게 다듬어 쌓는 방법이다. 마로산성을 쌓은 백제시대 장인들은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했다. 특히 성벽은 계단식으로 성벽 돌이 밖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한 후에 쌓아 올렸다. 그럼으로써 성벽의 무게를 분산하고 빗물이나 지하수가 성벽에 스며들어 성벽 전체가 앞으로 미끄러져 붕괴되는 현상을 방지할 수 있었다.


마로산성에서 출토된 토제마

다섯 차례에 걸친 마로산성 발굴 결과 수많은 유구와 유물들이 발굴돼 고대 산성 연구 및 당시의 생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특히 토제마 285점을 비롯해 철제마 한 점 등 총 291점에 달하는 말 인형이 발굴됐다는 것이 특이하다. 토제마는 지금까지 단일 유적에서는 가장 많은 양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한 개도 온전한 것이 없고 다리 부분이나 목, 꼬리 부분이 잘려 있다. 말은 고대의 영험하고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다. 따라서 토제마는 당시 고구려 시대 악령과 관련한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로산성 집수정

마로산성에서는 집수정도 다섯 군데 발견됐다. 가장 위에 있는 원형 집수정은 백제시대 우물이며, 나머지 4개는 통일신라시대 우물이다. 넘치는 물은 배수로와 성벽에 설치한 수고를 통해 성벽 바깥으로 흘러나가도록 처리했다.

우리나라 고대 산성에서 석축 집수정이 출토되곤 했는데 이처럼 한 곳에 5개나 되고 또 백제시대 때에 이어서 통일신라 시대까지 집중적으로 출토된 예는 광양 마로산성이 처음이어서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또한 대외 교류를 알 수 있는 유물도 두 점 출토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네모난 동경(거울)인데, 동물과 포도 문양이 그려져 있어서 ‘해수포도경’이라고 하는 당나라 유물이다. 또한 우리와 다른 색깔의 중국 청자도 나왔는데 이로써 당시 이곳 서남해안 지역에 지속적으로 해외 교류를 했던 집단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산성은 우리나라 전쟁사와 생활사뿐만 아니라 대외무역의 역사까지 증명하는 귀중한 야외 박물관이다.

혹여 산성에 가거든 그저 관광지로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을 일이다. 성벽을 따라 걷다가 벽에 귀를 가져다 대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시라. 혹여 아주 먼 옛날 우리 선조들이 치열하게 싸워왔던 전투의 함성 소리가, 말발굽 소리가 멀리서 들려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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