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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선 May 05. 2023

우울증을 마주 보다

우울증 수기 3

우울증 수기 3편은 우울증을 극복해 보기로 마음먹게 된 계기에 대해 썼었네요.

바로 이어집니다.




Happy families are alike;
every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Leo Tolstoy, Anna Karenina-


책을 읽을 때 한 가지 습관이 있다. 마음을 울리는 대목이 있으면 그대로 필사를 해둔다. 이런 글귀들은 단순히 구성이나 뜻이 좋은 것을 뛰어넘어 명치 깨에 있는 종과 같은 무언가를 강하게 울려 시선을 마비시킨다.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니나를 읽을 때는 첫 장을 펼치자마자 필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이 문장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매슬로의 욕구 피라미드. 기반만 무너져도 전체가 무너진다

가정뿐만이 아니다. 인생이 그렇다. 내 주변을 봐도, 다른 이의 주변을 봐도 행복한 사람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한데 반해 불행한 사람은 저마다 다른 불행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사실 두 말하면 잔소리일 정도로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행복이라는 게 단 한 가지의 조건 만으로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이라는 복합체를 완성한 사람들은 그 구성품인 조건들을 거의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행복이라는 복합체를 완성하지 못한 사람들, 그러니까 불행한 사람들은 그 구성품인 조건들에서 한 두 가지 혹은 몇 가지 부족한 부분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수학적 표현을 빌리면, 창조라는 것은 수렴해야만 하는 것인데 반해 파괴라는 것은 발산해도 무방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내 생을 끄지 않고 유지하는 방법, 즉 사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지만 죽는 방법은 아주 다양하다는 사실과 비슷하다. 어떤 것이든 창조는 어렵고, 파괴는 쉽다. 어떤 삶이든 사는 것은 어렵고, 죽는 것은 쉽다. 그렇다. 이 빌어먹을 삶이라는 건 우라질 나게 어려운 것이었다. 그게 기본이다. 우리는 정말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인생살이라는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다는 이 사실이,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우리가 다른 이에게 동질감, 연민, 동료의식, 우정을 느끼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어준다고 생각한다.


약 한 달 전, 사실 나는 나만의 발산을 준비하기 위해 신변을 정리를 하고 있었다. 수단과 비용을 계산했고, 필요 없는 물건들을 버리기 시작했고, 그중에서 쓸만한 것들은 누군가에게 나눠주기 위해 준비했으며, 나와 관계한 사람들 중에 아직 전하지 못한 말이 있는 이들에게는 먼 사이부터, 가까운 사이의 순으로, 미안함을 전해야 하는 사이부터, 감사함을 전해야 하는 사이 순으로, 한 명씩 천천히 연락을 해나가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끝내기 전에 결말을 보지 못한 이야기들은 그게 무엇이든 매듭을 짓고 싶어서 오래전에 보기 시작했다가 완결을 보지 못한 시리즈, 영화들을 하루 종일 몰아보기도 했다.


확실히, 어떤 이야기들은 질질 끌지 말고 제 때 끝내야 한다. 박수 칠 때 떠나야 한다. 대상이 내 인생이라고 해서 다른 잣대를 적용할 일은 없다. 좋은 기억이 하나라도 더 많을 때 떠나는 것이 낫다. 살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인생을 사는 것은 죽을 때까지 거위에게 짓밟히면서 연명하는 잔혹한 일일 뿐이다. 내겐 책임질 것이 그 무엇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니까. 그 생각에는, 한 달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어느 날, 한 가지가 달라졌다.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욕망이 생긴 것이다. 욕망이 생기니 의지도 생겼다. 우울증과 이 우울증을 준 세상으로부터 도망갈게 아니라 직면해 보자는 의지가. 이런 기분이 드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생소할 정도였다. 마치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처럼, 어색하고 오묘한 느낌이었다. 그 변화는 내가 10여 년째 쓰고 있는 노트에서 시작되었다. 안나 까레니나의 첫 문장도 적혀있는 그 노트에서.


그 노트를 정말 오랜만에 열어 본 것은 역시 신변 정리를 위해서였다. 10여 년 간 쌓인 기록이라면 성년 즈음부터 지금까지 함께한 것인데 당연히 정리 대상이었다. 치울 것은 치우고, 정리해야 했다. 머물다 간 자리는 아름답고 싶으니까.


조금 더 솔직하게 쓰자면, 언젠가 어딘가에 써놨던 유서 비슷한 것을 찾기 위해서 그 노트를 들추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노트의 시작은 각기 다른 실물의 수첩이었고, 에버노트를 지나 이제는 원노트에 쌓여있다. 그 노트에는 정말 오만가지의 것들이 있다. 독서하며 필사한 것들, 사는 데 필요한 정보들, 갖가지 서류들, 디자인 이론, 유용한 알고리즘, 외국어 공부 자료들, 첫 회사에서 쓰던 업무 일지 내가 가장 오래 다닌 회사에서 썼던 노트들의 아카이브, 온갖 아이디어들, 자잘한 생각들, 그 생각들이 발전한 에세이, 소설의 습작들. 그리고 그곳엔 나중에 써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휘갈겨 미뤄뒀던, 이런저런 이야기의 소스들이 있었다. 헤밍웨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야기를 시작해 나갈 수 있는 주스들이, 10여 년간 유예되어 쌓여가기만 했던 시작 하지도 못한 이야기의 씨앗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 하나하나 모두 다시 읽어 보면서 "살고 싶은 기분"이 조금씩 다시 얼굴을 치켜들기 시작했다. "쓰고 싶다"라는 표정으로.


그러다 옛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누구와 그런 대화를 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몇 시간 후에 죽는다면 지금 무엇을 할 거냐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대화였다. 상대는 가족들과 함께 아름다운 곳에서 한가한 때를 가지다가 죽으면 좋을 것 같다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이런 대답을 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 후 그 품에서 무언가를 쓰다가 죽고 싶다고. 중2병이라는 것이 폭발한 것이었지만, 진심이었다.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할 것 같았다. 내가 쓰고 싶어서 모아두기만 했던 시작 하지도 못한 이야기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여한이 남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바람직한 인생상이 거쳐야 하는 굵직한 경험들 중에 내가 아직 해보지 못한 게 있다면 대표적인 두 개는 결혼과 2세를 보는 것이다. 즉, 내 가족을 만드는 것.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다. 하지만 내가 당장 죽어서 그걸 경험해보지 못한다고 해서 여한이 남을 정도로 큰 아쉬움이 남을 것 같지는 않다. 애초에 가족의 정이라는 걸 잘 느끼지 못하고 자라서 그랬을까. 반면 저 주스들 중에 적어도 하나라도, 하나라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내 이야기를 마무리한다면, 그건 분명 여한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눈 뜬 욕망은 작은 의지를 불러들였고, 의지는 사소한 노력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날, 현관부터 몇 달간 쌓여있던 쓰레기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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