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하는 것에 감사해 보기
앗, 제목을 잘 못 적었네요.
앗, 아니네요, 제대로 적었네요.
네, 맞습니다. 제가 텃밭에 감자를 심은 게 아니고요. 네, 오타가 아니에요.
네. 텃밭이 제게 감자를, 아닌 감사를 심은 게 맞습니다.
제가 텃밭에 싶은 건 콩이고요...
크흠. 올해 영국으로 오는 길에 독일에 2주 정도 들렀다 왔는데 그때 노잼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었나 보다. 시답잖은 개그들이 시시각각 떠올라서 큰일이다. 한 문장도 제대로 쓰기가 힘들다. 마스크 대신 귀마개를 하고 다녔어야 했나.
나는 비를 싫어한다. 한국 다람쥐 비 선생님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물론 태희 누나 때문에 그 선생님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걸로 알고는 있지만...
크흠.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싫어한다는 말이다. 정말, 정말 정말 싫어한다. 이전에는 정도가 지금보다 더 심했어서 약속이 있어도 비가 내리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약속을 취소하곤 했다. 딱 오늘처럼. 사실 오늘 영국의 새 왕 찰스 3세의 대관식 행렬을 구경하러 런던에 가려고 했는데 새벽부터 비가 내리는 걸 보고 단번에 단념해 버렸다. 이제는 담마를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타인과의 약속을 취소할 정도로 비를 싫어하진 않지만, 이렇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경우에는 여전히 비라는 현상에 영향을 꽤 받는 편이다. 아침에 알람을 듣지 못하고 늦게 일어나서 밖을 확인해 보면 영락없이 비가 내리고 있다. 비가 내리면 몸도 마음도 추-욱 처지고 정신은 산만해진다. 우산을 들고나가야 하는 번거로움, 비를 맞고 젖은 우산, 옷, 머리, 공기의 그 축축함, 눅눅함이 싫었다. 비 내리는 것에 예민한 사람일수록 미친놈일 확률이 높다는데, 과거의 나를 보면 낭설만은 아닌 것 같다는 게 솔직한 소감이다.
뮤지컬 배우였던 친구가 있었다. 두 술어가 모두 과거형인 이유는 지금은 연락을 하고 지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뮤지컬 배우를 하고 있는지, 여전히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는지, 아니, 나를 기억이나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의문은 사실 조금만 검색해 봐도 알 수 있는 답이긴 한데, 굳이 해보진 않으련다. 연락하고 지내던 시기에도 친구 사이라기보다는 배우와 팬의 관계였다고 말하는 게 좀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 그 친구가 내게 말했다. 나와 정확히 같은 이유로 비 내리는 날을 정말, 정말 정말 좋아한다고. 축축 쳐지는 축축함이, 그 눅눅함이 자기도 세상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서 좋다나? 그 얘기를 듣고 상당히 놀랐었다. 정확히 같은 이유로 정확히 반대의 결론을 도출해 내는 사람과 상황을 마주한 게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나는 그때 그녀한테 반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반대에 끌렸기 때문... 은 아니고, 그냥 그 친구가 이뻤기 때문이다. 아, 찌질했던 옛날이여.
매번 이런 식이다.
이제 충분히 성숙했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 지나고 돌이켜보면 그 역시도 찌질했다는 걸 절감하게 된다.
이건 나의 속성일까, 회고라는 행위의 속성일까, 시간의 속성일까.
담마가 이 순환을 끊어주길 바랄 뿐이다.
그땐 그 친구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인정했을 뿐. 지금도 여전히 나는 비를 좋아할 순 없다. 이건 아마도 내 뇌내에 새겨진 속성 같다. 요새 핫한 AI 기술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Chat GPT에게 '너는 비를 싫어하는 녀석이야'라는 선행 프롬프트가 주어진 것과 같다.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서 예보를 확인했을 때 한주 전체를 회색 구름과 하얀 작대기들이 가득 채우고 있으면 한숨을 쉬곤 한다. 거기에 더해 옆에 영국인 친구가 있는 상황에서는 신명 난 불평을 한 자락 늘어놓기도 하는데, 담마를 수련한다는 사람이 불평을 하면 쓰나 싶겠지만, 나는 영국의 평화를 위해 그들의 날씨 불평을 조금 거들어주고 있을 뿐이지 예전만큼 비를 혐오하는 건 아니다. 이 불평은 조화를 위한 불평이다. 진짜다.
영국의 우중충하고 언제고 비가 내릴 수 있는 변덕스러운 날씨는 공공의 적이다.
불가항력을 공공의 적으로 가질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게다가 그 불가항력이 아무리 지랄 맞다 해도
어딘가의 지진처럼 인명피해를 주진 않잖은가? 이 정도면 귀여운 공적이지.
적어도 이 세상에 넘치는 사람에 대한 증오를 키우진 않으니까.
나는 어떻게 비에 대한 혐오를 지울 수 있었을까? 담마를 수련함으로써 갈망과 혐오에 대한 애착을 지워가는 것이 분명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 담마 레벨은 쪼렙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비에 대한 혐오를 지금처럼 없애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한 가지 트릭이 있었다. 사실 오늘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결국 이 트릭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었는데 무슨 서론이 이렇게 길었는지. 역시 비가 내리는 날에는 글을 쓰면 안 되나 보다. 정신도 글도 어딘가로 수렴하지 못하고 자꾸 애먼 데로 발산하려 한다. 나는 체류할 곳을 상당히 잘 못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아, 이 글은 용두사미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것이 담마니까.
트릭은 내가 텃밭에 콩을 심으면서 시작됐다. 평생 도시에서만 살아서 식물이라는 걸 심어본 기억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웬 텃밭?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 내게 양질의 '영국인 사용 설명서'가 돼준 책, 케이트 폭스의 '영국인 발견'의 한 꼭지를 읽어보자.
영국인다움의 규칙을 찾기 위해 참여관찰 조사를 몇 년씩 할 필요가 없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사생활 규칙은 하도 분명해서 심지어 이 나라에 한 발도 딛지 않은 채 헬리콥터 위에서도 볼 수 있다. 영국 동네 상공을 몇 분만 돌아보면 거의 모든 주택가가 작은 잔디밭을 가진 조그만 상자 모양 집들의 오와 열로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떤 지역의 경우는 그 상자가 회색이거나 붉은 갈색이기도 하다. 그보다 더 잘 사는 동네는 상자들 사이 간격이 조금 더 넓고 거기에 달린 정원도 좀 더 크다. 그러나 원칙은 명확하다. 영국인은 자신만의 조그만 상자 안에서 자신만의 '초록색 조각'을 가지고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 관찰은 최근 통계에 의한 것이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은 1990년에 지어진 반 이상의 집이 아파트이다. 영국은 15%만이 아파트이다. 거의 70%의 영국인이 주택을 소유하여 살고 있고 이는 유럽 평균을 훨씬 넘는다.
참으로 우스운 일은 초록색 조각에 대한 우리들의 집착이 무자비한 교외도시 개발과 환경파괴, 공해 등을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영국인은 아파트에 살거나 구내 정원을 같이 쓰는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은 절대 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상자와 '초록색 조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7할의 영국인이 주택을 소유해서 살고 있다는 수치는 놀라운 수치다. 최근 통계는 거의 80%에 육박하는데, 참고로 한국은 아파트가 60% 정도, 단독 주택이 20% 정도로 거의 정반대의 모습이다. 주거 형태의 선택은 개인의 기호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조건들이 영향을 미칠 것이지만 특히 한국이 영국보다, 서울이 런던보다 면적은 작은데 인구밀도는 훨씬 높다는 게 가장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 조건이지 않을까. 조그만 아파트 하나 장만하기도 어려운 실정에서 단독 주택은 그림의 떡이니까. 이놈의 부동산. 하고 싶은 말이 이게 아니었는데, 집 얘기가 나오니 여전히 울컥하는 게 있는지 삼천포로 빠져버렸다.
초록색 조각.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이거였다. 여기서 초록색 조각은 뜰, 정원, 텃밭 등을 의미한다. 거기서 초록색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식물. 영국인들은 자신의 공간에 초록색을 채우는 것에 상당한 열정을 보이는 사람들이다. 하루는 영국인 친구의 가족 식사에 초대를 받아서 대화를 나누는데 이런저런 주제가 오가다가 Gardening(정원 가꾸기)과 Allotment(한국의 주말 농장 같은 것)에 대한 얘기가 식탁 위에 올랐다. 내가 한 번도 땅에 식물이라는 걸 심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니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놀라더라. 나는 그들의 반응에 놀랐다. 이게 그렇게나, 그 정도로 놀랄 일인가? 이제 식목일은 휴일도 아니란 말이다.
텃밭을 일구는 것에는 많은 장점이 있다고 한다. 운동도 되고 신선한 채소도 얻을 수 있으니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거라나? 몸을 움직이게 되니까 건강해지는데 동시에 배가 고파지고, 그럼 그걸 텃밭에서 얻을 과실로서 또 건강하게 채울 수 있는, 아주 건강한 싸이클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 과실이 시간차가 있다는 것 정도인데, 뭐 어느 과실이 안 그렇나.
또,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의 건강도 챙길(Mindfulness)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시민 농장에서는 오며 가며 이웃들과 더 잦은 왕래를 할 수 있고 각기 다른 채소, 과일들을 심으면 서로 나누어 먹을 수도 있어서 사이가 돈독해진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서울에서 10여 년을 홀로 살면서 이웃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었다. 얼굴은 몰라도 그 사람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신음 소리는 어떤지, 피아노, 기타, 노래 실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는 아는, 뭐 그런 관계가 있었을 뿐이다. 그래도 아주 어렸을 때까지는 어딘가로 이사를 가면 엄마가 떡을 돌리러 갈 때 따라나서서 인사도 하고 그곳에 또래가 있으면 같이 어울려 놀기도 하고 왕래를 했는데. 열쇠를 두고 나갔는데 엄마가 집에 없으면 옆 집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말이다. 세상이 하도 사람들을 바쁘게 달달 볶아대니 그런 좋은 여유와 잉여들이 열기와 함께 휘발되어 날아가버린 것 같다. 편리한 세상이 인간 관계도 너무 편리하게 만들어 버린 게 아닌가 싶다.
Haste makes waste,
뼈를 깎아서 얻은, 한 순간도 잊고 싶지 않은 교훈이다.
슬로 라이프(Slow Life)를 살고 있는 요즘. 그 미학을 좀 더 내가 발을 딛고 있는 땅, 흙에서부터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도 무언가를 심어 보기로 했다. 게다가 나만의 '초록색 조각'을 가져보는 게 영국인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그게 영국 문화를 보다 잘 이해하는 길이고 결국엔 내 영어 실력에 자양분이 될 테다. 그래서 나는 친구의 텃밭 한편을 빌려 그곳에 콩을 심고, 작은 화분에 딸기를 심었다. 그렇게 생에 처음으로 이 땅에, 이 삶의 터전이 되어준 지구에 뭔가를 직접 돌려줄 수 있게 된 것이다. 항상 가져가기만 하는 인간이었는데 말이다.
담마를 수련하면서 경험한 것 중 하나는
지식보다 경험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모르면서도 안다고 착각하며 살았나.
AI의 시대에는 더더욱 경험이 중요해지지 않을까.
그렇게 딸기와 콩을 심은 이후, 작은 변화가 생겼다. 첫째, 더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요새는 아침 5시 반에 자동으로 눈이 떠진다. 그러면 따뜻한 머드 한 잔으로 몸을 데우고 근처에 있는 친구의 텃밭으로 향해 물을 준다. 이렇게 아침을 시작하면 기분이가 굉장히 상쾌하고 좋다. 하루를 잘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는 작은 보람, 좋은 연료를 얻은 셈이다. 책임이랄 게 없던 내게 작은 책임이 생긴 것이다. 이 작은 녹색 생명체들을 잘 지켜내야 하는 책임이.
두 번째 변화, 결국 이 말을 하고 싶은 거였는데, 비가 내리는 것에 일말의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다. 내 일을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가 내리는 날이면 텃밭에 나갈 필요 없이 여유롭게 새벽 요가를 즐길 수 있다. 싫어하는 것에게 감사할 일이 하나 생긴 것이다. 이제 비 오는 날이 싫지만은 않다.
싫어하는 걸 좋아하긴 힘들다. 당연하다. 싫어하는 건데 그걸 좋아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엄청난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고 엄청난 저항이 있다는 말은 엄청나게 많은 정신력과 인내력이 소모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루 동안 쓸 수 있는 인내력과 정신력이 제한되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상기한다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런 억지 노력은 기피하게 되는 것이다. 잠시 성공했더라도 오래가지 못한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또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는 안돼. 나는 의지가 너무 약해.' 등의 형태로. 그렇게 정신력과 인내력을 고갈시키는 악순환에 빠진다.
그러니 싫어하는 걸 좋아하려고 억지로 노력하는 대신, 작은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증오가 갉아먹는 것은 결국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증오의 주인이니 그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내는 데에 더 도움이 되면 됐지, 피해를 주진 않을 것이다. 내가 아버지를, 또 나 스스로를 용서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은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