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소확행이란 단어의 열기가 뜨거웠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함의를 가진 이 단어의 자체적인 파급력은 이제 제법 잠잠해졌지만, 표상하는 바는 이미 뿌리 깊게 우리 사회와 일상 한 켠까지 자리하게 된 모양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소확행이라는 말의 유래는 일본이다. 그들의 소확행이란 뿌리 깊은 축소 지향적 국민성에서 출발한 일종의 라이프 스타일이 그저 단순히 사회적 언어로 구체화, 제고된 것에 가깝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다르다. 한국인의 국민성은 대체로 일본과는 정 반대이다. 코딱지만한 국토이건만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준대형차급이 가장 많이 팔리는 국가가 한국이다. 요컨대 한국인들이란 대체로 확장 지향적이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며 실용보단 체면을 중시한다. 소확행이라는 단어와는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아보인다. 그렇기에 한국에서의 소확행이란 그 의미가 일본과는 자못 다를 수 밖에 없게 된다.
다분히 가치중립적인 듯 보이는 이 단어와 그로 말미암은 세태를 향해 과연 ‘왜?’ 라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공지의 사실이지만, 작금 한국 사회는 기나긴 어두움을 지나오고 있다. 실업, 경제 침체, 인구 절벽, 세대 및 젠더 갈등, 온갖 지리멸렬한 단어들이 사회 도처에 자리하고 있다. 그 단어들의 무게를 최전선에서 가장 절실히 받아내고 있는 이들 중 하나가 바로 청년 세대인데, 이들은 공교롭게도 소확행 세태의 중심에서 가장 열광적인 지지와 호응을 보낸 군상이기도 하다. 과연 많은 점을 시사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유사 이래, 사회의 뿌리라 할 만한 청년 세대는 대체로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이었다. 생물학적으로도, 사회학적으로도 그것은 그러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젊고 건강한 육체와 생생한 두뇌와 치기어린 영혼을 갖고 있고, 사회는 필연 그 활력과 생기를 성장 동력으로써 갈망하기에 그들을 충동질하고 부추기고 응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금 한국의 청년 세대와 사회는 어떠한가.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일, 특정 세대만을 돌볼 여유나 여력 따위는 없어진지 퍽 오래다. 거국적이고 웅대한 미래를 꿈꾸고 설계하는 것은 당장 몸 뉘일 공간과 밥벌이가 걱정인 청년들에겐 머나먼 별 세계 이야기일 뿐이고, 곳곳이 곪아 병들어가고 있는 사회로선 그저 두드러지는 환부들부터 돌보기도 마냥 바쁘다.
이 지점에서 소확행이라는 표상은 다분히 매력적이게 된다. 청년 세대들은 본질과 현실 사이의 간극으로 말미암은 공허함과 무력감을 멎게 해줄 마취제로써, 사회는 그러한 청년 세대의 불평과 준동을 막아주는 입마개로써 ‘소확행’이라는, 옹졸할지언정 가시적이고 당장 손에 잡히는 매질을 유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적어도 한국에서의 소확행 세태란 결국 슬프고 허무한 동족방뇨(凍足放尿)이자, 산재한 문제들의 낭만적인 은유로써도 귀착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이상은 어디까지나 사견에 지나지 않는다. 은연 중 밝혔듯, 모든 이들이 상술한 사고 과정 끝에 소확행을 추구하게 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지나치기 쉬웠던 것들에 대한 조망 등 대체로 알려진 소확행의 긍정적인 면모를 품은 채로 그러한 삶을 좇게 된 이들도 분명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옹졸하지만 확실한 현재의 것들'을 위주로 천착하는 것이 결국 소확행의 본질일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심각함을 덜어내고 낙관적으로 보아도 그것이 열광적으로 호응받고 범 사회적, 세대적 카테고리로까지 자리하게 된 오늘날의 모습이 썩 유쾌하게 다가오지만은 않는 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