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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선아 Feb 02. 2023

시 쓰기 수업 중에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솔직하게 쓰고 詩 라고 우기면 시가 된다 01


시 쓰기 수업 중에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유선아

       



시 쓰기 수업에서 물건을 묘사하라고 했다.     


가까이에 있는 것도 좋고

좋아하는 것을 묘사해도 좋다고 했지만

물건에 애정을 쏟는 편이 아니다.     

방금 거의 다 마시기를 마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겼던 일회용 플라스틱 컵이다.

지금은 약간의 얼음과 그보다 훨씬 더 약간의 음료가 남아있다.   


높이는 손가락을 크게 벌린 한 뼘 정도인데

내 손가락에는 성별이 모호하여

과연 나의 한 뼘이 기준에 적합한 단위인지 몹시 고민스럽다.     


이것의 무게가 몇 그램인지는 모른다.

수치에는 관심이 없을뿐더러 재능도 없다.

덜렁 컵만으로는 공기와 별다를 게 없는 무게라고 했을 것이다.

플라스틱은 가볍고 지구에 유해함은 무겁다.

그 무게를 알고도 매일 그 컵으로 커피를 마시는

내가 제일 무섭다.     


어쨌든 아직 얼음이 있어 그것은 계란 한 알보다 조금 더 묵직하다.

껍데기 안으로 출렁대는 것들이 같이 들었어도 

생명이 깃든 것과 아닌 것은 다르다.

계란은 가만두면 병아리가 되었을 텐데

얼음은 녹아서 무엇이 되나.

소재가 되는 중이다.     


플라스틱 컵은 투명해서 안이 훤하게 보인다.

그래도 눈동자를 컵 안으로 집어넣어 살폈는데

남은 건 얼음뿐이라 얼음을 뒤졌다.

끝이 둥근 사면체다. 

펼쳐서 전개도를 만들고 그것을 다시 돌돌 말아서

돌돌 말린 얼음을 만들어보고 싶다.

돌돌 말린 것을 입에 물면 입술도 돌돌 말려

휘파람이 불어질 것이다.

휘파람이 나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호그와트에서 팔아보면 어떨까.

거기서는 꼭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컵으로 파는 게 좋겠다.


얼음은 어느 정도 녹아 표면이 부드럽다.

만지면 차가울 것 같지 않은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내가 보일 것만 같다.

아마도 잠망경처럼 화려하고 분궤된 모습이겠지.

얼음이 차가운 이유는 내가 나눠 보여서인가 보다.     


얼음이 일 초씩 떨어지며 위태하게 남아있는 면적만큼 

컵 안의 온도와 바깥의 온도가 불협하여 만들어낸 물방울이 맺혀있다.

차가운 것에 땀이 몽글몽글 흘러 우스운 기분이 든다.

식은땀의 정의를 새로 써야겠다.

아파서 식은땀이 날 때에도 이 장면을 떠올리면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얼음을 씹어먹는 일을 좋아한다.

상쾌함이랑 닮은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정신이 번쩍 드는 소리랑도 닮았다.

이와 얼음이 부딪히고 깨지며 나는 소리를

와작와작 관자놀이에서 들을 때면

번개 치는 그 주파수가

아주 마음에 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얼음을 먹으면 체온이 떨어진다.

손끝에서 한기가 돌아 살아있는 사람의 손처럼 느껴지지 않을 만큼.

사아아 피가 얼어붙는 것처럼 추위에 얻어맞으면서도

입 안은 뜨거워서 계속 얼음을 집어넣는다.

인형 뽑기에 영혼을 쓸어 담아 넣듯이 얼음 소진 시까지 입 안으로 추가추가.

나의 조상에는 변온 동물이 섞여 있나.     


말이 많아서 부끄러운 기억이 곳곳에 있다.

말을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었다.

입을 다물고 싶어서 얼음을 씹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입을 다물지 못해서 입 안이 뜨거운 것은 맞는 일이고

입을 다물고 싶어서 시를 쓰자고 했다.     


자꾸 쓰다 보니 얼음 얘기만 하는 중이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겼던 플라스틱 컵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얼른 남은 얼음을 다 먹어버려야지.

추워도 괜찮아, 시를 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제목을 ‘시 쓰기 수업 중에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라고 해두었으니

시 쓰기랑 얼음 얘기를 하는 게 맞다.

오히려 컵 이야기를 빼야 하는 게 아닌가.

차암나 커피 얘기는 하나도 안 했다.

형식에 맞게 하는 일은 역시나 여전하게 하지 못한다.

그래도 괜찮아, 시는 그래도 된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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