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이 갖는 힘
그래도 일에 대한 기본과 예의는 갖추고 합시다
"스테이플러"를 모르는 사람이야 없을 것이다.
("스테이플러"라고 더 많이 불렀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업무를 하면서 촌스러워(?) 보이기 싫어 이제는 잘 말하지 않는 단어다.)
업무를 하면서 펜 다음으로 많이 쓰는 업무용품이 스테이플러일 것 같다.
아무래도 공직은 아직도 페이퍼를 중심으로 일을 하는 곳이라 어떤 의미에선 펜보다도 스테이플러를 많이 쓰고 있다. 가끔 급히 보고서를 출력해서 스테이플러를 찍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친한 형님이 어느 날 이런 이야기를 했다.
"확실히 고위 공무원은 뭔가 달라도 다른 게 있는 거 같아. 스테이플러 찍어온 것만 봐도 그렇거든"
웬 스테일플러지?라는 생각이었다. "스테이플러가 왜요 형님?"
"가끔 중앙부처 사무관들하고 미팅을 할 때 주는 자료를 보면 정갈히 종이를 맞춘 다음에 스테이플러를 깔끔하게 찍혀 있거든. 그냥 막 찍지 않더라. 기본자세가 되어있다는 거지"
아. 그걸 보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그 이야기를 듣기 전에 내가 어떻게 스테이플러를 찍었는지 잘 기억나진 않지만 그래도 종이를 잘 맞춰서 찍었지 않나라고 자문했던 기억이 있다.
스테이플러를 찍을 때 종이를 잘 맞췄는지 보는 사람이 있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별거 아닌 그 행동을 보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종종 급히 스테이플러를 찍을 때도 종이를 맞추고 있는 나를 보며 실소를 흘리곤 한다.
그런데 업무를 계속해나가며 여러 동료나 업무 관계자를 만나게 되면서 그 형님의 말이 많이 틀리거나 특이한 해석은 아니구나를 느끼는 순간들이 있었다.
급하니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니까 등등 그냥 그렇게 대충 허투루 일을 하는 사림들을 꽤 많이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스테이플러 찍는 게 무슨 대수라고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일, 별 것 아닌 일을 어떻게 해내고 있는가가 자신이 그 일에 대하는 기본적 태도를 여실히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에 대한 정성과 성의는 단순히 형식적으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 일에 대한 실질적인 진심까지 담아낼 수 있다. 어느 누가 성의 없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고,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드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 주변에서 정성을 들이지 않은 일들이 어떤 사고와 사건을 야기하는지 모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간단하게는 매년 수립하는 사업계획을 작성할 때 이전 자료를 참고할 수는 있지만 날짜도 바꾸지 않고, 이름이 변경된 유관부서의 명칭도 확인하지 않고 할 일을 다했다며 제출하는 사람을 보며 어떻게 저렇게 일을 하며 지금까지 월급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도 있다.(더 많은 경험이 있지만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것이 기분 좋지는 않아 여기까지만 쓴다.) 사회적 차원에서 봤을 때 철근이 빠진 채 지어진 아파트나 비가 오는데 시멘트 타설을 하는 공사장 같은 일들이 상식적으로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의아할 뿐이다. 기본적인 자신의 일에 대한 성의와 예의가 없는 사례들이다.
정성과 성의를 다한 일은 쉬이 어그러지거나, 허망하게 흩어지지 않는다. 물론 공든 탑도 무너질 수 있지만 그래도 공을 들인 일은 부실공사와 같이 정성과 성의 없이 진행된 일처럼 어그러질 때 와장창 다 무너져내려 기초조차 남지 않는 그런 일까지 일어난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공든 탑은 그래도 수습이라도 할 수 있는 여지가 남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일에 대한, 사람에 대한, 삶에 대한 성의 있는 태도는 건물의 초석이나 철근, 혹은 관계에서의 접착제와 같은 역할을 하기에 혹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최악의 상황까지 갈 것을 막아주는 지지대, 버팀목이 되는 것이다.
일이나 업무에 한정해서 정성을 말한다면 내가 정성을 들이지 않고 그냥 해버린 일이 문제가 생긴다면 나만 힘들고 말 일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과 민폐를 끼치게 된다. 사람 간의 관계에 있어서야 성의 없이 대한다면 그 사람을 멀리하고, 다시 안 보면 되는 것이지만 일은 그렇지 않다. 자기의 업무에 있어 성의 없이 임하는 사람이 온전히 자신의 몫을 해내기 어려울 것이고 업무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하면 문제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성의 없는 일처리들이 꼭 그렇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닐 수 있지만 그런 확률에 기대서 일을 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정성을 다해 성의 있게 해 달라는 것이 무리하거나 무도한 요청은 아니다. 꼭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니까 정성과 성의를 다 할 뿐인 것이다. 그것이 단순한 스테이플러를 찍는 행동이라도 정성을 들인 것은 그 일에 대한 나의 자세와 태도를 대변해 주게 된다. 이런 작은 정성이 모여 내 태도를 만들고, 내 태도가 모여 평판과 역량의 기초가 된다.
(모두가 다 정성 들여 업무를 하는 사람을 알아보진 않을 수 있지만 분명 누군가는 그런 태도와 자세를 알아보고 인지하고 있다)
모든 업무에 있어 매 순간 최고의 정성을 다해내는 것은 어렵고, 어떤 의미에서 맞지도 않을 수 있지만 그래도 자신에 일에 있어 최선의 정성은 기울이며 살아가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내 업무에 관련된 다른 사람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이왕 하는 일, 그래도 부끄럽지 않게 최소한의 정성이라도 담아 하는 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