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콜리
로버스앤러버스가 <킬 유어 달링>을 이번 호의 소재로 선정한 이유는 사실 순전히 영화의 무드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드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가을과 겨울 사이의 계절감과 이를 드러내는 주인공들의 패션이다. 특히 사건과 스토리보다 루시엔이라는 인물의 매력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화에서 패션은 인물의 매력을 극대화하고 그에게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영화의 비하인드에서 말하길, 영화를 찍는 기간이 너무 타이트한 나머지 배우들이 옷 갈아입을 시간이 없어 같은 옷을 입고 여러 장면을 찍었다고 한다. ‘누가 얘네 옷 좀 사줘라’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몇 가지 착장만을 돌려 입은 덕분에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는 등장인물들의 패션이 명확하게 기억에 남게 됐다.
특히 이들의 패션 스타일이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프레피룩, 아이비리그룩의 전형이라 그들의 스타일을 파악하는 건 꽤 좋은 패션 공부가 될 것 같았다. 마침 셔츠, 가디건 등을 통해 단정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입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과 공통분모도 있어 보여서 따라 해 보기에 탐이 났다. 아이비리그 룩을 정확히 파악하고 나에게 적용한다면 단순히 단정하고 성실해 보이는 스타일이었던 내가 루시엔처럼 매력적인 사람처럼 보일 수 있을 거란 요상한 기대감도 생겼다. 앨런에게 루시엔이 뮤즈였듯이, 이 글에선 이들을 나의 뮤즈로 삼아 옷을 따라 입어보려고 한다.
앞서 말했듯 등장인물들이 영화 내내 같은 착장을 주구장창 입고 등장했기 때문에 기억에 콕콕 남은 패션 아이템들이 있다. 특히 루시엔과 앨런의 아이템들은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성향을 슬쩍 드러내고 있어 이들의 옷을 분석하다 보면 연출자의 의도를 알아냈다는 묘한 쾌감이 든다.
루시엔과 앨런의 패션의 베이스랄까. 어떤 룩에서든 이 조합은 빠지지 않는다. 니트 조끼나 얇은 니트 안에 셔츠를 받쳐 입는 건 우리도 흔히 입는 조합이니 눈에 익은데, 앨런은 어느 정도 목이 올라온 두꺼워 보이는 꽈배기 반 목폴라 니트에도 셔츠를 레이어드해 좀 답답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딘가 삭막하고 차가운 영화의 분위기를 살리는 아이템이다. 루시엔은 버건디 머플러를, 앨런은 가을 색감의 체크 머플러를 착용한다. 특히 루시엔이 해당 머플러를 티 나게 걸치지 않고 니트 안에 셔츠와 함께 이너로 입었을 때 슬쩍 보이는 자줏빛이 매력적이다.
기성세대 문학에서 벗어나 파격적인 글을 쓰고자 하는 이들이지만 아이비리그 학생으로서의 단정함은 여전히 남아있는데, 이는 면바지의 힘이 크다. 너풀거리지도, 꼭 달라붙지도 않는 적당히 넉넉한 스트레이트 핏에 벨트까지 메니 더 단정해 보인다.
루시엔은 큼직한 무늬의 헤링본 코트를 입고 앨런은 확대를 해야만 티가 날 정도로 작은 무늬의 헤링본 자켓을 입는다. 헤링본 코트는 눈을 확 잡아끄는 루시엔의 핵심 패션 아이템으로, 이 코트를 따라 입고 싶다는 관객의 후기를 여럿 봤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여린 체형의 루시엔과 크다 못해 무거워 보이는 헤링본 코트의 조합이 이질적이라 더 뇌리에 남는다.
등장인물의 옷을 뒤지듯 탐색하던 중 루시엔은 주로 스트라이프 무늬가 들어간 옷을, 앨런은 체크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는다는 걸 깨달았다(심지어는 목을 매는 순간에도). 스트라이프는 루시엔의 직설적이고 예민한 성격을, 체크는 루시엔에 비해 차분하고 보수적인 면이 있는 앨런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듯했다. <킬 유어 달링>의 덕후가 치이기 딱 좋은 포인트다.
프레피룩은 최근 한국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는 스타일 중 하나다. 프레피룩을 아이비리그 대학교 학생들의 캐주얼한 패션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프레피룩과 아이비리그룩은 비슷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두 스타일의 본거지인 미국에서도 두 스타일의 차이를 까다롭게 따지는 편은 아닌 듯하다. 굳이 구분하자면 두 스타일은 특정 아이템의 차이라기보다 무드나 분위기의 차이가 있다. 프레피룩과 아이비리그룩의 차이가 궁금하다는 핑계로 20세기 중반 미국의 룩북을 구경해보자.
아이비리그룩은 아이비룩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정제되고 드레시한 느낌의 스타일이다. 갈색, 감색, 회색 등 차분한 색깔들이 주로 사용된다. 헤링본 자켓, 깔끔하게 조인 타이, 셔츠, 벨트를 찬 면바지에 로퍼가 아이비리그룩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원체 단정한 스타일이다 보니 교복과 정장의 사이 같은 느낌이다. 루시엔과 앨런의 스타일도 아이비리그룩이다. 아무리 일탈을 즐기는 루시엔이라도 패션에 있어서만큼은 자주색 머플러가 최대의 튀는 포인트일 뿐 프레피룩에 비하면 교수님만큼이나 단정하다.
프레피룩은 깔끔함을 잃지 않으면서 스포티한 게 핵심이다. 프레피룩과 아이비리그룩은 공통된 아이템이 많지만, 서로의 스타일에 절대 속하지 않는 아이템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프레피룩의 색색깔 바지다. 소녀시대 Gee를 연상시키는 빨강, 주황 바지들이 프레피룩에 속하고, 다른 아이템들도 대부분 아이비리그룩보다 채도가 높다. 브랜드로 따지면 '타미힐피거'나 '폴로 랄프로렌'이 찰떡인데, 특히 폴로의 시그니처 아이템 중 하나인 럭비티나, 성조기 혹은 곰돌이가 몸통만하게 박혀 있는 니트도 컬러풀하고 캐주얼한 프레피룩에 해당한다. 작년부터 흔히 보이는 아이템인 메리제인이나 바시티 자켓도 프레피룩의 유행과 흐름을 같이 한다.
미국 학생들의 대표적인 스타일, 그중에서도 프레피룩과 연관지어 바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드라마 ‘가십걸’이다. 고등학교가 배경이라 등장인물들이 모두 교복을 입고 등장하지만, 교복 위에 가디건, 바시티 자켓, 후드티를 걸쳐 입으면서 캐주얼한 프레피룩의 특징을 보인다.
루시엔과 앨런은 둘 다 아이비리그룩의 전형이지만 퍼스널 컬러 기준으로 따지면 각자 겨울 쿨톤, 가을 웜톤의 옷을 입는다. 서로 자연스럽게 어울리지만 분명히 차이가 있는 두 색감에서 캐릭터들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파워 봄 웜톤인 나지만, 용기 내어 루시엔과 앨런을 따라 입어보기로 했다.
: 남색 니트 조끼+파란 스트라이프 셔츠+와이드 팬츠+슬림한 스니커즈
루시엔의 색감과 스트라이프 무늬를 살리고자 했다. 스트라이프 간격이 좁은 셔츠라 사진으로는 티가 잘 안 나는 게 아쉽다. 어울리는 바지를 찾다 검은 슬랙스를 입었는데, 루시엔의 스트레이트 핏보다는 통이 넓어 느낌이 살짝 현대적으로 바뀌었다. 조금 더 요즘 스타일로 입고 싶다면 니트 조끼를 크롭이나 무늬가 있는 것으로 바꾸면 될 것 같다.
전체적인 색이나 아이템이 너무 무난해 보여서, 루시엔의 겨울 쿨톤을 더 살릴 겸 핫핑크나 버건디 아이템을 추가해도 좋겠다. 겨울이었다면 루시엔의 핵심 아이템 버건디 머플러를 둘렀을 거다. 나름 똑똑한 아이비리그 학생처럼 보이려고 손에 책도 들었다.
: 회색 브이넥 니트+체크가 들어간 셔츠+베이지 면바지
앨런의 차분하고 따뜻한 색감을 따라 입어 보았다. 카라 안쪽의 체크무늬가 소소한 포인트다. 이들의 스타일을 따라 입을 때 베이지 면바지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 무신사를 뒤져 새로 구매했다. 와이드핏 상품들의 홍수 속에서 정직한 핏의 바지를 찾기 어려웠던 걸 보면 이런 핏은 1940-50년대에는 모두가 입는 스타일이었지만 지금은 인기가 없는 것 같다. 앞의 코디와 마찬가지로 무난한 인상을 주는 데다 채도가 더 낮은 옷들을 입었더니 몸이 부해보이는 느낌도 있어 아쉽다.
루시엔과 앨런을 따라 입으면 옷을 잘 입게 될 것 같다는 도전은 실패다. 평소 깔끔한 스타일을 선호한다는 이유로 호기롭게 시작한 따라입기였는데, 아이비리그룩을 요즘 스타일로 해석해서 입은 게 아니라 최대한 영화 속 옷을 그대로 따라 입으려다보니 부담스러울 정도로 단정했다. 입고 나니 왠지 도서관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군더더기 없이 입으니 아이비리그에 진학할 만큼 공부를 잘할 수밖에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루시엔이 매력적인 이유는 옷을 잘 입어서가 아니라 그냥 루시엔에게 단정함을 뚫고 나오는 챠밍 포인트가 많아서였나보다.
니트와 셔츠 레이어드, 면바지 등 핵심 아이템은 살리되 디자인이 풍부한 옷을 고르거나, 넥타이나 자켓을 활용해 드레시한 분위기를 연출하면 아이비리그룩을 좀 더 예쁘게 입을 수 있을 것 같다. 혹은 아이비리그룩과 비슷한 프레피룩으로 입는다면 색감과 캐주얼함을 살릴 수 있으니 꾸며입기 좋을 테다.
비록 따라입기는 아쉬운 소감으로 끝났지만, 루시엔과 앨런을 통해 옛 미국만의 깔끔한 스타일을 구경해 보는 재미가 있었다. 영국에 킹스맨 스타일이 있다면, 미국에는 아이비리그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