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하레
<킬 유어 달링>에서 가장 흡인력 있던 부분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한 장면을 고를 수 있다. “Our duty is to break the wall”을 외치며 책들을 북북 찢어다 벽에 붙이는 장면과 함께 번갈아 나오는 재즈 클럽 장면이다. 빠르고 복잡한 재즈 템포가 쉬지 않고 몰아치며 리드미컬한 긴장감을 주다, 어느 순간 선율이 점점 느려지면서 시간이 멈춘다. 멈춰 버린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지나다니는 앨런과 루시엔의 모습에 집중하다 앨런이 눈을 뜨며 현실로 돌아오는 그 순간, 나 역시 영화밖에 있다가 한순간에 영화 안에서 눈을 떠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때 재즈 클럽에서 연주된 음악이 바로 캐서린 러셀의 ‘VG’s Blues’이다. (틀어 두고 글을 읽어 봐도 좋겠다)
재즈는 내 선망의 대상들 중에서도 다락방 같은 존재였다. 언제나 가장 높은 곳에 있지만 올라가기까지는 조금 마음을 먹어야 하는 그런 존재. 그 켜켜이 쌓인 역사는, 음악적 소양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다소 부담스럽게 다가오곤 했다. 마니아가 많은 장르라는 것 역시 한몫한다. 그러나 <킬 유어 달링>을 보면서, 더는 미뤄둘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다락방에 올라가 볼 때가 된 것이다.
평소 유튜브 음악 플레이리스트 채널을 통해 집에서 종종 재즈 음악을 틀어 두곤 하지만, 거기까지가 딱 나와 재즈의 거리였다. 이 글은 그 거리를 좁혀 보고자 하는 시작점이다. 얕은 지식과 감상을 늘어놓는 글이 될까 저어되지만, 여기 담긴 낯가림과 설렘을 읽었다면 모른척해 주길 바란다. 덧붙여, 주펄의 재즈를 보고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누군가에게도 흥미로운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재즈의 탄생과 역사, 역사적인 재즈 아티스트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다루기에는 지면과 식견이 부족하기에, 여기서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40년대의 재즈에 대해서만 살짝 찍어먹어 보기로 하자.
1930년대까지 미국 대중음악의 주류는 ‘스윙 재즈’였다. 이름 그대로 스윙 재즈는 넓은 댄스홀에서 ‘신나게 흔들어 재끼기’ 위한 음악이었고, 춤추기 좋은 리듬과 빅 밴드가 연주하는 웅장한 사운드가 특징이다. 따라서 스윙 재즈 공연을 위해서는 일정한 스윙 리듬과 대규모 악단이 연주하기 위한 악보가 존재했다. 그러나 1940년대, 세계대전 등의 여파로 스윙의 유행이 사그라들면서 ‘비밥(Bebob)’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잼 세션*을 통해 탄생한 비밥은 그 자체로 스윙 재즈에 대한 반동이었다. 스윙이 백인 대중의 상업적 춤곡이었다면, 비밥은 실력 있는 흑인 재즈 뮤지션들의 음악성과 예술성이 부각되는 장르였다. 음악의 중심이 리스너로부터 뮤지션으로 옮겨 오면서, 재즈는 춤추기 위한 음악에서 앉아서 감상하는 음악이 된 것이다.
‘비밥’이라는 명칭 역시 재즈 뮤지션들의 스캣*에서 비롯되어, 이름에서부터 뮤지션의 기량과 즉흥성이 극대화된 장르라는 점이 드러난다. (머릿속에서 주호민의 ‘샤빱두비두밥~’이 떠올랐다면, 바로 그것이 스캣이다.) 피아노와 드럼이 던지는 리듬에 베이스 코드가 얹어지고 관악기들이 격렬하게 기량을 뽐내는, ‘재즈’라고 하면 단박에 떠오르는 이미지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모던 재즈의 시작점으로, ‘재즈’의 이미지를 구축한 장르인 것이다.
* 잼 세션(Jam session): 재즈 클럽이 문을 닫은 후, 뮤지션들끼리 어울려 즉흥적으로 하는 합주나 경연.
* 블루 노트(Blue note): 음계에서 특정한 몇 음을 반음씩 내려 연주하는 기법.
* 스캣(Scat): 의미 없는 음절이나 의성어를 통해 가사 대신 붙여 넣는 즉흥적인 노랫말.
<킬 유어 달링>의 OST 앨범에는 ‘VG’s Blues’를 비롯하여, ‘Harlem on Parade’, ‘The Blue Room’ 등의 재즈가 수록되어 있다. (‘Harlem on Parade’ 같은 경우 1950년대 대표적인 스윙 재즈라는 점은 잠시 덮어두자.) 악보와 리듬의 규칙에서 벗어난 빠르고 자유로운 선율의 비밥은, 기존 문학의 틀을 깨고 유희와 즐거움을 지향하는 ‘뉴 비전(The New Vision)’과 결을 같이 한다. 유행과 관습을 거부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는 점에서 비밥 재즈와 비트 세대는 근본부터 닮아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하여 재즈는 영화 속에서 퇴폐적이면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배경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비밥 장르에서 가장 유명한 아티스트를 꼽으라면 대체로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를 이야기한다. 파커와 길레스피는 각각 색소폰과 트럼펫 연주자로, 소규모 잼 세션을 비롯하여 몇 번의 밴드 활동을 함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찰리 파커는 비밥 재즈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인물로, 그의 생애를 다룬 ‘버드(Bird)’라는 1988년작 영화도 존재한다.
더 그럴싸한 음악적 안목을 갖고 깊이 있는 설명을 덧붙이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에디터 역시 재즈를 갓 찍어먹기 시작한 사람으로서 여기서는 이들의 대표곡을 간단히 소개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관심이 더 생긴 독자라면, 더 많은 곡들과 함께 영화도 찾아 보길 추천한다.
Now’s The Time
I'm In The Mood For Love
No More Blues
Anthropology
사실 새로운 것을 도전할 때 가장 좋은 것은 일단 내던져지는 것이다. 고로 나 역시 재즈가 궁금하다면 가장 재즈의 밀도가 높은 곳에 스스로를 던져 보기로 했다. 인터넷 서핑을 통해, 라이브 공연이 있으면서 접근성이 높은 곳으로 정해 보았다. 이제 ‘즉흥 예술’의 맛을 고스란히 느껴 보자.
6호선 녹사평역에서 내려 경리단길을 오르다 보면 강렬한 빨간색 네온사인을 발견할 수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2층에 아담한 재즈 바 <부기우기>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을 택한 것은 순전히 ‘즉흥적’인 이유였는데, 마침 시간이 나는 날 공연하는 밴드가 비밥과 스윙을 연주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예약제로 운영하지만, 여석이 있다면 예약하지 않고 방문해도 공연을 즐길 수 있다. 다만 도착 순서에 따라 무대와 먼 쪽이나 바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공연을 즐기기에는 무대와 가까운 테이블을 추천하나 바 테이블에 앉으면 중간중간 휘파람을 불면서 흥겹게 칵테일을 만드는 바텐더 분을 만날 수 있다. 함께 간 에디터 먼지는 (당연하게도) 위스키를, 나는 마르가리타 한 잔을 시켰다.
이 날 공연한 밴드는 심성보 퀄텟(Quartet)으로, 재즈 기타, 베이스, 피아노, 드럼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간 8시 공연은 약 50분씩 1, 2부로 나누어져 있었고, 한 곡당 길이가 긴 편이어서 3-4곡 정도를 연주했다. 곡마다 각 세션들이 마치 실력을 과시하는 듯 빠르고 격렬하게 연주하는 솔로 파트가 있는데, 프런트맨(재즈 밴드에서도 유효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이 기본적으로 발로 박자를 맞추면서 눈짓이나 손짓으로 사인을 주는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는 2부에서 연주한 ‘Cantaloupe Island’라는 곡이 가장 좋았는데, 피아노와 베이스의 신들린 것만 같은 솔로 파트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조금 아쉬웠던 점은 곡 중간중간 베이스 연주자가 스캣을 넣는 듯했는데, 세션 소리에 묻혀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리 공지한 플레이리스트와 실제 연주한 곡들에도 차이가 있었고, 연주자 분들이 시간 분배에 실패하셨는지 다소 갑작스럽게 끝났는데 그 점이 오히려 날것의 즉흥성을 보여준 것 같아 재미있었다.
매 공연 후 인당 만 원 이상의 관람료를 권장하고 있는데, 그보다 더 지불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던 공연이었다. 재즈 바 <부기우기>는 작은 공간이지만 협소하기보다는 아늑하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찬바람이 불어오는 가을과 겨울 사이, 딱 지금 시점에 어울리는 곳이다. 조금 두툼해진 겉옷을 의자에 걸쳐 두고 맛있는 술과 함께 재즈 공연을 즐기다 보니 <킬 유어 달링>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부드러운 듯하면서 날카롭고, 느긋한 듯하면서 격렬한 비밥의 선율을 직접 듣다 보니 어떤 것과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재즈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더라도, 직접 접하고 나면 재즈가 함께하는 공간과 분위기를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 재즈가 멀게 느껴진다면, 20세기 언젠가의 음악에서 헤매지 말고 과감하게 현대로 넘어와 보자. 마니아들이면 몰라도, 일단 찍어 먹어보려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맛부터 찾아보자는 것이다. 비밥이니, 스윙이니 하는 장르 얘기는 차치하고, 아무래도 들어보고 좋으면 그만 아닌가!
선우정아, 웅산, 나윤선 등의 재즈 보컬리스트들을 비롯하여 국내에도 많은 재즈 아티스트들이 활동하고 있다. 선우정아의 대표곡 중 하나인 ‘고양이’ 역시 스윙 리듬과 스캣이 가미되어 있으며, 그의 곡들을 전체적으로 들어 보면 다양한 형태로 녹아 있는 재즈를 느낄 수 있다. 윤석철 트리오는 피아노-베이스-드럼의 미니멀한 세션으로 구성되어 재즈 피아노의 선율이 특히 돋보이는 밴드이다. 이들의 음악 중 하나인 ‘즐겁게, 음악’은 MBC 라디오 ‘푸른 밤’의 테마곡이기도 해서 익숙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특이한 재즈를 경험하고 싶다면 임인건과 루아의 ‘봐사주’라는 곡도 추천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주 방언으로 불린 노래이기 때문에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재즈 밴드 프렐류드는 소리꾼 전영랑, 이희문 등과 함께 작업하며 민요와 재즈의 합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외 아이유의 <Modern Times> 앨범에는 ‘누구나 비밀은 있다’와 ‘을의 연애’를 비롯한 재즈풍의 음악이 다수 수록되어 있으며, 종현은 솔로 앨범에서 ‘Happy Birthday’, ‘눈싸움’ 등 재즈 음악을 꾸준히 선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서 재즈는 생각보다 더 가까운 음악이며, 워낙 장르의 폭이 넓기 때문에 그 안에서 다채로운 느낌을 줄 수 있다. 포용성과 다양성, 재즈가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이다.
무엇보다도 재즈의 가장 큰 매력은 ‘무드 메이커’라는 데 있다. 물론 어떤 음악이든 감정을 건드리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재즈는 마치 벽지처럼 그 공간에 녹아든다. 1940년대의 자유에 대한 갈망과 퇴폐적인 사회 분위기를 영화 <킬 유어 달링> 속에 담아낸 것처럼, 재즈는 없었던 향수마저 불러일으켜 경험하지 못한 과거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러니까, 1940년대 재즈를 틀어 두고 노트북으로 글을 쓰다 보면 마치 1940년대에 타자기로 글을 쓰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어쩌면 재즈는 듣는다기보다는 스며드는 음악인지도 모르겠다.
재즈의 역사와 매력을 모두 담기에 턱없이 부족한 글이지만, 재즈와 당신의 사이를 조금은 가깝게 만들었다면 족하다. 재즈를 즐기기 위해 마니아가 될 필요는 없다! 일상에 가끔 재즈를 더한다면, 조금 더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코끝에 약간은 쌀쌀한 기운이 도는 지금, 가까운 재즈 바를 한 번 방문해 보는 것도 좋겠다. 더 가까이, 더 직접적으로 재즈를 접하게 된다면 분명히 당신도 재즈와 사랑에 빠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