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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버스앤러버스 Dec 20. 2021

한국 SF라는 세계

에디터 콜리

  연말을 맞으며 ‘역시 올해도 책 많이 읽기는 개뿔’이라는 후회와 함께 ‘그치만 내년엔 정말 다독하고 싶다!’며 다짐하고 있을 독자분들. 또다시 ‘독서하기’를 다짐하는 당신에게, 새해에 ‘한국 SF’를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어쩌면 이 새로운 세계와 깊은 사랑에 빠져 N 년 동안 반복된 후회를 끝낼 수 있을지 모른다. 2021년의 내가 딱 그랬기 때문이다. 책이라고는 1년에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던 내가 우연히 한국 SF를 읽고 흠뻑 빠져 꽤 여러 권 읽었고, 지난 몇 년간의 연말보다는 조금 덜 후회 중이다. ‘어떤 책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소설 좋아해요’보다 구체적인 독서 취향을 답하시는 분들이 항상 내 동경의 대상이었는데, 나도 드디어 ‘소설’ 앞에 붙일 수식어를 하나 찾게 된 것 같아 뿌듯하다. 이 글을 읽고 ‘나도 내년엔 좋아하는 소설에 한국 SF라는 디테일을 추가해볼까’라는 생각이 든다면 좋겠다.


  내가 한국 SF를 처음 읽게 된 계기는 이렇다. 내 취미 중 하나는 어슬렁대며 알라딘 중고서점 구경하기다. 올해 초 서점을 돌다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일명 ‘우빛속’)>이라는, 많이 들어 본 책을 발견했다. 여기저기서 들어는 봤지만 어떤 장르인지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몰랐고, 은은한 파스텔 톤의 표지에 제목이 홀로그램 박으로 쓰여 있는 디자인이 예뻐서 연애 소설로 착각한 채 구매했다. 집에 와서 한 번 읽어볼까 하고 펼치니 웬 스펙트럼, 공생, 우주 같은 단어들이 목차에 있었다. 책에 실린 첫 번째 소설을 읽고 나서야 이 책이 단편소설집이며 그것도 무려 SF소설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첫 번째 소설이 너무 재미있어서 단숨에 340쪽을 모두 읽어버렸고 지금 내 책장에는 우빛속을 쓰신 김초엽 작가님의 책만 7권이 꽂혀 있다.


표지에 홀렸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너무 좋아하는 건 주변에도 열심히 영업하고 싶은 법. 여기저기 김초엽 작가님의 왕팬이라고 외치고 다니고 우빛속 정말 재밌으니 꼭 읽어보라고 말했지만, 막상 주변에서 나의 추천을 통해 한국 SF의 세계에 입문한 사람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한국 SF가 뭔지 설명하지도 않고 그냥 무조건 읽으라고 다그치기만 해서 그런 것 같다.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흥미가 생기겠냔 말이다. 솔직히 SF, 특히 한국 SF 소설이 뭔지 설명하는 건 쉽지 않다. 김초엽 작가님마저도 늘 ‘무엇이 SF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으셨다고 하니 SF를 규정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알 수 있고, 한국 SF라고 범위를 좁혀 설명하는 건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그래도 나름 여러 편의 ‘한국 SF’를 읽고 팬이 된 사람으로서 내가 올 한 해 한국 SF를 읽고 느낀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짚어 보려고 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영업을 위해서 ‘한국 SF 취향 체크리스트’로 그 특징을 설명하겠다. 체크리스트를 보고 이거 난데? 하시는 분들께 특히 한국 SF를 추천한다.




한국 SF가 뭔가요?


1. 이런저런 상상을 좋아하거나 MBTI 두 번째가 N임/판타지 소설이나 영화 좋아함/과학에 관심이 있음

  첫 번째 특징은 한국 SF에만 해당한다기보다는 SF 자체에 대한 설명에 가깝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미스터리를 참 좋아했다. 어린 시절 집에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백과사전 같은 게 있었는데, 미스터리 부분만 골라 읽었던 기억이 난다. 딸이 텔레파시의 능력이 있어 어느 날 갑자기 무인도라는 키워드를 떠올리고 무인도에 납치된 아빠를 구했다거나, 죽은 자와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이야기 같은 거. 내 또래라면 초등학생 때 한 번쯤 봤을 어린이 과학동아에 음모론 특집 기사가 실린 적이 있는데, 그 기사만 계속 반복해 읽었던 기억도 난다. 어릴 때부터 그런 이야기들을 좋아해서인지 커서 덕후 수준으로 빠지진 않았어도 해리포터, 트와일라잇, 헝거게임 등 웬만큼 유명한 판타지 시리즈 영화는 모두 보았다.

 또 극성 N인 탓에 이런저런 상황을 가정해 상상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고 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편이다. MBTI 중 N의 특성을 인터넷에 검색해보다가 왜인지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의 줄거리를 나무위키에서 찾아 읽는 것으로 끝이 나는 스타일. 아무튼 이렇게 뻗어나가는 상상의 이야기가 실제라면 어떨까? 라는 질문의 답을 SF는 과학이라는 통로를 통해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준다고 볼 수 있다. 재미없을 수가!


2. 소설 내의 설정이 일상적인 내용을 기반으로 해도 괜찮음

  두 번째 특징은 한국 SF와, 우리에게 조금 더 익숙한 SF인 외국 SF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다. 외국 SF의 대표작으로는 스타워즈 시리즈, 아바타, 인터스텔라 등이 있는데 다 엄청난 규모의 세계관을 자랑하며 한 나라는 물론이고 지구를 벗어나 우주를 종횡무진하는 스토리가 많다. 가히 ‘블록버스터’라고 불릴 만하달까. 한국 SF는 어떨까. 외국 SF와 비슷하게 우주를 배경으로 외계인이 등장하기도 하고, 주인공이 사이보그거나, 인간이지만 텔레포트나 타임슬립의 능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확실히 스타워즈에서 느꼈던 블록버스터의 느낌은 전혀 받을 수 없다.


  우주가 배경이고, 외계인이 주인공이고, 등장인물이 타임슬립을 하는데 어떻게 블록버스터가 아니냐고. 소재가 그럴지도 몰라도 한국 SF는 등장인물들이 겪는 일상적인 이야기에 더 관심을 둔다. 마치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많은 사람이 생사를 오가는 긴박한 병원을 배경으로 두고 초절정 능력 있는 의사들을 주인공으로 다루지만 그들의 평범한 하루하루를 그려내는 데 집중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일례로 우빛속 소설집의 제목으로 쓰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배경은 광속 우주여행이 가능해진 미래 사회지만 정작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다뤄지는 것은 우주 정거장에 앉아있는 한 할머니와 그 정거장을 철거하려는 위성 관리 업체 직원의 대화가 다다.

  앞서 잠시 언급한 SF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초엽 작가님은 글에 ‘과학을 탐구하려는 태도’가 담겨 있으면 SF라고 생각하신다고 하셨다. 어마어마하게 스케일이 큰 과학 기술이 소재로 다루지 않아도, 혹은 아예 가상의 과학 기술을 등장시켜 이것을 과학이라고 부를지조차 애매한 내용이더라도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과학과 닿아 있는 부분이 있고 무언가에 대해 탐색하게 한다면, 그건 SF이며 나름의 가치를 가진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3.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가 있었으면 좋겠음/사회적 소수자에 관심이 있음

  앞서 인용한 이야기를 포함해, 이 글에 인용한 김초엽 작가님의 말씀은 모두 내가 직접 김초엽 작가님의 북 콘서트에 참여하고 들은 이야기다. 그 북 콘서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말씀 중 하나는 SF가 상상력을 기반으로 진행돼 현실에서는 던지기 어려운, 유의미한 질문을 가능케 하는 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다른 작가님들도 같은 생각을 하시는 듯 한국 SF에는 사회적 소수자가 많이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그들이 그려지는 모습은 다양성을 존중하겠다며 마블이 아시안 배우를 히어로를 캐스팅하는 것보다 더 섬세하고 풍부한 느낌이다.

  정소연 작가님의 <미정의 상자>는 팬데믹 사회를 배경으로, 시간을 거슬러 가는 능력이 생긴 주인공 미정이 사랑하는 애인 유경과 함께한 추억을 돌아보는 내용이다. 미정과 유경은 모두 여성이다. 현실에서라면 좀 더 두드러졌을 그들의 정체성이, SF 속에서는 전염병으로 황폐해진 서울의 모습과 과거로 거슬러 가는 미정의 능력이라는 소재에 섞여 그저 평범하고 따뜻한 사랑 이야기 하나가 된다. 사회적 소수자를 다룬다고 해서 한국 SF 속에서 그들이 과학 기술에 의해 모두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이전보다 더욱 소외당하는 모습도 흔한 소재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과학적 상상력을 통해 현실과는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에 함께하고 싶다면, 또는 소외당하던 이들이 세상을 바꾸는 여정에 동참하고 싶다면 한국 SF를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4. 초단편 혹은 단편 소설을 선호함/흥미의 대상이 금방 바뀜

  다른 분야의 소설과는 다르게, 한국 SF는 시중에서 하나의 장편보다 단편 소설을 묶은 소설집을 찾기가 더 쉽다. 때문에 외국의 판타지 시리즈 소설에 익숙한 분이라면 짧게 짧게 끝나는 한국 SF들이 무척 싱겁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책에 대해 나름의 선호를 꼽자면 추리소설을 고르던 사람으로서 생각하길 추리소설은 사건 발생 단계, 밑밥 뿌리는 단계, 의심의 방향이 얽히고설키며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단계, 퍼즐이 맞춰지는 단계 등 추리소설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기승전결이 있기 때문에 짧게 쓰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 단편 소설인 한국 SF가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곧 단편 소설만이 가진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SF인 만큼 소설마다 새로운 과학적 소재가 등장하는데, 짧은 소설일수록 각각의 소재가 가진 톡톡 튀는 매력이 오히려 부각된다고 느꼈다. 원체 소재들이 흥미롭다 보니 하나의 소재로 길게 끄는 것보다는 얼른 다음 소설의 다른 소재도 만나보고 싶달까. 금사빠라서 쉽게 사랑에 빠졌다가 다시 빠져나오는 성향도 한국 SF 단편들을 즐기는 데 한몫한 것 같다.

  심지어 한국 SF에는 단편보다 짧은 초단편이라는 단위도 존재한다. 처음 접한 초단편 소설은 <오늘의 SF>라는 한국 SF 전문 잡지에 실린 김현재 작가님의 ‘평원으로’였는데, 초단편 소설이 너무 신기한 나머지 읽는 시간을 재 보았다. 아마 소설 하나를 읽는데 7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10분도 안 되는 시간에 소설 하나를 뚝딱 읽을 수 있다니, 적은 시간 내에 여러 소설을 읽었다는 뿌듯함과 효율성을 즐기고 싶은 분께도 한국 SF의 (초)단편들을 권한다.


5. 부산행, 보건교사 안은영, 승리호를 재밌게 봤음

  여전히 한국 SF를 내가 좋아할지 확신이 안 선다면 좀비 영화 <부산행>이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을 본 기억을 떠올려보자. 공유의 마지막 모습에 눈물을 흘렸는지는 차치하고, 열차 안을 달려오는 좀비의 모습이 무서우면서도 자꾸 눈길이 갔다면. ‘보~건 보건교사다 나는 안은영 나는 안은영’ 가사를 반복하는 보건교사 안은영 OST를 들으며 묘한 희열과 긴장감을 느꼈다면. <승리호>를 보고 ‘그래 외국인들만 우주 진출하냐 한국인들도 우주에서 좀 살아보자’ 싶었다면. 내년엔 정말 한국 SF를 읽어보자.




소설로 만나는 <보건교사 안은영> 


  앞서 언급한 <보건교사 안은영>은 ‘젤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안은영이 학교에서 겪는 일을 다룬 작품이다. 젤리는 인간의 욕망이 물질적 형태로 표현된 것으로, 안은영은 장난감 무지개 칼과 비비탄 총을 들고 다니며 젤리가 일으키는 사건사고를 처리한다. 사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은 한국 SF 소설 원작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를 재밌게 보신 분이라면 한국 SF 소설의 첫 시도로 원작 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나도 넷플릭스 시리즈를 먼저 봤는데 영상에 만족하고 나자 이 만족도를 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원작 소설을 찾아 읽는 것을 망설였다. 그러나 막상 읽어보니 영상에 비해 디테일이 살아있어 원작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시각적인 측면에서는 드라마가 가지는 장점들이 많지만, 이 글의 목적은 넷플릭스 드라마를 즐긴 분들이 ‘보건교사 안은영’의 원작 소설을 찾아 읽으며 한국 SF 소설의 세계로 흡수되는 것이기 때문에 드라마보다 원작 소설에서 좋았던 부분을 어필해 보겠다. 


1. 1화, 2화: 승권의 목 뒤에 박힌 것의 정체

우: 실제 캡처 속 괴물은 너무 징그럽다는 에디터 먼지의 요청으로 그림으로 대체합니다

  드라마에서 승권은 짝사랑하는 친구 아라(소설에서는 이름도 혜현으로 다르다)가 고백받는 것을 막기 위해 뛰어가던 중 목뒤에 무언가가 박혀 안은영을 찾아간다. 은영이 승권의 목뒤에서 뽑아낸 것은 마이구미 복숭아 맛이 생각나는 빨간 하트모양 젤리다. 그리고 목뒤에 박힌 젤리의 독기에 홀린 듯 옥상으로 올라간 학생들이 떨어지길 기다려 받아먹으려는 징그러운 괴물이 등장한다.

  소설에서 은영이 승권의 목에서 발견한 건 사랑스러운 하트 젤리가 아니라 ‘어떤 알 수 없는 동물의 손톱, 비늘, 뼈 중 하나’로 추정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괴물의 모습은 ‘물고기인 것도 같고 개구리인 것도 같고 뱀인 것 같기도 한 머리’로 표현된다. 승권의 목뒤에 박혔던 것은 그것의 비늘이었다.

  괴물이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박는 것은 소설에 따르면 ‘공격’으로, 공격에 쓰이는 수단으로서 빨간 하트 젤리는 너무 사랑스러워 보인다. 물고기인지 뱀인지 모르겠는 것의 비늘이 무기, 특히 독기를 퍼뜨리기 위한 독침으로는 더 적합해 보이지 않나. 작은 포인트지만 드라마를 봤을 때는 하트 젤리를 박는 것부터가 괴물의 공격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소설을 읽고서야 괴물이 학생들을 먹고 싶어서 처음부터 꼬여낸 거였구나,를 깨닫고 그 디테일에 감탄했다.


2. 4화: 백혜민이 먹는 옴

  드라마에서 옴잡이 전학생 백혜민이 먹는 옴은 오른쪽 사진처럼 투명 다리 6개와 눈까지 달린 주황색 반투명 딱정벌레 같이 생겼다. 이 옴은 ‘재수 옴 붙었다’라고 할 때 그 옴으로, 소설에서는 투명하게 아른거리는 아지랑이 같은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안은영조차 집중해야만 옴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드라마는 이미지로 표현해야 하니 투명의 아지랑이로 옴을 표현하긴 부족한 부분이 있었을 테다. 하지만 옴이 붙었을 때 사람마다 겪는 불운의 모습은 모두 다르다. 옴이 피부성 질환을 일으켜 학생들이 가려워하기도 하고, 소설에는 우체국 아저씨 오토바이에 치인 남학생도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특정 형태를 가진 모습보다는 소설의 투명한 느낌이 옴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벌레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반투명 딱정벌레가 나에게 붙는다는 게 훨씬 ‘재수 옴 붙은’ 일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드라마의 옴은 귀여운 구석도 있어 불운을 가져다주는 존재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3. 전체: 안전한 행복과 일광소독


  드라마에서는 ‘안전한 행복’과 ‘일광소독’이라는 사이비 단체가 등장한다. 기운이 센 숨구멍 자리에 지어진 학교를 차지하기 위해 세력다툼을 벌이는 두 단체인데, 학교의 창립자이자 홍인표의 할아버지는 일광소독 소속으로 학교의 기운을 더욱 크게 쓰기 위해 ‘웃으면 복이 온다’를 교훈으로 정하고 학생들이 정기적으로 힘주어 크게 웃는 시간(정말 기괴하다)도 만들었다.

  드라마 속에서는 두 단체가 에피소드마다 꽤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소설에서는 안전한 행복은 등장하지도 않고 일광소독도 한 번쯤 언급되는 정도다. 드라마는 안은영이 학교에서 겪은 에피소드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굵직한 흐름이 있어야 하니 도입한 장치 같다. 꺼림칙한 두 단체의 계속되는 등장이 그런 장치로서는 좋았을지 모르겠지만, 학교에서의 젤리를 둘러싼 여러 일들이 결국 두 단체를 악의 배후로 두고 벌어진 커다란 음모의 일부로 느껴지는 감이 있다. 소설에서는 그 사건들이 안은영이 보건교사로 일하며 매번 맞닥뜨리는 하루하루의 일처럼 느껴져서, 사건 발생 시 그 배후를 헤아리기보다 안은영의 활약에 더 집중할 수 있어 매력적이다.




한국 SF를 읽어보고 싶어졌다면 


  보건교사 안은영 소설 소개까지 읽고 정말 한국 SF에 관심이 생긴 예비 입문자를 위해 간단히 한국 SF 단편들을 소개해 드리려고 한다. 단편들을 통해 한국 SF의 맛을 본 뒤 중편, 장편으로 넘어갈 것을 추천한다. 앞서 설명한 한국 SF의 특징을 녹여, 카테고리별로 골라 읽을 수 있게 구성했다. 아,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린다.  


1. 초단편 소설로 10분도 안 되는 시간에 작품 하나를 끝내고 싶다면? 

<친절한 존> - 김이환 작가님

    여러모로 입문작으로 추천하는 책이다. 짧기도 짧고, SF치고 파격적인 소재라기보다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를 그리는, 비교적 친숙한 소재로 쓰인 글이기 때문에 부담이 없다. 인간이 자신의 모든 시간을 개인 인공지능과 함께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주인공 선동이 인간이 인공지능의 애완동물이 되고 있다며 인공지능을 반대하는 시위대와 맞닥뜨리며 겪는 혼란을 담고 있다. 짧은 길이를 가진 소설이지만, 선동이 인공지능 존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통해 인간이 인공지능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에 대해 충분한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2. 이것이 상상력이다! 파격적인 소재의 힘이 궁금하다면?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 배명훈 작가님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비말의 전파를 막기 위해 ‘차카타파’와 같은 거센소리의 발음이 모두 사라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전체 줄거리 흐름은 평범했는데, 거센소리가 사라졌다는 설정이 참신했다. 읽다 보면 해당 소재가 소설 속에 어떤 방식으로 반영되었는지를 깨닫는 순간이 있는데, 그 순간 느낀 소름이 잊히질 않는다. 읽자마자 적었던 리뷰에 따르면 ‘한국 SF는 소재가 다 하는구나’를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그러나 작가님이 창의력 넘침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비교적 유명하지 않은 건 이 특이함에 호불호가 갈려서일 것 같으니,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기 바란다.


3. 외계인이 등장하지만, 블록버스터는 아니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싶다면?

<스펙트럼> - 김초엽 작가님

  주인공 희진이 외계 행성에 불시착해 외계인 사회에 속하게 되며 겪는 일을 담은 작품이다. 외계인들 사이에서 그들의 ‘외계인’이 되어버린 주인공이 외계 지성 생명체의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은 얼핏 듣기에 스펙터클해 보인다. 그러나 인간보다 훨씬 넓은 색채 스펙트럼을 가진 외계인 파트너 ‘루이’와의 교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어, 블록버스터보다는 담담하게 적힌 주인공의 일기를 엿보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야기의 끝에, 블록버스터의 통쾌함보다는 루이에 대한 따뜻한 애정만 남는다. <스펙트럼>은 김초엽 작가님 소설 중 첫 번째 영화화를 앞둔 작품으로, 소설을 즐겁게 읽은 후 영화화를 기다리는 것도 좋겠다.


4. 과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던져진 사회적 메시지를 느끼고 싶다면?

<캐빈 방정식> - 김초엽 작가님

  화자의 언니 현화는 인간의 시간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지면 시간이 왜곡된 것으로 느낀다는 ‘국지적 시간 거품’의 이론적 가능성을 입증해낸 물리학자다. 현실 세계에서는 큰 교통사고를 당해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인식하게 된 현화를 지적 장애인이라고 표현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현화는 국지적 시간 거품이라는 가상의 과학 이론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장애인이 아니라 평생의 연구 주제였던 시간 거품을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실제로 감각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된다. 현화가 시간 거품의 감각자로 거듭나는 벅찬 과정은 소설이 끝난 후에도 마음속에 울림으로 남을 것이다.



한국 SF라는 세계에 빠질 당신 

 

  올 한 해 한국 SF에 빠지면서 나에게는 몇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우선 인트로에서 언급했듯이 최근 몇 년 중 가장 책을 많이 읽어 올해는 ‘독서하기’에 실패했다는 후회가 없다. 중학생이었을 때 도서실에 있는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연달아 읽은 이후 이렇게 책의 한 분야에 빠진 건 처음인데, 무엇보다 책을 열심히 읽는 나에게 심취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대견한 나 자신!


  둘째는 책을 읽고 리뷰로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다. 애써 기록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원체 한국 SF가 재밌다 보니 읽고 나면 이 황홀함을 잊기 전에 얼른 기록해 두고 싶었다. 중학생 시절의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읽기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겨우 몇 장 기억 나는 게 다인데, 올해는 이렇게 책 리뷰를 쓴 덕분에 대부분의 한국 SF의 내용이 머릿속에 남아있고 까먹은 몇 가지 작품도 리뷰를 찾아 읽으면 다시 그때의 감정이 그대로 살아난다. 이 습관이 생기고 나니 SF가 아닌 다른 분야의 책을 읽어도 간단한 기록은 남기게 됐고, 그 리뷰들은 연말인 지금 돌아보기를 올해 스스로에게 남긴 최고의 선물이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나의 상상의 세계가 넓어졌다. 그냥 지나갈 법한 일상의 사소한 소재거리도 이 소재로 이야기를 만든다면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지 떠올리곤 한다. 덧붙여 그냥 SF가 아닌 한국 SF 소설이 그 생각의 기반이기에, 상상 속 이야기에 세상의 따뜻한 모습을 어떻게 녹여낼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내 책장을 채우고 있는 한국 SF

  글 내내 한국 SF 소설의 전문가인 것처럼 영업했지만 사실 나는 김초엽 작가님의 광팬일 뿐, 아직 많은 작가님과 소설을 접해보지 못했다. 소개한 다른 작가님들의 단편들도 모두 김초엽 작가님의 글이 실린 단편집에 수록된 다른 소설들이다. ‘근데 이렇게 아는 척한 거야?!’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으나, ‘한국 SF의 아주 일부분만 접했으면서 이만큼이나 애정을 가질 수 있다니 한국 SF 진짜 매력 있나 보다’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다.


  억지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재미를 느끼며 책을 많이 읽고 싶다면, 그 재미와 메시지에 빠진 채 함께 성장해나가는 나를 마주하고 싶다면, 이 멋진 책들을 읽은 내가 만들어 갈 새로운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제 한국 SF라는 세계에 빠져보자.





출처: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메인 예고편 https://youtu.be/-YSrn9rNDDw

<인터스텔라> 메인 예고편 https://youtu.be/d2VN6NNa9BE

<보건교사 안은영> 공식 예고편 https://youtu.be/Nc2t2oCMkxU

<보건교사 안은영> 공식 티저 예고편 https://youtu.be/wdKX_rhiA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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