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콜리
“윤희에게. 잘 지내니?”로 시작해 “추신. 나도 네 꿈을 꿔.”로 끝나는 쥰과 윤희의 편지에 눈물을 흘린 관객이 꽤 많았을 거다. 20년 간 보지 못했던 쥰과 윤희의 만남은 마사코에 의해 쥰이 편지가 부쳐지면서 시작된다. 서로를 생각하는 두 사람의 마음은 전화도, 문자도 아닌 편지로 전해져서 더 애틋하다. 아무리 고민을 많이 하고 건 전화였다고 해도 쥰이 윤희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을 울리진 못했을 거다.
윤희와 쥰이 주고받은 편지는 영화의 포스터로 쓰일 정도로 이 영화에서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편지의 힘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우리를 감성에 젖게 할까. 취미를 물었을 때 ‘편지 쓰기’라고 답하는 사람인 나도 편지의 매력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편지의 어떤 점이 별로야(특히 편지 쓰기의 어떤 점이 별로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만나도 편지의 어떤 점이 좋다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다들 마음 한 켠에 손글씨로 쓰인 편지의 따뜻함을 품고는 사는 것 같다. 마음을 전하기 좋은 겨울, 이 글을 읽고 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 한 통을 써 보자.
서대문구 연희동에는 편지에 진심인 사람이 있다. 연희동에 있는 편지 가게 글월의 이야기다. 먼 훗날 편지를 주제로 한 카페를 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이미 편지만을 주제로 가게를 연 사람이 있었다! 조그만 공간이지만 오로지 편지만을 위한 생각으로 가득 찬 곳이다. 한쪽은 만년필, 편지 보관함 등 편지를 둘러싼 물품들이, 한쪽은 글월에서 직접 디자인하고 만든 편지지들이, 한쪽은 글월을 통해 모르는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펜팔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과 이따금 울리는 풍경, 사각사각 편지지를 포장하시는 사장님 뿐인 가게라 편지를 쓰는 사람이 집중하기 좋은 환경이다.
글월에서 디자인한 편지지를 구경하는 건 감성을 충전시킨다. 편지지 하나하나 의미를 가득 담은 채 디자인되어서, 이 편지지에 편지를 쓴다면 편지지에 담긴 의미도 함께 보내는 기분일 것 같다. 심지어 대부분의 편지지에는 책에서 발췌한듯한 편지가 샘플로 적혀 있는데, 다른 사람의 편지를 훔쳐 읽는 기분이 들어 조심스럽고 간질간질해진다.
여러 편지지 중 특히 마음에 든 것은 ‘음표를 그리는 오선지에 편지와 일기를 쓰던 친구의 유년 시절을 담은 편지지’라는 난새 편지지와 ‘신선하고 달콤하며 갓 구운 사과 파이에서 나는 기분 좋은 향’이 난다는 붉은 알렉산더 사과 그림이 있는 편지지였다. 나한테 사과만큼 커다란 존재인 사람에게 편지를 보낼 때 쓰고 싶어서 알렉산더 사과 편지지 세트를 구매했다.
펜팔은 글월의 시그니처 서비스인데, ‘모르는 이와 편지를 주고받는 펜팔’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카운터에서 편지지와 봉투를 원하는 만큼 받아다 이 글을 읽을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편지를 쓴 뒤, 편지 봉투 바깥의 여러 관형사 중 나에게 해당하는 것들에 동그라미를 쳐서 펜팔장에 넣어두면 누군가 그 동그라미들을 보고 내 편지를 가져가는 형식이다. 무척 재미있을 것 같았지만, 나는 받는 사람을 특정할 때 편지의 매력이 더욱 커진다고 생각해 이번에 경험하지는 않았다. 모르는 이와의 유대가 필요한 날, 다시 방문해 펜팔을 적어 볼 생각이다.
편지를 쓰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있어도 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 거다. 만약 편지를 받는 걸 싫어한다면 아마 그건 나도 답장을 보내야 할 것 같은 부담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사실은 편지 쓰기를 싫어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거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편지를 쓰는 것의 매력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시간도 많이 들고 감정도 많이 소모되지만, 편지 쓰기의 분명한 장점들이 있다.
ㄱ. 편지지를 모으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편지를 받는 사람은 상대가 시간을 들여 손편지를 써줬다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받지만, ‘이거 우리집에도 있는데’ 생각이 드는 다이소 카드에 쓴 것과 ‘이런 편지지는 대체 어디서 구했지’ 싶은 특별한 편지지에 쓰인 편지는 왠지 느낌이 다르다. 공들여 고른 티가 나는 편지지에 쓰였다면 왠지 이 편지에 들인 정성이 더 커 보인다는 거다. 상대에게 더 큰 감동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만이 아니라, 편지지를 고르는 과정은 그 자체로 꽤나 재미나다. 소품샵에 가서 편지지를 구경하다 보면 세상 어딘가에 예쁘고 고급진 편지지를 만드는 것에 진심인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다. 보통은 생각보다 비싼 가격이라 망설이게 되지만, 결국 구매해 훗날 소중한 사람을 위해 쓰겠노라고 서랍 속에 고이 넣어두고 나면 왠지 마음이 풍족해진다.
편지지 구경에 적합한 소품샵으로 추천하는 곳은 ‘포인트 오브 뷰’다. 성수와 더현대서울에 있는 문구 소품샵으로, 세계 각지에서 온 감성적인 문구류가 가득하다. 각종 문구류를 파는 소품샵이다 보니 편지지뿐만 아니라 펜, 편지 봉투, 우표 스티커 등 편지와 관련된 제품들을 구하기 쉬워 추천한다.
ㄴ. 주고받는 글을 쓰는 건 특별하다.
편지를 읽을 누군가가 존재하는 글이다. 살면서 적는 수많은 글의 종류 중 상대를, 특히 한 명의 상대를 상정하고 적는 글은 아주 드물다. 아무리 속 얘기를 모두 털어놓는다고 해도 나 혼자 쓰고 읽는 일기장과 편지는 너무 다르다. 일기는 듣는 상대도 없고 돌아오는 답도 없지만, 편지는 이 글을 읽을 누군가가 있으니 나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닌 나와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에 더해, 답장이 오지 않는 편지거나 마사코가 부치기 전 쥰의 편지처럼 부쳐지지 않은 편지가 아니라면 편지는 둘이 함께 적는 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주고받은 서간문을 다듬어 출판한 책은 일반 에세이와는 무척 다르니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책을 읽다 보면 두 사람의 사적인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것 같아 왠지 은밀하고 흥미진진한 기분이 든다. 듣는 상대마다 내 말투가 달라지듯이 읽는 상대에 따라 이야기의 소재나 문체가 달라지다 보니, 작가님이 평소 혼자 쓰시는 글과 서간문에서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겠다. 내가 읽어본 서간문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는 이슬아, 남궁인 작가가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책으로, 편하게 털어놓은 둘만의 이야기를 나중에 공개하게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서간문을 출판한 작정으로 쓰인 글이라는 점에서 백 프로의 진솔함이 담겼을지 의심이 된다는 것 말고는 무척 재미있게 읽힌다. 매우 다른 두 작가가 투닥투닥 서로를 디스하고 동시에 존경하는 내용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좋은 서간문을 찾는다면 추천한다.
위의 글을 읽고 편지를 써 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어떻게 편지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을 위한 팁이다. 편지 잘 쓰는 법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일기장만큼이나 정해진 형식이 없는 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평가받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애초에 ‘잘’ 쓸 필요가 없기도 하다. 하지만 편지는 쓰고 싶지만 쓰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독자를 위해, 글월에서 구매한 ‘편지 잘 쓰는 법: 손으로 마음을 전하는 일에 관하여’ 책을 참고해 몇 가지 팁을 드리고자 한다. 참고로 이 책은 글월의 문주희 사장님께서 쓰신 책으로, 편지에 정말 진심이시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ㄱ. 편지의 첫 시작을 어떻게 할지 모르겠는 사람이라면
* 함께 보낸 시간을 소재로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 나? 같은 조로 배정되어서, 서로 어색하게 자기 소개했었잖아. 그랬던 우리가 이제 졸업할 때가 다 되었네.”
편지가 가장 많이 쓰이는 때는 함께 한 일이 마무리되어 갈 때, 한 해가 끝나갈 때 등이다. 끝자락에서 쓰이는 경우가 많은 만큼 편지에서는 자꾸만 함께 한 추억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보통 우리의 인연이 처음 시작된 일에 대해 적는 편이다. 그러고 나면 서로의 곁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왔는지, 그 시간들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에 대해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 위트 있게
“네가 하도 답장이 없어서, 더 다정한 내가 한 번 더 보낸다!”
가볍게 상대를 재촉하는 내용이나 자신만의 유머로 편지의 앞머리를 채운다면, 받는 사람이 더 즐겁게 편지를 읽기 시작할 거다. 나는 시작 부분에 친구의 이름으로 맥락 없는 삼행시를 지어 쓴 적이 있는데, 받은 친구가 무척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ㄴ. 칸을 채우기 어려워하는 사람이라면
편지 쓰기를 어렵게 느끼는 사람의 대부분이 이 이유 때문일 거다. 편지를 쓰게 된 이유를 적고 나면 도무지 할 말이 없다고 한다. 예를 들면 친구의 생일 카드를 적을 때 ‘안녕 누구야, 생일 정말 축하해!’를 적고 나면 남은 여백을 대체 뭘로 채우냐는 거다.
* 장소와 때
“강릉의 바다 뷰 카페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편지를 쓰고 있어. 운이 좋게 창가 쪽 자리에 앉았더니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마침 저녁 때라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도 볼 수 있네.”
내가 가장 많이 주는 팁이다. 나를 둘러싼 주변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쉽게 칸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이다. 여행을 떠나 특별한 장소에서 편지를 쓰고 있다면 더더욱 좋다. 편지를 받은 사람에게는 먼 곳에서 날 생각해준다는 것이 특별하게 느껴져 좋고, 편지를 적는 나도 나중에 이 편지를 보았을 때 당시를 기억할 수 있어 좋다(보내고 나면 나는 그 편지를 다시 못 보는 거 아니냐고? 편지는 쓰는 나에게도 소중한 글이기 때문에 다 쓴 편지를 사진으로 찍어두면 된다).
* 상대의 모습
“너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열심히 시험공부 중일 것 같다. 너는 감성적인 사람이니까 내 편지 받고 우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저번에 같이 영화 봤을 때에도 눈물 엄청 흘렸잖아.”
편지는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상대, 우리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더 매력적인 글이라고 했다. 내 얘기만 늘어놓을 게 아니라 상대를 편지에 동참시키면 더 좋다. 쉽게는 예시처럼 이 편지를 받고 좋아할 상대의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우리가 함께 했던 추억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좋다. 상대에 대해 잘 알수록, 상대와 함께 한 시간이 많을수록 이 부분을 더 애틋하게 쓸 수 있을 거다.
* 추신
“추신. 다음 주부터 추워진대. 옷 따뜻하게 챙겨 입어.”
편지에도 맥락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본론에 포함시키지 못한 문장이 있을 수 있다. 이때 추신에 그런 말들을 쏟아내면 된다. 다른 맥락의 이야기여도 되고, 짧은 한 문장의 이야기여도 되니 부담이 적다. 추신의 추신, 추추신 모두 가능하다. <윤희에게>의 명대사 ‘나도 네 꿈을 꿔.’도 바로 이 추신이었다.
* 그림과 스티커
최선을 다해 편지를 채우려 했지만 아직도 편지지에 여백이 많이 남았다면 그림을 그리거나 스티커를 붙이면 된다. 내가 좋아하는 상대의 모습, 연말이라면 크리스마스 트리, 새해라면 그 해의 동물을 그릴 수 있다. 누가 봐도 글로 편지지를 다 채울 자신이 없어서 그림으로 때운 거 아니냐고 할지라도 상관없다. 때로는 그런 이유로 그려진 그림들이 본론보다도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기억에 더 남는다.
편지를 쓸 때의 매력부터 편지를 잘 쓰는 기술적인 방식까지 알아봤다. 편지 한 통 써야 하는데, 라고 속으로만 생각해왔던 사람이 오랜만에 편지지를 꺼내 쓰게 될 만큼 충분한 설득이 됐으리라고 본다.
그러니 이번 겨울에는 편지를 써 보자. 괜히 들뜨는 연말, 새롭게 시작하는 새해를 핑계로 솔직한 마음을 전하기에 딱이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있었던 사람에게도 좋고, 새롭게 관계를 시작하고 싶은 사람에게 써도 좋다. 누구에게 쓰는 편지든, 윤희와 쥰처럼 좋은 인연을 이어 줄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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