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콜리
오래도록 사랑 받는 어떤 대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아이콘이 되기 마련이다. 지브리 역시, 말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지브리스러움’이 명확한 편이다. 그리고 이런 지브리다움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건 지브리만의 작화 스타일이다. 어딘가 몽글몽글한 느낌을 주는 캐릭터, 눈이 편안해지는 풍경의 2D 애니메이션을 보면 나도 모르게 ‘어, 이거 지브리 느낌인데?’ 하고 외치게 되니까 말이다.
스튜디오 지브리가 2D 애니메이션만을 내놓은 건 아니다. 2021년, 지브리의 대표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아들이 제작한 <아야와 마녀>는 무려 Full 3D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다. 그런데 2023년 현재 해당 작품을 아는 이가 별로 없을 정도로 <아야와 마녀>는 인기를 끌지 못했다. 스토리에 반전이 될 만한 큰 사건이 없어서일까, 속편을 염두에 두고 애매하게 풀린 복선 때문일까? 아마 이 작품이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던 건 3D로 제작되는 과정에서 작화의 지브리스러움, 쉽게 말해 지브리 그림체가 많이 사라졌기 때문일 거다. 다른 지브리 애니메이션들의 네이버 영화의 평점을 살펴보았을 때 영상미가 차지하는 비율이 대부분 30%대인 것에 비해 <아야와 마녀>는 24%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팬들이 작화 비주얼에 실망했을 거라는 추측이 영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스튜디오 지브리 영화에 절대 빠질 수 없는, 지브리 그림체의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매력 속으로 빠져보자.
지브리의 시그니처 작화 스타일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 나는 영화들이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영화들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작들이다. 흥행이 먼저인지 그림체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꽤나 연관이 깊다는 건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 지브리의 그림체가 유달리 눈에 띄는 캐릭터들을 관찰하면서 작화 스타일을 파악해보겠다.
먼저 스케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지브리 캐릭터 중에서도 포뇨(벼랑 위의 포뇨), 센(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메이(이웃집 토토로)을 분석했다. 왜 이 셋이냐고? 제일 귀여운 애들이어서다.
동그란 얼굴
찹쌀떡이 사람이 된다면 이런 얼굴형을 가졌을까. 화면 속으로 손을 넣어 볼살을 쭈욱 잡아 당기고 싶은 욕구가 생길 만큼 동글납작한 얼굴을 가졌다.
단순해서 더 귀여운 눈
원래 사람들은 초롱초롱한 눈을 볼 때 예쁘고 귀엽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2D 캐릭터의 눈이라 함은 본래 순정만화의 별빛 촤르르한 그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데 이게 웬걸, 지브리의 주인공들은 동그란 흰자 위에 동그란 검은자, 그 안에 흰색 점 하나만 콕 찍었는데도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오히려 이런 단순한 모양의 눈이 캐릭터의 순수함을 더 잘 나타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5등신, 아니 3등신
아무리 유치원생쯤 되어 보이는 아가들이 주인공이라지만 이렇게 비율이 안 좋을 수 있나. 동글납작한 얼굴에, 비율이 좋아봤자 5등신인 체형을 더하자 세상 깜찍해보인다.
깔끔하지 않은 선
디즈니, 픽사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타 애니메이션 제작사와 차이가 뚜렷한 부분이다. 일일이 손그림으로 그려진 덕분인지, 지브리의 캐릭터들은 마감선이 또렷하지 않고 연필로 그린 것 같은 느낌이 난다. 이런 마감선은 지브리의 서정적인 분위기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지브리 그림체에는 색감도 꽤 중요하다. 지브리 스타일의 캐릭터를 그려놓고 <인사이드아웃>의 감정이들과 같은 색을 입힌다면 어라, 싶을 거다. 지브리의 캐릭터성을 완성시키는 분명한 색의 느낌이 있다. 알록달록한 모습으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지만, 마음 한 켠을 아련하게 만드는 지브리만의 색감은 어떤 걸까.
단벌 신사
캐릭터들이 옷을 갈아입지 않는다. 사실 이건 다른 애니메이션에서도 반복되는 특징이긴 하다. 짱구를 생각하면 검빨노가 생각 나듯이. 이처럼 캐릭터들을 단벌로 살아가게 하는 것의 장점은, 캐릭터마다 고유한 색이 바로 떠오른다는 거다. 포뇨를 생각하면 진한 핑크가 고유 색인 것처럼 내가 그린 ~에도 상징색을 만들어주자.
단순한 음영
3D 애니메이션의 핵심은 실제와 무척 유사한 자연스러운 음영이다. 반면 지브리를 비롯한 2D 애니메이션들은, 아예 음영을 표현하지 않거나 어두운 색 하나만을 덧칠해서 음영을 표현한다.
지브리 필터
지브리 애니메이션들을 보고 있노라면 90년대~2000년대 초가 저절로 떠오른다. 그 시절의 감성을 만들어내는 건 명도가 낮고 어딘가 탁기가 섞인 색감이다. 지브리가 퍼스널 컬러 테스트를 받았다면 분명 가을 딥이라고 진단 받았을 것만 같다.
주인공들을 실컷 귀여워하며 구경했으니 이제 따라 그려볼 차례다. 한때 인물 사진을 디즈니 캐릭터처럼 바꿔주는 카메라 필터가 유행했었는데, 지브리 필터가 있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지를 상상해서 그려보기로 했다. 지브리 그림체에 잘 어울릴 만한 인물을 에디터들에게 추천 받다가,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모습이 무척 깜찍한 이영지를 지브리 캐릭터로 재탄생시키고자 시도했다.
고백하자면, 일단 무작정 그려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첫 시도는 완전히 망했다. 나름 손재주를 가진 편이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왔는데 이렇게까지 망쳐본 건 처음이었다. 충분히 많은 레퍼런스를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각각의 스틸컷을 보고 똑같이 따라 그리는 게 아니라 지브리의 그림체를 내가 새롭게 적용해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각 캐릭터들의 디테일이 꽤 달라서 어느 특징을 표준으로 생각해야 할지 어려웠다. 센의 눈이 포뇨의 눈보다 훨씬 뾰족하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될 정도였다.
눈을 그리는 건 특히 어려웠는데, 눈 그리기를 다섯 번째 시도하고 나자 의욕이 싹 사라졌다. 하지만 키키의 친구인 화가 우르술라가 말하길, 내 마음대로 잘 그려지지 않을 때에도 계속해서 그려보는 게 중요하다! 우르술라를 생각하며, 포기하지 않고 체계적인 단계에 따라 재도전해보기로 했다.
펜 선택
펜 선택부터 쉽지 않았다. 나는 원래 깔끔한 선을 좋아하는 편이라 연필 느낌을 내는 펜 자체가 생소했고, 충분히 서정적일만큼 연필 혹은 펜 느낌이 나면서 거칠지는 않은 선을 찾아내야 했다. 마치 모던함과 트렌디함과 감성적인 걸 동시에 요구하는 클라이언트가 된 것처럼 까다로워진 기분이었다. 결국 고른 펜은 프로크리에이트의 ‘나린더 연필’이다.
동그란 얼굴+동그란 눈
이영지를 동그란 얼굴과 동그란 눈을 가진 캐릭터로 그렸다. 문제는 일률적으로 얼굴을 동그랗게 그리고 나니까 인물 특징을 살리기가 어려웠다. 특히 영지는 고양이상 눈에 가까운데, 동그란 눈에 고양이상 눈매를 살리려니 쉽지 않았다. 속눈썹 한 가닥을 양눈의 끝에 추가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3등신이지만 세부 특징 살리기
반듯한 눈썹, 존재감 있는 코를 그렸지만 생각보다 캐릭터에서 이영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치트키로, 스타일링을 추가했다. 쇼미더머니에서 우승한 이영지의 사진을 보고, 수트에 마이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나니 이제야 조금은 이영지 같아졌다. 3등신으로 그려야 하다 보니 하의의 디테일은 살리지 않고 그냥 앙증맞은 비율로 완성했다.
최선을 다해 그렸지만, 아직도 이영지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하다. 색감과 디테일을 더 추가해 내가 그린 이영지를 소생시키기로 했다.
상징색 정하기
상징색을 정하기 위해 이영지의 퍼스널 컬러라는 봄 스트롱 톤을 참고했다. 마침 지브리가 가을 웜톤 같은 느낌이었으니, 같은 웜톤이라는 점에서 크게 이질적이지 않을 것 같았다. 봄 스트롱 톤에게 잘 어울리는 밝고 선명한 머리색과 자켓 색을 골랐다. 주황색을 고른 이유는, 이영지가 했던 여러 염색모 중에서 쨍한 주황색이 생각이 나서다. 무지개 앞머리가 잠시 떠올랐으나 그걸 적용하는 순간 지브리 캐릭터와는 영영 멀어지게 될 것 같아 내가 그린 이영지의 고유 색은 주황으로 간다!
한 번 더 디테일 추가하기
쇼미더머니 우승자인 이영지를 완성하기 위해 쇼미더머니의 상징인 금목걸이를 목에 걸고, 마이크의 색을 흰색으로 칠함으로써 최근 세븐틴에게 선물 받았다는 흰 커스텀 마이크 특징을 살렸다.
마지막, 배경 위에 얹기
지브리 영화 내의 배경들은 대부분 자연 풍경이다 보니 주황색 자켓을 입은 쇼미더머니 우승자에게 잘 어울릴 만한 배경을 찾기가 어려웠다. 다양한 색이 섞여 있어 이영지가 튀지 않게 잘 어울릴 것 같은 두 가지 배경을 골라, 그 위에 완성한 캐릭터를 적용해 보았다.
(1) <마루 밑 아리에티>가 아니라 <마루 밑 이영지>였다면?
쇼우가 집 앞 정원에서 발견한 게 아리에티가 아니라 쇼미더머니 우승자였다면, 아마 쇼우는 호기심을 가지고 친구가 되려 한 게 아니라 그냥 놀라 도망 갔을 것 같다. 그치만 나름 주황 꽃들이 있는 풍경이라, 색감이 크게 튀지는 않는다. 아리에티네 집에 적용해 보았을 때에는 더 자연스럽다.
(2) 포뇨, 소스케, 그리고 이영지?!
생각보다 엄청 자연스러운 조합이다. 포뇨 세계관에 이영지가 살았다면 셋이서 충분히 친구가 되었을 법한 케미다. 포뇨는 핫핑크, 소스케는 샛노랑 옷을 입고 있다보니 이영지의 주황 자켓은 눈에도 안 띈다. 고양이상 눈을 살리려 추가한 속눈썹 때문에 포뇨나 소스케보다는 조금 사나워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동그란 눈매도 닮았다. 비율도 비슷해서, 잘 어울리는 어린이 삼총사 같아보인다.
별 생각 없이 보아도 몽글몽글한 기분을 절로 느끼게 하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이지만, 지브리 캐릭터들이 얼마나 귀여운지, 이 따뜻한 감정은 어떤 포인트에서 온 건지를 깨닫고 나자 더욱더 등장인물들에게 애착이 간다. 동그란 눈망울을, 포동한 손과 발을 왠지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아야와 마녀>를 제외하면 지브리 스튜디오의 마지막 작품은 2013년에 개봉되었다는 점에서 지브리의 영광의 시대는 조금 지나갔을지 몰라도, 관련 테마파크나 굿즈가 계속해서 인기를 누리는 것을 보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지브리를 사랑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서론에서 언급했듯 이렇게 계속해서 지브리가 사랑 받는 것은 따뜻한 그림체의 영향이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 지브리의 스타일을 파악하고 직접 따라 그리려고 시도하면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살아숨쉬게 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매력적인 그림체로 오래도록 사랑할 만한 캐릭터를 우리에게 선물해 준 지브리에게 괜스레 고마워진다.
추신. 귀여운 지브리 캐릭터로 재탄생해준 이영지 님 감사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