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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ty Feb 20. 2023

첫 비

새해 첫 비는 항상 특별하게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다. 


구름이 모여들고 바람이 휘몰아치고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면 긴 한숨으로 회색빛으로 두터워지고 있는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쩌면 새해 첫 비는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먼지와 때를 씻어내기 위해 내리는지도 모르겠다. 포장도로를 치는 소리, 계절의 종착이자 시작을 알리는 소리로 첫 비가 내렸다. 


유난히 춥고 외로웠던 지난 1월.


거리를 지나다가 해의 첫 비를 만났다. 계절을 착각하게 하는 여름 소나기를 닮은 맹렬한 소나기가 순식간에 쏟아졌다. 잠깐 사이에 맑은 빛으로 선명하던 세상이 어스름한 새벽처럼 되어버렸다. 처음엔 세상이 어두워졌는지도 몰랐다. 그저 내 갈 길만 바빴기에. 익숙한 거리를 밤이슬을 맞으려 나가는 주정꾼처럼 휘적이며 길을 바삐 걸었다. 집 근처에 다다랐을 즈음, 얼굴에 느껴지는 때아닌 물기에 습관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동시에 손바닥을 펴서 가슴께로 내밀었다. 평소 얼굴이나 손에 물기가 느껴지면 습관적으로 하던  행위였는데, 요즘같이 비가 마른 시기에는 아무런 쓸모없는 몸짓이었다. 


그런데 웬걸 잿빛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이 비를 잔뜩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고, 뻔하게 내민 손바닥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태생이 마른 세상을 싫어한 탓인지, 세상을 젖게 하는 비를 좋아한다. 하지만 겨울비는 그다지 반갑지가 않다. 일관되지 않는 취향을 탓할지도 모르겠지만 가뜩이나 추운 겨울에 내리는 비를 어느 누가 반가워하겠는가.


처음엔 시원찮은 비실한 빗방울이 회색 보도블록을 희미하게 적셨다. 하지만 신호등을 기다리려고 멈춰 선 사이에 제법 튼실한 빗방울이 떨어져, 하찮은 자국이 아닌 분명한 검은 동그라미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톡.... 톡.... 툭....... 툭.... 툭.... 투두 툭.... 쏴아아...


낡은  붉은 화단을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느리게 내리던 비가 점점 흥이 나는지, 보도블록과 박자를 맞추더니 갑자기 흥을 냈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장대비는 머리에 쓴 털모자를 금세 축축하게 했고, 물방울만 점점이 있던 검은 패딩 위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한데 신호등의 매정한 빨간불은 주변의 사람들의 소란스러움 따윈 관심 없는지 여전히 변함없다. 


어떡하지? 주위를 둘러봐도 마땅히 피할 곳이 보이질 않는다. 기껏해야 앙상한 가로수 밑인데, 빈한한 모습이 못 미더워 마땅찮았다. 소나기 같던 빗줄기가 이내 폭우처럼 맹렬히 쏟아져 내렸다. 도심에 겨우내 쌓인 묵은 먼지를 씻어내려고 작심했는지, 차가운 겨울비에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 따윈 안중에도 없나 보다. 


어디로 피해야 하지? 이렇게 신호 대기시간이 길었던가?


분명 2-3분 남짓 한 시간인데, 온갖 생각을 하면서 신호등을 원망했다. 머리 위의 털모자가 제 역할을 못하고 오히려 짐이 될 때 즈음, 도로의 빗물을 세차게 튕기며 거침없이 질주하던 차들이 하나둘 멈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기다리던 초록빛을 발견하고 거의 뛰다시피 해서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횡단보도를 건너 하천 다리 근처에 있는 10여 미터 앞의 편의점까지, 그리고 편의점과 보도 사이에 있는 나름 넓은 골목을 다시 20여 미터, 마지막으로 좌측으로 5-6미터를 가면 집이 있다. 


평소라면 습관적으로 편의점에 들러 콜라라도 샀을 텐데,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발가락과 뒤꿈치에 느껴지는 물기에 편의점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로지 모서리 돌담에 가려진 골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오랜만에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 전력질주. 오랜만의  전력질주라서 몸이 어색해하지만 그래도 달리는 방법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건물 현관문의 키패드에 기호 다섯 개를 재빨리 누르고, 다시 학창 시절에 쉬는 시간마다 하던 계단 달리기를, 하나 둘.... 집으로  들어가서, 질척이며 양말을 뱉어내지 않는 운동화를 재빨리 팽개치고, 물 빨래통에서 건진 듯한 털모자를 신발장 위로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문 앞에서 순식간에 비에 젖은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바로 욕실로 들어가서 뜨거운 물로 으슬한 몸을 덥혔다. 


요란하게 하얀 김을 길게 내는 전기포트를 들어서 미리 덜어놓은 생강차에 뜨거운 물을 만족하며 부었다. 그리고 두툼한 머그컵을 양손으로 잡고 조심스럽게 한 모금. 가슴 어림을 건드리는 뜨거운 액체에 진저리가 처진다. 마지막으로 긴 한숨. 후우우....


여전히 소란한 창밖. 급작스럽게 내린 겨울비가 주는 당황과 긴장, 흥분, 높아지는 심박수... 긴박했던 그 감정이 나름 재밌었다. 갑작스러운 긴박한 달리기의 후유증이 내일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잠깐의 소동이었지만 즐거웠다. 겨울비가 아무런 감흥 없던 무미건조한 일상에 날카로운 선율로 변조를 선사한 순간이었다. 


책상 모서리에서 하늘거리는 하얀 연기를 피워 올리는 생강차의 포근한 향기에 마음이 더없이 누그러든다. 창밖으로 보이는 겨울비는 이제 현실이 아닌 풍경으로 노곤한 풍취를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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