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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Feb 09. 2023

유세윤의 경고와 아사야스의 제안

<이마 베프>


유세윤의 경고



특유의 감수성으로 유세윤은 청소년을 위한 탄광의 카나리아가 된 적이 있다. 곧 성인의 길에 들어설 아이들에게 앞으로 어떠한 위험과 마주하게 될지를 알려준 것이다. 다음은 몇 년 전 <라디오스타>에서 울려 퍼진 카나리아의 지저귐이다. “제가 요즘 들어 많이 힘들었던 이유는 예전에 ‘나는 무엇이 될까?’ 했을 때가 제일 행복했던 것 같은데, 벌써 ‘무엇’이 되어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에요. 가장 행복했던 때는 이미 지나버린 것 같아서 ‘내가 앞으로 무엇이 될까?’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어요.”


청소년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소풍 당일의 즐거움보다는 소풍 전날의 설렘이 크다는 것을. 소풍의 끝에서 소년과 소녀는 되어버린 상태보다는 되고 싶은 상태가 더 즐겁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원하는 모습이든 아니든 간에, 성인(成人)은 무언가를 이룬(成) 사람(人)이다. 무엇이 되어버린 존재는 갈림길에 닿는다. 다른 무언가를 새롭게 이루려는 길, 기존의 성취를 곱씹으며 음미하는 길, 첫 번째 길로 가야 할지 두 번째 길로 가야 할지를 몰라하다 떠밀려 오게 되는 세 번째 길.


첫 번째 길에 표지판을 세워야 한다면 거기에는 성장의 길, (최근 아파트 거주민이 선호하는 방식으로는) 디벨롭먼트 팰리스 등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나이로만 무언가를 이루는 게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뭔가를 달성하겠다고 다짐한 이를 위한 곳이다. 이 길을 헤쳐가기 위해선 몇 가지 자원이 필요하다. 새롭게 해 보겠다는 결의, 결의를 꺼뜨리지 않을 체력이나 재력, 낯선 길을 걸을 만한 여력이나 행운 등이 그것이다. 보통은 이러한 물자를 확보하기가 쉽지가 않기에, 많은 성인이 발전보다는 유지를 택하려 한다.


그러나 두 번째 길도 만만하진 않다. 현재 상태에 머무르는 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자 파스칼은 모든 인간의 불행이 방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매우 어리석게도 우리는 방 한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한다. 낯선 이성에게 말을 걸거나, 절벽을 기어오르거나, 입 속에 알코올을 쏟아붓는다. 그도 아니면 목구멍을 재떨이로 만든다. 그리고 이 모두는 고통 또는 죽음과 연결이 된다.


성장과 유지 모두가 어렵다. 그래서 적지 않은 현대인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초조함과 강박에 쫓기면서도, 무얼 해야 하는지 또 무얼 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해서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가만히 있자니 누가 쫓아오는 기분이고, 추격에서 벗어나자니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냥 있자니 불편하고 움직이자니 무력하다. 이것이 성인이 마주하는 세 번째 길이다. 바로, 불안이다.


이 불안을 어찌할 것인가



<이마 베프>는 이러한 갈림길에 대한 영화로도 읽을 수 있다. 훌륭한 예술이 그렇듯 이 작품을 영화에 대한 영화로도 볼 수 있고, 당대 프랑스 영화계의 현실을 반영한 영화로도 시청할 수도 있다. 나에게는 이 영화가 완숙기에 들어선 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걸로 보인다.


왕년의 명감독, 르네 비달(장 피에르 레오)이 무성영화 <뱀파이어>의 리메이크작 <이마 베프>를 만들려 한다. 그는 홍콩의 여배우 장만옥을 캐스팅한다. 그녀가 보여준 우아한 이미지를 새 작품에 새겨 넣음으로써 무언가 새로운 걸 이루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파리에 온 장만옥이 마주하는 것은 치열할 정도의 무력감이었다. 감독은 기력을 잃었고, 스태프 역시 의욕적이지 않은 상황이다.


일련의 과정 끝에, 영화를 찍은 모두가 모여서 그간 어찌어찌 찍은 영상을 본다. 감독은 이건 쓰레기일 뿐이라고 울부짖으며 밖으로 사라진다. 새로운 성취를 이루고 싶었건만 그가 마주한 건 무성영화가 달성한 이미지의 반복일 뿐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콜라를 마셔대도 원기가 샘솟지 않는다. 그는 무성 영화와 누벨바그 이후의 새로운 물결을 찾아 헤매지만, 성장의 동력을 끝내 발견하지 못한다.


스태프 역시 재빠르게 흩어진다. 돈에 대한 이야기, 감독은 이미 끝났다는 험담 등을 볼 때, 그들은 현상 유지, 즉 생계를 위해서 영화업에 종사한다. 허나 이번에도 파스칼이 옳았다. 스태프들은 생계유지로서의 작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여배우와의 섹스나 가십을 퍼뜨리는 일 등에만 매달린다. 이러한 번잡이 또 다른 소란으로 이어질 거란 점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감독은 첫째 길인 성장의 여정에서 도태되었고, 스태프들은 둘째 길인 현상 유지에서 만족하지 못한다. 그렇게 감독과 스태프는 세 번째 길인 불안의 길에서 만날 것이다.


어떤 이는 갈림길 중 하나를 택하여 나아가기보다, 길에서 낙오하는 사람을 비웃는데 전념한다. 무언가를 이루어 자신을 드높이는 건 어렵지만, 실패한 자와 견주는 것으로 비교 우위를 확보하는 건 간편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장만옥을 취재하러 온 기자가 그러한 전략을 취한다. 그는 프랑스 영화가 진즉에 끝났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오우삼이나 스티븐 시걸의 작품 같은 대중을 위한 영화, 그들이 보여준 발레와 같은 액션들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라고 덧붙인다.


액션 영화에 대한 찬양에는 문제가 있을 수 없지만, 그의 말에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은 프랑스 영화 전통에 존재하는 발레와 같은 움직임 전부를 도외시한다는 면 때문이다. 아사야스 감독은 극 중 감독인 비달을 통해 <뱀파이어>에 담긴 무시도라의 움직임이 시적임을 거듭 강조한다. 그리고 발레는 몸으로 쓰는 시이다. 그렇기에 액션 영화에 대한 기자의 찬사는 프랑스 영화에 대한 냉소를 가리기 위한 포장에 불과하다.


세 가지 길 어느 곳도 만족스럽지 않은데, 이 와중에도 끝내 편안함을 찾는 이들이 있다. 신경쇠약에 걸린 감독 비달을 대신하여 새롭게 연출을 맡게 된 감독이 그러하다. 그는 프랑스의 영화 전통에는 손댈 곳이 없고, 이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성장의 길을 폐하고, 유지만이 전부라고 믿으면서, 불안의 가능성까지 없애는 것이다. 이를 위해 새 감독은 중국에서 온 여자가 아니라 파리 여인이 영화의 주연을 맡아야 한다고 여긴다.


기존의 성취를 계속하여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일도 나쁘지는 않다. 불안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 나쁘지 않은 것이니까. 어쨌든 세 가지 길 모두에 나름의 고충이 있는데, 그중 하나에 정착하는 건 편안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파스칼이라면 반복만을 되풀이하는 새 감독이 언젠가 엄청난 갈증을 느낄 거라 말할 것이다. 더 나아가 현상 유지에만 전념할 때, 그는 새롭게 빛날 아름다움을 놓치게 될 것이다.



집중과 파괴라는 테크닉으로



아사야스 감독은 장만옥을 통하여 그리고 비달 감독을 통하여 세 가지 길과 관련한 난제에 대해 다른 가능성을 내놓는다. 주연 배우 장만옥은 자신이 맡게 된 배역처럼, 라텍스 의상을 입고 실제로 호텔방에서 물건을 훔친다. 이는 배우로서의 성장을 위한 선택도 아니고, 현재 명성을 유지하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며, 불안에 의한 심신 미약의 행태도 아니다. 그저 주어진 역할에 완전히 몰입했을 뿐이다.


사랑에 빠질 때처럼, 빠져든다는 것에는 도덕의 필터가 작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감독은 도둑이 된 장만옥의 움직임을 흡사 발레처럼 아름답게 연출한다. 생각 이전에, 고정관념을 따지기 전에, 무언가에 빠져든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관객들에게 일깨우려는 듯이 말이다. 프랑스 영화의 전통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두 번째 감독은 결코 이러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할 것이다.


성인은 무언가를 이룬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의 성취를 기준 삼아서 발전과 유지 사이를 헤맨다. 그러나 젊음이란 무엇인가. 왜 아기와 아이와 청소년은 행복한가. 그것은 그들이 순간에 도취할 줄 알기 때문이다. 기존에 내가 해왔던 것을 따지지 않은 채, 이건 해야 하고 저건 하지 말아야 한다는 판단을 하지 않은 채, 일단 하기 때문이다. 우선 빠져들기 때문이다. 세 가지 길 중 어디를 가야 하는지를 고려하기 전에 그냥 하기 때문이다. 갈림길 앞에서의 고민은 그때 주어진 것에 빠져드는 것으로 극복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비달 감독의 사례. 그는 분명 장만옥과 같은 집중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그는 자신이 쓰레기라 평가한 기존의 영상 필름을 손톱으로 긁고, 낙서를 하고, 온갖 방법으로 손상시킨다. 노쇠한 이도 권력을 거머쥐면 회춘한다. 파괴의 힘은 분명 어떤 짜릿함과 활력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기존 성취를 부정하고, 그걸 몰락시키는 일은 <이마 베프>의 마지막 장면처럼 때론 잊지 못할 정도의 아름다움이 되기도 한다. 쌓아 올린다는 의미의 성취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무너트림의 미학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파괴의 과정이 주는 특권도 있다. 그에게는 이제 성취가 없다. 그는 인제 무언가를 이루지 못한 자이다. 즉, 그는 성인이 아니다. 아이다. 비달 감독처럼 기존의 성과를 무너트린 이에게는 더 이상 디폴트가 없다. 영(零)에서의 시작만이 남을 뿐이다. 거기선 무얼 하든 택하기가 쉬울 것이다. 전보다 훨씬 가볍게 해낼 수 있을 테니까. 갈림길 앞에서 눈물 흘릴 일도 없을 것이다. 무얼 하든 새로울 테니까.


<이마 베프>의 두 이미지, 즉 장만옥이 도둑이 된 장면과 비달이 손상시킨 영상이 재생되는 장면은 잊기 힘들 정도로 강렬하다. 아시야스 감독이 강조하고픈 두 가지 상태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작품에는 “영화는 마법이 아니다. 영화는 테크닉이고 과학이다”라는 메시지도 등장한다. 감독은 성인에게 집중과 파괴라는 테크닉을 제안하는 것일까. 그런데 집중과 파괴라는 테크닉과 과학은 어떤 마법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생동감과 활력 그리고 충만함이란 마법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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