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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Feb 17. 2023

근사한 말이 없으면 인간은 죽는다

<성스러운 거미>


대략 십 년 정도 되지 않았을까? ‘자존감’ 열풍이 시작된 지 말이다. 자기 계발 강사들이 자주 언급하며 퍼지게 된 걸로 기억한다. 강연자마다 초점이 다르긴 하지만 보통 자신에 대한 자기 스스로의 인정 정도의 의미로 사용된다. 이와 대비되는 자존심이나 자긍심은 남과의 비교를 통해서 얻어진 만족 정도로 쓰인다.


아무 이유 없이 내가 나라서 좋아,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자존감이 높다. 그러나 ‘지잡대’ 앞에서는 여포처럼 용맹하다가도 ‘명문대’ 앞에서 졸병처럼 주눅이 든다면, 당신은 자존감이 아니라 자존심이나 자긍심만 높은 것이다.


나도 열풍의 시작 즈음에 자존감(self-respect)과 자긍심(self-esteem) 개념을 공부한 적이 있다. 철학자 마이클 왈저에 의하면 전자는 규범적 개념이다. 즉, 어떤 위계에 기댄 평가가 아니라 마땅히 따라야 하는 본보기 같은 것이다. 반면 후자는 평가에 의한 우호적 반응을 일컫는다. 예를 들자면, 시험 성적에 따른 순위 매기기 같은 것.


왈저의 논의를 따라가면 자존감은 그 누구에게도 배타적이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부자에게는 더 많은 인권이 적용되고 가난한 자에게는 인권이 없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존엄하다). 자존감은 모두가 소유할 수 있는 덕목이다. 반면 자긍심은 특정한 기준에 따른 서열이기에 반드시 누군가를 배제한다. 동시에 모두가 소유할 수도 없다.


무던히도 게으른 내가 나름의 공부까지 했던 까닭은 자존감 개념에서 해방감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비교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누군가 나를 평가하기도 했고, 그보다 훨씬 자주 그리고 긴 시간 동안 나 자신을 타인과 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존감 개념을 알게 됐을 때의 산뜻함과 개운함을 말해 무엇하랴.


당시 나의 태도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라면 아마도 “좋은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전도하는 것처럼 자존감에 대해 꽤 떠들고 다녔다. 나처럼 비교가 내재화된 이에게 도움이 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선생이라면 들어봤을 말인데, 최고의 공부는 강의이다. 혼자서는 아는 것 같아도 다른 이에게 설명하다 보면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부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는 자존감을 언급할 때마다 이 말이 참임을 깨달았다.


규범적 개념이야, 타인과 비교하지 않는 거야, 그냥 나를 사랑하는 거야 등등의 말을 할 순 있었지만 여기에서 한 발 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비교하지 않는 존중, 자로 측정하지 않은 존경, 무조건적인 사랑이 대체 무엇일까.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비슷한 걸까, 조금 더 거창하게, 피조물에 대한 신의 사랑과 유사한 걸까. 마땅히 인정한다는 게 무엇일까.


뼛속까지 비교가 배어들어, 비교를 통하지 않고선 무엇이든 알지 못하게 된 걸까. 그렇기에 나는 좋은 예술 작품을 만났을 때 곧잘 경탄을 느끼는 편이다. 와! 이건 히치콕에서 유래되었지만 그간 누구도 응용하지 않았던 방식의 서스펜스야,라고 말하며 감탄하진 않는다. 그저 아름답다고 경탄할 뿐. 그러니 내 생각 전체가 비교에 절은 것은 아닐 테다.


자존감은 유전 같은 걸까. 그래서 누군가는 바보 같은 짓을 해대도 당당한 반면 다른 누군가는 꽤 괜찮은 걸 해내도 자기 비하에 시달리는 걸까. 그렇다면 굳이 자존감을 운운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후천적인 노력으로 바뀌는 게 아닐 테니까.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입과 책이 자존감을 증언하곤 한다. 수많은 진술이 잇따르는 걸 보면 자존감은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성취인 듯이 보인다. 그러니 저렇게까지 남에게 전달하려는 거겠지.


하지만 여전히 나는 자존감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사이드(메흐디 바제스타니)에게도 자존감은 남의 나라일 것이다. 얼이 빠진 듯한 그에게 지인이 묻는다. 자네 요새 무슨 문제 있나. 사이드는 그냥 눙치려다 금세 자신의 고민을 내뱉는다. 사실 모든 게 문제입니다. 나는 왜 순교자가 아닌 거죠, 이라크 전쟁에서 동료들은 부상을 입거나 죽었는데 왜 나는 멀쩡히 살아남아 공사장 인부 노릇이나 하며 사는 거죠, 왜 나는 영웅이 아닌 거죠?


지인은 모두가 순교자가 될 수 있느냐며,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게 자네의 몫이라 말한다. 물론 이 말은 사이드를 달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게 전부일리 없다고 믿는다. 동시에 이렇게 살다 죽을 거란 걸 믿지 않는다. 사이드에겐 만족감도, 자기에 대한 흡족함도 없다. 없으니 가지고만 싶다.


아내의 눈빛만으론 부족하다. 그는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가부장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 섹스를 한다. 자녀와의 소풍도 지겹다. 아버지 역을 연기하는 사이드는 아들이 찬 축구공에 맞고 분통을 터뜨린다. 안 그래도 역할을 수행하느라 피곤한데 공이 뒤통수를 때리니 화가 나지 않겠는가. 노동도 흡족하지 않다. 신은 나를 공사꾼으로 만든 게 아닐 텐데, 인부로만 지내다니.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이드는 손을 다치기도 한다.


그의 공허를 메울 수 있는 것은 타인의 찬사뿐이다. 사이드는 스스로에 대한 승인이나 인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속한 공동체는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한다. 사이드는 성지를 순례하며 떠올렸을 것이다. 현재의 나는 무의미하다. 하지만 이맘(이슬람 교단의 지도자)은 그렇지 않다. 이슬람교도에게서 영원히 이야기되고, 기억되니까. 또 이란인에게서 인정받고 신의 보살핌을 받을 것이니까. 그렇다면 사이드가 갈 길은 정해졌다. 이란 사회의 서열에서 높은 랭킹을 차지하는 것이다.


사이드는 지하드(성전)를 벌인다. 이슬람의 성지 마슈하드에 있는 악(惡)을 쓸어내려는 전쟁이다. 그는 거리의 여자를 죽였고, 죽일 것이다. 필멸의 세계를 깨끗이 한 공로로 그는 불멸이 될 것이다. 이맘처럼 말이다. 사이드는 죽지 않기 위해서 죽인다. 도스토옙스키는 언젠가 근사한 말이 없으면 인간은 죽는다고 말했다. 사이드는 생각한다. 성전 후에 자신에게는 근사한 말, 즉 기도와 찬양과 축복이 쏟아질 거라고. 그게 없는 현재는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물론 그의 행동은 경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경전 해석에 의한 것이다. 알리 아바시 감독은 거미라는 상징을 통해서 사이드의 생각이 그만의 것이 아님을 보이려 한다. 사이드와 같은 생각이 거미줄처럼 엮인 곳이 바로 이란이라는 공동체임을 보이려 한다. 감독은 이러한 거미가 들끓는 거미줄이 정말로 신성하냐고 묻는다.


하지만 내겐 감독의 메시지와 다른 지점이 인상적이었다. 바로 창녀인 척하는 기자 라히미(자흐라 아미르 에브라히미)가 자신을 죽이려는 사이드에 맞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다. 지하드의 전사 사이드가 갑자기 ‘더러운 쓰레기’에게 간청을 한다. 이웃이 들으면 안 된다고, 제발 목소리를 낮춰달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성스러운 전쟁 와중에도 사이드에겐 신이 아니라 이웃이 중요한 것이다. 용사는 스스로의 용맹을 뽐내려 하지 감추려 하지 않는다. 반면 사이드는 어떻게든 이웃에게 이 사실을 숨기고 싶다. 범행이 걸릴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사이드는 기자에게 전화하여 자신의 범죄를 알렸다. 피해자의 사체에 자기만의 표식을 남기기도 했다. 또 범행 현장에 가서 주변인의 반응을 즐기기까지 했다.


즉, 그는 타자의 인정을 바라면서도 타자에게 드러나지 않길 바란다. 분열된 걸까. 마음(phrenia)이 깨진(schizo) 상태, 사이드는 조현병(schizophrenia)에 걸린 것일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란 말은 거의 항상 참이다. 사이드는 쪼개진 마음 중 한쪽을 택한다. 가상이라 부를 수 있는 그곳을 자신이 만든 타인들로 채운다. 그들에게 찬사를 받으며 사이드는 마음의 다른 한쪽, 즉 현실의 무의미함을 견뎌낸다.



라히미의 신고로 인해 사이드는 검거된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절반이다. 감독의 관심은 범인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은밀히 뿜어져 나오는 스릴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범인 검거 후에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이란 사회의 뒤틀림을 보이려 한다. 사이드의 범행 장면에서 강조되는 직접적인 표현에서도 감독의 의도를 알 수 있다. 모호한 이미지를 통해 다양한 생각을 이끌어 내기보다는, 이란 사회가 이토록 잘못되었다는 또렷한 목소리를 전하고 싶은 것이다.


성지를 정화하려 했다는 사이드에게 많은 이가 열광한다. 사이드는 그토록 바라던 타인의 우호적인 평가를 얻게 되었다. 가상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말이다. <성스러운 거미>는 이란 사회의 왜곡된 윤리관, 종교관, 성의식을 고발한다. 또한 이 작품은 자존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질문도 제기하는 듯이 보인다.


인정의 원천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여생을 견뎌야 할까. 스스로 자존을 생산하지 못하는 이들은 어떻게 사이드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서점과 강연장 그리고 유튜브에서 여러 사람들이 말한다. 작은 일부터 해내는 것으로 ‘자기효능감’을 기르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면서 ‘자기조절감’을 고취시키며,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것으로 ‘자기안전감’을 가져야 한다고.  


이란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다. 그러나 쉬운 것부터 해 나가기에 한국인에게는 할 일이 너무도 많다. 굳이 근로 시간 통계를 가져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바라는 대로 살기에 우리 사회에는 오지랖과 충고와 비교가 너무도 많다. 어쩌면 한국에서 자란다는 건 바라는 일을 없애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마음의 안정을 꾀하기에는 우리 공동체의 미래가 불안하다는 소식이 너무도 많이, 자주 전해진다. 소멸을 향할 정도로 인구가 줄고 있다는 게 하나의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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