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께서는 그동안 안간힘을 쓰셨을 테고, 약간의 행운도 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해내셨습니다. 그러한 노력에 부합하는 도전적이고 힘든 사무직을 맡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루는 분명 누군가가 꿈꾼 희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에 위로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타인의 갈망이나 고통이 나의 행복으로 이어지진 않기 때문입니다.
취업이라는 어려운 관문을 뚫었지만 왜 그런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모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소풍날의 기쁨보다는 소풍 전 날의 설렘이 더 크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토록 가고 싶던 소풍이었건만 어쩐지 지루합니다. 입사 지원서를 쓸 때에는 합격만 하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건만, 입사 후엔 왜 그런지 공허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캐러멜 마키아또로 당을 채워보기도 하지만 그때뿐입니다.
사무실에 도착하여 최소 여덟 시간에서 길게는 열한 시간이나 열두 시간을 일합니다. 그만큼의 피로와 예민함을 짊어지고 귀가할 것입니다. 대중교통은 우리만큼 피로하고 예민한 사람으로 가득합니다. 내 옆에 청년이 낀 이어폰에서는 잘게 쪼개진 비트가 쿵쿵대고 울립니다. 저건 이어폰의 형상을 한 스피커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사람이 몰려있는 출입구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려는데, 거대한 배낭을 멘 젊은이가 길을 가로막습니다. 집을 사는 것이 어렵다고들 하는데 저 정도의 배낭이라면 주거 목적으로 쓰려는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문 뒤에 무엇이 따르는지는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짜증과 분노이지요. 아시다시피, 귀가하고 씻고 저녁을 먹으면 남는 시간이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직장의 피로로 인해 남은 시간 전체가 짜증에 휩싸입니다. 기분전환을 꾀해보지만, 다시금 출근하기 위해서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짜증을 품은 채 잠에 듭니다. 또 오늘과 같은 하루가 이어지겠죠.
<일의 철학>의 저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최소 8만 시간을 일하며 삽니다. “1년에 50주 동안, 일주일에 40시간씩, 40년간 일한다. 8만 시간 또는 그 이상을 일하는 데 보내는 셈이다. 독자들 중에는 일주일에 평균 50시간을 일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렇게 50년을 일한다고 생각하면 일하는 시간은 12만 5,000시간이 넘는다. 이렇게 우리는 인생에서 일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있다.”*
아마도 한국인의 평균 근로 시간은 앞의 인용보다 더 길 것입니다. 이 거대한 시간을 빼놓고 삶을 논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일을 삶에서 아예 빼버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학창 시절의 방학 동안에 무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긴 방학의 끝에서 공허함과 무료함과 허무함을 느꼈던 것만큼은 기억이 납니다. 일이 없다면 우리의 삶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서 일에서 벗어나는 게 구원이 아니라, 일에서 의미를 찾는 게 구원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적지 않은 이들이 일에서 충만함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요. 천문학자 심채경은,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고 컴퓨터 스크린을 들여다본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약간 바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청년들이 취업을 꿈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꿈을 보지 않는다, 컴퓨터 스크린을 들여다본다, 라고요. 분명 모니터를 보는 것은 여기에 오는 과정에 비한다면 힘든 것이 아닐 터인데, 왜 이리 우리는 힘든 걸까요. 다소 쑥스러운 말이지만, 그건 꿈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지금은 시들하지만 오디션 프로그램이 온 매체를 덮었던 시기가 있었지요. 참가자들은 말 그대로 잠을 자지 않고 노래를 연습하고 안무를 연습했습니다. 윤석열 정권에서 좋아할 만큼의 일을 하면서도, 그들은 지치지 않았습니다. 이뤄야 할 꿈이 있으니까요. 철학자 니체는 ‘왜’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를 찾아낸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해야 할 이유를 아는 사람은 결국 방법을 찾게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또한 니체는 견딜 수 없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무의미한 고통이라고도 말했습니다.*** 의미가 있다면 우리는 고통을 견딜 수 있습니다. 심지어 즐기기까지 합니다. 오디션 연습생처럼요.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왜를 찾아야 합니다. 왜 이 일을 하는가, 우리 업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하고 있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적성에 맞는 것인지 등의 질문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장담컨대, 지구상에 존재했던 인간의 99% 이상은 이에 대해 단 한순간도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약 200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공동체는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신분제 사회에서 사람들은 마땅히 부모가 했던 일을 반복했고, 자기 계급에 주어진 일을 행했습니다. 왜 이러한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아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왜 하늘은 높고 땅은 넓은가,라는 것을 궁금해하지 않는 것처럼요.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는 다음과 구절이 있습니다.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 예전에는 임금은 임금다우면 되었고, 신하는 신하 같으면 됐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도달해야 할 별과 목표가 주어졌고, 거기로 나아가는 것만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선택해야 합니다.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정해져 있다면 선택할 수 없을 테니까요. 무얼 할지도 정해지지 않았고, 일의 의미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정해지지 않은 일의 의미를 우리는 직접 찾아내야 합니다. 자유의 대가입니다. 그래서 직접 찾아봐야 합니다.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자유를 짊어지지 않은 사람, 즉 노예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소 뻔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포스트모던의 영향 때문인지, SNS의 유행 탓인지, 우리는 말에 담긴 진리값보다는 기발함이라는 덕목을 더 선호하곤 합니다. 그러나 기발하다는 게 곧 진실인 건 아니고, 진부하다는 게 곧 거짓인 건 아닙니다. 신선한 거짓과 상투적인 진실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클리셰라 할지라도 가장 기본적인 것을 먼저 언급하려 합니다.
우선,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정의해야 합니다. 제가 알기론, 거의 모든 학교의 철학과 학생은 소크라테스부터 배웁니다. 소크라테스가 최초의 철학자가 아님에도 말이지요. 왜 그럴까요. 소크라테스가 처음으로 ‘X란 무엇인가’, 즉 정의를 내리는 것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에우튀프론> 같은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묻습니다. “신들에게 사랑받기 때문에 경건한 것인가, 아니면 경건하기 때문에 신들에게 사랑받는가?” 신들이 사랑하기에 엄숙한 것이라면 신의 선호를 살피는 게 우선일 테고, 그 자체로 경건하기에 신의 사랑을 받는 거라면, 신의 선호보다는 우리의 실천이 더 중요하겠지요. 이처럼,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서 이후의 행보가 달라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누구고,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를 정의하는 것에 의해 나아갈 길이 결정됩니다. 정의를 뜻하는 영어 단어는 ‘definition’입니다. 이는 정의라는 뜻뿐만 아니라 (경계나 범위의) ‘한정’이란 뜻도 지닙니다. 경계선은 무슨 역할을 할까요. 그것은 안에 있는 소중한 것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동시에 밖에 있는 불필요한 것이 내부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정의에 의해서 우리는 무얼 지키고 무얼 막을지를 판단합니다. 정의에 의해서 우리는 무엇에 집중하고 무엇을 외면할지를 정합니다.
직업의 의미를 돈을 버는 걸로 정의한다면, 충분한 소득 여부가 좋은 일의 조건이 될 겁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는데 보상을 충분히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일을 더 하든가, 이직을 하든가, 부업을 고려해야겠지요. 이러한 규정 속에서 조직문화가 마음에 안 든다든가, 동료가 별로라든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게 될 겁니다. 아니면,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활동으로 직업을 정의 내릴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돈이나 명성보다는, 실질적으로 타인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는지 여부가 중요해집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얼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규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구조가 정의를 내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형태로 짜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많은 이가 20세기 최고의 철학자로 꼽는 마르틴 하이데거가 발견한 것입니다. “세계-내-존재는 도구 전체의 손안에 있음(das Zuhandenes, what is ready-to-hand)을 구성하고 있는 지시 속으로 비주제적으로 둘러보며 몰입함이다.”*****
사상가들이 이런 식으로 글을 써줘서 지금도 많은 철학 강사가 밥을 먹고 삽니다. 위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세계-내-존재는 손안에 있음에 몰입함이다, 즉 우리 인간은 필요에 따라서 세계에 빠져듭니다. 저는 커피를 살 때, 메가 커피 직원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라고 말할 뿐입니다. 직원 역시 저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아메리카노를 건넬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저기 저 문을 거쳐서 회의실로 들어왔지만 아무도 문을 인식하진 않았습니다. 우리는 회의실에 들어와야 하는 목적에 몰입하였기 때문입니다. 문은 그 과정에서 사용되었지, 인식되진 않습니다. 우리는 필요로서 세계를 대합니다.
그런데 제가 메가 커피 직원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직원이 제가 기대한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할 때입니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싫은데요.” 그러면 저는 ‘얘 뭐야’라고 내면에서 그 사람에 대한 의문을 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을 파악하려고 할 것입니다. 문 역시 그러합니다. 아무리 손잡이를 돌려도 문이 열리지 않을 때, 우리는 문고리가 제대로 붙어 있는지, 경첩이 잘못되지는 않았는지를 관찰합니다. 문을 살피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노동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선 출근해서 일을 잘해야 한다는 목적에서 일을 대합니다. 일이란 무엇인가, 일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요. 사실 그렇게 해야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대표님께서 제게 보고서 작성을 지시하셨을 때, 보고서란 무엇인가, 보고서 작성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저는 큰 꾸중을 듣거나 해고되겠지요. 보고서를 작성할 때에는 보고서를 잘 쓰려는 목적에서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언제나 사용으로만 대한다면, 사물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늘 해왔던 대로 하게 됩니다. 왜 출근해야 하나요? 여태 출근했으니까요. 왜 일을 잘해야 하나요? 상사가 시켰으니까요 등등. 대개 목적은 주어지지, 세워지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단언할 수 있냐고요? 하이데거의 말처럼, 우리 세계 자체가 묻는 것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방금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또 하이데거는 “인간은 ‘우선 그리고 대개는’ 비본래적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우선 그리고 대개는 타인을 흉내 내며 산다는 뜻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일에 회의를 느끼고, 왜 일을 해야 하는지를 궁금해한다면, 다시 말해 일에 있어 고장이 났다면, 그 사람은 소중한 순간과 마주한 것입니다. 세계는 잘 짜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 뜨고부터 잘 때까지 목적 자체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출근을 위하여 샤워하고, 대중교통을 탈 때에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는 것처럼요. 일할 때도 그러합니다. 온갖 고민이 이어지지만, 이는 일을 잘하려는 목적에 부합하는 계산이지 사유가 아닙니다.
엄밀한 의미의 사유는, 계산과 달리 근본까지 의문시하는 것입니다. 목적 자체를 심판대에 세우는 것입니다. 잘하기 위해 수단을 찾는 게 아니라, 왜 잘해야 하는지, 왜 해야 하는지 자체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사유해야 합니다. 무작정 주어진 목적을 잘 해내려는 것이 아니라, 왜 이 일을 행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니체의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왜를 알면 어떻게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의 이유를 알면, 일의 방법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 빌 버넷 외, 이미숙 역, ⟪일의 철학⟫, 갤리온, 2021, p. 14.
** “삶에 대한 자신의 이유인 왜냐하면을 가진 자는, 거의 모든 방법, 거의 모든 어떻게를 견뎌낼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백승영 역, ⟪우상의 황혼⟫, 책세상, 2015, p. 78. 강조는 니체의 것.
*** “지금까지 인류 위로 널리 퍼져 있던 저주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였다.” 프리드리히 니체, 김정현 역, ⟪도덕의 계보⟫, 책세상, 2010, p. 540.
**** 게오르크 루카치, 김경식 역, ⟪소설의 이론⟫, 문예출판사, 2007, p. 27.
*****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 1998, p. 110.
****** “분명히 그 양식은 존재자를 그것이 우선 대개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 즉 그것의 평균적인 일상성에서 제시해주어야 한다.” 위의 책, p. 34. 강조는 하이데거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