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견딜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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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리담

스물여섯, 고물장수의 삶은 처절했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견딜 수는 없는 일이었죠.


아버지와 함께 거리를 돌며 고물을 줍다 보면, 어느새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곤 했습니다. 그중에는 조용한 불쾌함도 있었고,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 듯한 거리감도 있었습니다.


끼니를 해결하려 식당에 가도, 기름을 넣으러 주유소에 들러도, 고물 냄새가 밴 꾀죄죄한 차림으론 손님으로서 따뜻한 응대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어요.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그런 시선 앞에서도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모습은, 제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삶의 단단함이자, 시간이 흐를수록 저를 지탱해 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습니다.


하지만 몇 달을 부자가 함께 이른 새벽부터 거리를 누벼도, 손에 쥔 건 겨우 생계를 간신히 이어갈 만큼의 푼돈뿐이었습니다


투석을 마치고 돌아와 비틀거리는 몸을 애써 다잡으며 다시 트럭에 오르려는 아버지. 단 하루라도 더 벌어야 한다는 그 절박한 몸짓 앞에서, 무력감과 죄책감이 엉켜 조용히 가슴을 짓누릅니다.


그저 함께 버티는 것만으로는, 이 고단하고 무거운 삶을 결코 바꿀 수 없었죠. 더는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돌며 시간을 소모할 수는 없었습니다.


혼자 명함을 챙겨 들고, 헌책이나 고철이 나올 법한 사무실과 현장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거래처 하나라도 잡아보겠다고 애가 닳도록 돌아다녔지만, 돌아오는 건 문전박대와 싸늘한 시선뿐이었죠.


말 한마디 붙이지도 못한 채 등을 돌려야 하는 순간들이 반복되다 보니,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기분에 서러움이 북받칠 때도 많았습니다.


철거 현장을 찾아가 고철을 매입하려 해도, 돌아오는 건 헛웃음만 나오는 단가였습니다. 일부러 약 올리듯, ‘이 가격에 가져가든가 말든가 ’ 하는 조롱이였죠.


폐기물을 치워주면 고철을 주겠다고 큰소리치던 이들도 있었지만, 막상 일이 끝나면 말을 바꾸거나 연락을 끊고 잠적해 버리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저는, 열정에 취해 설치는 철없는 청춘. 한 번 써먹고 버리기 좋은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죠.


하루하루가 전쟁이었습니다. 속지 않으려 눈치를 살피고,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도 결국엔 또 속아 넘어가고, 또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만 원 한 장을 두고도 멱살이 잡히고, 욕설이 난무했습니다. 참다못해 먼저 소리를 지르고, 때론 주먹이 먼저 나간 적도 있었습니다. 주먹다짐 끝에 피투성이가 된 채, 길바닥에 나뒹군 날도 있었어요.


세상물정 모르는 저는 늘 만만한 먹잇감이었고, 그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습니다. 하루를 견딜수록 마음은 조여왔고, 사람을 믿을수록 되레 상처만 돌아오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치열한 현실 한복판에 내던져지고 나서야, 비로소 가식 없는 삶의 민낯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미소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어떤 친절은 결국 계산 끝에 남는 장사였다는 걸, 속이 다 해지고 마음이 갈려져 나간 후에야 절실하게 깨달아갔습니다.


그제야 세상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말끝마다 되뇌던 '돈'. 사람을 움직이고, 관계를 결정하고, 인격마저 값을 매기는 그 단어는, 결국 세상이 믿는 유일한 언어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도 달라져야 했습니다.


더 이상당하고만 있을 순 없었습니다.


이제는 저만의 방식으로, 기어이 제 몫을 쟁취해야 했죠.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것을 빼앗게 되더라도 말입니다.


철에 자석이 달라붙듯, 고철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었습니다. 이름도 생소한 외곽 지역이든, 먼 지방 도시든, 일감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움직였죠.


현장에서 눈에 띄는 소장이든 반장이든 가리지 않고 다가가 얼굴을 익혔습니다. 어떤 날은, 단 한 번의 인연을 위해 먼지 날리는 현장 앞에서 몇 시간이고 말없이 기다렸습니다.


고철을 노린 속내를 감춘 채, 처치 곤란한 박스를 정리해 주겠다고 나서며 슬쩍 발을 들였고, 그렇게 현장을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게 됐습니다.


다음으로 늘 골칫덩이처럼 버려지던 냉장고를 다른 철거현장에서 하나둘 챙겨 와, 말없이 현장 한편에 설치해 두고는 매일같이 그 안에 음료수나 커피를 채워 넣었습니다.


'쓸데없는 짓 한다'며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 녀석은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습니다.


삶에 찌들어 각박했던 그들도, 그런 제 모습을 보고는 미안한 마음에라도 고철을 조금씩 챙겨주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말을 섞는 기회도 늘어갔습니다.


카페를 하며 몸에 밴 '사람 응대'는 낯선 이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 의외로 큰 힘이 되었고, 그렇게 유대는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사람들과 친근하게 어울리고 유대감을 쌓으며, 속으론 기존 거래처들의 실수를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그 틈이 찾아온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 안으로 파고들어, 기존 거래처들을 하나씩 밀어내며 제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갔습니다.


터줏대감처럼 굴던 거래처라도, 내 몫을 줄이고 상대에게 이익을 조금 더 얹어주면, 사회가 말하는 ‘의리’란 건 몇십만 원 앞에서 너무도 쉽게 무너졌습니다.


손익 앞에선 누구나 본심을 드러냅니다.


얄팍한 동정심을 바라고, 구걸하듯 일감을 따내려 했던 저는, 그게 이 세상의 이치라는 걸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배운 건 썩히지 말아야죠. 이제는 저도 그 이치를 써먹을 차례였습니다.


내어주지 않으면, 제 방식대로 빼앗아오면 됐습니다.


그렇게 거래처를 하나둘 늘려가며, 천천히 제 자리를 만들어갔습니다. 어느새 트럭 몇 대로는 감당이 어려울 만큼, 일감도 거래처도 눈에 띄게 많아졌습니다.


인력사무소를 통해 사람을 쓰기 시작했고, 집게차와 중장비까지 불러 하루에 수백 톤의 고철을 실어 날랐습니다.


일처리가 빠르고 계산도 깔끔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점점 현장 쪽에서 먼저 거래를 제안해 오는 경우도 많아졌고, 굳이 제가 찾아가지 않아도 일거리가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전화는 매일 같이 쉴 새 없이 울려댔고, 지역에서 가장 큰 고물상도 제 물건을 받으려 밤낮없이 문을 활짝 열어둘 정도였습니다.


늘 지쳐만 계시던 아버지 얼굴에 요 근래 웃음이 부쩍 늘었습니다.


가난이 마치 운명처럼 따라다니던 우리 집에도, 언젠가부터 따뜻한 웃음과 온기가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화목한 가정’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어요.


사람들은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정작 행복은 돈이 있어야 손 닿는 곳에 머물 수 있더군요.


월세가 조금이라도 싼 곳을 찾아 전전하고, 재개발 바람만 불면 가장 먼저 짐을 싸야 했던 우리 집이, 불과 2년 만에 작은 전셋집 하나쯤은 꿈꿔볼 수 있을 만큼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늘 쫓기듯 조급했던 마음이 조금씩 놓이기 시작했습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던 시간들 끝에서, 드디어 한줄기 여유가 찾아오고, 얼어붙은 듯 버티던 삶에 늦은 봄 햇살 이 따스하게 스며드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야 조금은 웃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이제야 남들처럼 살아가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이제야, 겨우겨우 사람답게 살만하다 싶었는데


이제는 제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걷는 것도, 드는 것도, 숨 쉬는 것마저 버겁습니다.

이제는 제 몸이 더 이상 제 사정을 봐주지 않으려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