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불쌍하다. 네가 참 불쌍하다. 下
- 각 작품은 각기 다른 이야기입니다. 뭐랄까. 멀티 유니버스 같은 거죠. -
4. 자기 신세가 제일 한심한데, 누가 누굴.
사례관리 팀장을 따로 불렀습니다. 이훈정이가 그만 두지는 않지만. 지금의 업무 난이도는 유지할 수 있게 하라고요. 팀장 표정이 좀 의아해 합디다? 참나. 어딜 감히 팀장 주제에 의문을 품는지. 나도 말없이 응시했지요. 내가 꿇릴 건 없었어요. 난 우리 녹두종합사회복지관을 설립한 천마그룹 오너 출신이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내가 낮은 곳에서 헌신하며, 사회복지경영의 혁신을 위해 사회에서 제일 낮은 곳에 임했다고 떠들어 댔어요. 병신 같은 것들. 난 그냥 사회에서 버려지고, 감추고 있는 놈들의 꼬라지를 보는 게 재미있어서 여기까지 놀러온 건데.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희망을 보고 싶나 봐요. 한심한 노릇이고 헛된 희망이지요. 사례관리 팀장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지가 알기는 뭘 알아. 그냥 내가 시키니까 알아들은 척이나 한 거지.
사례관리 실적 보고 때문에 이훈정이가 쓴 사례관리 노트를 읽게 되었지요. 화장실을 가거나 물을 마실 생각이라면 지금 하고 오세요. 지금부터 미치도록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테니까요. 눈이 침침하거나 잠이 온다면 오늘 하루 푹 쉬고 내일 가장 맑은 정신일 때 다시 만납시다. 괜찮다고요? 당연히 그렇겠지요. 천마그룹 오너인 내가 말을 하는데,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훈정이가 글쎄. 으하핫. 으히힛. 글쎄! 숨이 잘 안 쉬어지는데. 하아. 진정을 하고. 아니 이훈정이가 글쎄 자기가 관리하는 수급자들이 안쓰러워서 너무 힘들다는 겁니다! 이거 완전히 맛이 간 놈이지요. 자기 신세가 제일 한심한데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지. 혼자 사무실 책상에 엎드려서 한참을 꺽꺽 거리며 웃었어요. 너무 웃으니 침이 너무 흘러서 티슈로 닦다가 모자라서 세수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또 이훈정이를 안 볼 수가 없더군요. 당장에 관장실로 오라고 연락을 했죠.
“훈정 주임. 사례관리 일지는 잘 읽었어요. 상담자의 개인적 감정은 쓰지 않도록 교육을 받았을 텐데.”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감정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관리하는 수급자나 현장을 생각하니 제가 과하게 작성했던 것 같습니다. 당장 수정해서 다시 결제 올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상담자 역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일을 했으면 하니까요. 무엇보다 훈정 주임이 쓰는 솔직한 표현들이 제가 가지 못한 현장을 이해하는 데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제가 사례관리 팀장에게 말은 해둘 테니. 앞으로도 그렇게 해줘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감사드릴 일이죠. 그리고...”
행여나 이훈정이가 그만 둘까 봐 금일봉이랍시고 30만원을 줬어요. 잠깐 달랠 필요가 있으니까요. 근데 이훈정이가 아주 고맙다고 고개를 120도 숙여서 인사 하는데, 다만 이건 좀 김이 빠지더이다. 그까짓 30만원 받았다고 허리 디스크 걸릴 정도로 고개를 조아린다는 게. 이놈도 별 거 없는 놈이구나 싶었어요. 그냥 쓰레기 같은 일이나 계속 주면서 그만두게 할까 하다가. 한번 참기로 했지요. 저는 제법 관대한 사람이거든요. 저에게 큰 웃음을 줬는데, 저도 이놈에게 기회를 더 줘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지켜보기로 했지요. 그리고 이놈은 저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5. 배신당한 친절은 당신을 진정한 어른으로 만든답니다.
지난주 수요일이었나. 사례관리 팀장이 실실 내 눈치를 보면서 관장실로 들어왔어요. 영 비굴하게 웃는 꼴이 짜증나는 일이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지요. 말을 들어보니, 구청에서 전화가 왔다더군요. 화가 났습니다. 그 정도 일이면 알아서 처리를 하지 뭐하러 나한테까지 보고 해서 귀찮게 만드는지. 근데, 일이 생각보다 큰 크더군요. 이훈정이한테 상담을 하고 싶다고 온 놈이 있었는데. 그 놈이 자기는 법정 기초생활수급자인데, 돈이 부족해서 이가 8개나 썩었지만 치료를 못하고 있다고 도와달라고 했나 봐요. 이훈정이는 그 말만 믿고 민간 재단에 요청해서 돈을 따서 그 놈한테 준 거죠.
근데 이훈정이가 완전히 속은 거였어요. 뭐 속았다고 말하기도 민망해요. 그냥 그 이상한 거지새끼 말만 믿고 돈을 따다 줬는데, 민간 재단에서 자기들 보도자료 만든다고 구청에 관련 자료를 요청을 했나 봐요. 근데 그 거지새끼가 수급자도 아니고, 받은 돈으로 치아 치료를 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무전취식으로 전과까지 있던 놈이었어요. 그래서 민간 재단에서 난리가 났는데, 그 돈을 우리 복지관이 물어줘야 한다는 말이었어요.
곰곰이 생각을 했지요. 민법 상 계약 관계에 있어 선의의 제3자... 아니 어려운 말은 차치하고. 딱히 우리 복지관이 책임을 질 필요도 없었어요. 민간 재단이 처음부터 제반 서류를 요청한 것도 아니고요. 솔직히 그까짓 푼돈이야 내 돈으로 처리해도 그만이니 귀찮아서 내 돈으로 처리를 할까 했죠. 근데, 갑자기 구미가 확 당기더군요. 그래서 아는 변호사를 즉시 호출했어요. 그리고 변호사한테 그 거지새끼한테 연락을 하고 복지관으로 오게 했지요. 왜냐고요? 딱 봐도 모릅니까. 이훈정이가 박살나는 현장을 라이브로 볼 수 있는데.
그 사기꾼 놈도 뭔 경계성 지능장애인, 아니다. 말은 또 예쁘게 써야지. 느린학습자인지 뭔지 같았어요. 변호사가 오라고 하니 바로 튀어오고. 관장실에 앉혀 놓으니 땀이랑 눈물을 그렇게 계속 흘려요. 더럽게 말이야. 이훈정이도 올라오라고 했지.
“훈정 주임. 훈정 주임이 상담한 사람이 이 사람이 맞아요?”
“...”
“훈정 주임을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사실관계 파악이 선행 되어야 하는 상황이라 그래요.”
“맞습니다. 제가 큰 실수를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훈정 주임 잘못은 하나도 없어요.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법률 용어로 피의자라고 부르겠습니다. 법적 절차는 어차피 진행이 될 테니까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다 갚을게요. 죄송합니다.”
“피의자 분. 왜 거짓말을 하셨죠?”
“그게... 저 복지사 선생님이... 들어주셔서...”
“들어줘서요?”
“말을 들어 주시길래. 저도 모르게 그만... 죄송합니다. 제가 갚을게요. 죄송합니다.”
“반성을 하시나요?”
“천번 만번 죄송합니다. 저 분은 제가 말 하면 그저 다 해주고 싶어하길래. 죄송합니다.”
이훈정이 얼굴을 스윽 봤지요. 표정이 완전히 예술이었어요.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가정들이 덕지덕지 붙어서 완전히 빠그라졌더군요. 저는 흥분했습니다. 솔직히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전부터 안 되던 발기까지 됐어요. 이 카타르시스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어요. 제가 장수한다면 이훈정이의 그 표정이 엄청 크게 기여했을 거라 확신합니다.
“저도 일을 더 키우고 싶지 않습니다. 저희 녹두복지관 직원이 실수한 것도 맞고요. 그래서 대승적인 차원에서, 그냥 제 사비로 재단에 비용을 지불하도록 하지요.”
“사장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피의자 분한테도 법적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습니다. 돈도 청구 안 하지요. 다만.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도록 하세요. 어디든, 언제든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사장님!”
짜증이 좀 나기는 했어요.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또 하는 거야. 사람 짜증나게. 귀찮아서 얼른 나가라고 했죠. 변호사한테도 출장 상담비용 세 배로 지급할 테니 마무리 하자고 했지요. 돈이 있다는 건 참 편해요. 뭐든 쉬워지죠. 도저히 더 참을 수 없어서 덩그러니 제 관장실에 남겨진 이훈정이를 또 보았지요. 표정은 더 박살이 나 있었어요.
“훈정 주임. 괜찮아요. 일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또 마음만 앞서서. 제가 너무 무능하네요.”
“아닙니다. 살면서, 일을 하면서 종종 친절은 배신을 당하기도 해요. 그러면서 강해지는 겁니다. 곁이라는 건 아무에게나 내어줘서는 안 되는구나. 그래서 절차나 서류가 필요하구나. 강해져야겠구나. 그렇게 훌륭한 어른이 됩니다. 훈정 주임님은 그렇게 될 거예요.”
“죄송합니다. 제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생했어요. 나가 봐요.”
자기 기분은 박살이 났는데, 내 기분 상하지 않겠답시고 문을 엄청 천천히 닫는데. 와 그 승리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짜릿했지요. 그렇게 이훈정이가 나가고, 저는 혼자 자위를 했습니다. 아주 오랜만의 쾌감이었지요.
6. 네가 죽인 거야. 너의 알량한 그 위선이 죽인 거야.
한동안은 별 일이 없었어요. 심심했지요. 관장실 안에서 혼자 사탕이나 까먹고 있는 시간이 계속되니 슬슬 지겨웠죠. 일을 좀 벌이자 싶더군요. 사례관리 팀장, 이훈정, 시설을 담당하는 총무팀장을 불렀어요. 구성이 좀 신기한지 다들 뻘쭘해 하더군요. 그래서 빨리 뱉었죠. 지난번에 우리 훈정 주임한테 사기 친 그 사람. 경계성 지능 장애... 아니. 느린 학습자 케이스인 것 같은데. 우리가 한번 수범사례를 만드는 게 어떻겠냐고 운을 띄웠죠. 다들 썩은 동태 마냥 눈만 뜨고 있길래, 더 질렀지요. 우리가 시설 미화 직원으로 채용하자고요. 사례관리 팀장 표정은 찌그러졌고, 총무팀장 표정은 화를 참는 표정이었고, 이훈정이는 웃더군요. 그때 또 깨닫게 되었습니다. 역시 난 유능하다. 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데 재능이 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어차피 우리 녹두복지관 물주가 사실상 저였기에 제 의지가 모든 것이었으니까요. 사기꾼 놈 불러다가 제안을 하니, 어휴 무릎을 꿇고 감사하다고 하는 놈은 또 처음이었어요. 아니다. 처음이 아닌가? 아랫놈들 비굴한 꼴을 워낙 많이 보고 살았으니 일일이 기억은 못하겠네요. 그리고 훈정 주임한테 일을 가르쳐 주고 장기적 사례관리 케이스로 가져가 보자고 했어요. 총무과장은 놀라더군요. 시설관리는 자기들이 아니까. 적당한 업무는 자기들이 가르치는 게 맞다고 생각했나 봐요.
건방진 새끼가 윗사람이 말을 하는데 야지를 놓고 지랄일까. 그래도 참았어요. 내 재미를 꺼트리면 안 되니까요. 훈정 주임한테 이 분에게 적당한 시설관리 일을 같이 찾아내고, 또 일로 편성해보라고 했지요. 훈정 주임은 장기적으로 우리 복지관의 리더로 성장할 사람이니 업무를 만드는 것도 일종의 훈련이라고. 경영학적으로 직무를 만들고 운용하는 것도 훌륭한 인재육성 방식이라는 것도 슬쩍 언급하니 이훈정이가 재수 없게 맑은 눈을 빤짝거리더군요. 재수 없고. 또 기분이 째졌습니다. 당분간 심심하지는 않겠구나. 그리고 4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훈정이와 멍청한 사기꾼은 어떻게 됐냐고요? 천덕꾸러기가 되었지요! 이훈정이는 멍청한 사기꾼한테 진짜 직업을 만들어 주려고 했어요. 복사나 인쇄, 자잘하게 나오는 쓰레기들의 분리수거, 수급자 분들에게 후원품목을 전달할 때 안부를 물어보도록 하고, 어르신들 스마트폰 강의도 업무 보조인 것처럼 꾸미고 수업을 듣게 했지요. 하지만 인간이라는 건 참 간사합니다. 아무리 마음씨가 예뻐도, 내 일상에 거슬리는 아랫것들을 참지 못해요. 직원들은 훈정 주임과 사기꾼 놈을 따돌리기 시작했어요. 가끔은 대놓고 면박을 주기도 했지요. 사기꾼 놈도 어지간히 멍청하지만 이건 눈치를 챘는지 그만두겠다고 몇 번을 이훈정한테 말했답니다. 근데 이훈정이가 어르고 달래서 4개월을 끌고 간 거죠. 등신 같은 놈. 자기 평판도 추락하고 있는데, 누가 누구를 챙기는 건지. 참나. 그래도 그 꼬라지가 얼마나 한심하고 재미있던지. 제 기분은 아주 최고였죠. 그리고 지난주 목요일이 되었어요. 노크도 없이 이훈정이가 제 방에 들어옵디다.
“관장님.”
“무슨 일인가요? 훈정 주임 표정이 안 좋네요?”
“최홍철 아저씨가. 그러니까. 지난번에 채용해주셨던 그 분이.”
“일이라도 생겼어요?”
“돌아가셨습니다.”
“죽었다고요?”
“출근을 안 하시고, 연락도 안 받으시길래 주소지로 찾아갔는데. 스스로 삶을... 정리하셨습니다.”
이훈정이가 갑자기 짐승 마냥 주억거리며 울더군요. 콧물이 방울지고, 꺼이꺼이 소리를 지르면서 울어대서 다른 직원들이 튀어 올라왔을 정도였어요. 저는 훈정 주임을 꼭 안아주었지요. 훈정 주임은 제 어깨 위에서 끝없이 울었습니다.
“제 잘못이에요. 그냥 총무팀장님한테 물어보고 평범한 일을 하게 해드렸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훈정 주임. 그럴 수 있어요. 훈정 주임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홍철 아저씨를 무리하게 만들었어요. 몇 번이나 힘들다고 말하셨는데, 제가 몰아붙인 거예요. 제가 홍철 아저씨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예요.”
“아닙니다. 훈정 주임의 잘못은 전혀 없어요. 훈정 주임은 좋은 마음으로 한 거잖아요. 오히려 모두가 그 아저씨를 안 믿었는데, 훈정 주임만 그 아저씨를 믿어줬잖아요. 다른 이유가 있으셨을 거예요. 절대로 자책하지 말아요. 훈정 주임은. 그 아저씨 죽음에 어떤 책임도 없어요.”
이훈정이가 울음을 뚝 그쳤습니다. 너무 급작스럽게 멈춰서 제가 놀랄 정도였죠. 그렇게 훈정 주임은 일어났고, 저한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문을 닫고 나갔어요. 제 기분이요? 예술이었죠! 드디어 이훈정이가 인간이 됐구나. 자기가 죽여 놓고는 자기 잘못 아니라는 걸 윗사람이 공증해주니 멀쩡해져 돌아가는구나. 드디어 미친놈이 정상인이 되었구나. 아주 행복했습니다. 사회에 기여를 했다는 생각이 자부심까지 느껴지더군요.
그 사기꾼이 진짜 우리 녹두복지관 일 때문에 죽었냐고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맞습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사기꾼이 몇 번 일 그만두겠다고 저를 찾아왔거든요. 자기는 그냥 머리를 안 쓰는 일만 할 수 있는 사람인데, 훈정 주임이 자기를 믿고 다른 일들을 자꾸 준다고요. 그리고 자기 때문에 훈정 주임도 욕먹는 것 같아서 너무 미안하다고요. 제가 이 사기꾼한테 말해줬죠.
“참고 일을 계속 하시는 게 어떨까요? 여기서 그만 두는 건, 훈정 주임에 대한 배신이잖아요. 그건 인간으로서 할 일은 아니죠.”
“그래도 훈정 주임님한테 너무 미안해서요...”
“맞아요. 하지만 아저씨가 일을 잘 해야만 훈정 주임도 욕을 안 먹을 거예요. 아저씨가 계속 일을 잘 못하시거나, 그만 두면 훈정 주임은 혼자서 더 큰 욕을 먹을 거예요. 그래도 그만 두실 건가요? 여기서 아저씨가 그만두면 그게 훈정 주임 발목 잡는 일이 됩니다.”
“발목이요?”
“그렇지요. 훈정 주임은 무책임하게 일만 벌이고, 모두에게 피해만 끼친 사람이 되는 거지요. 그러면 앞으로 이 일은 훈정 주임을 두고두고 발목 잡을 일이 되겠지요.”
“그러면 안 되는데. 그렇게 되면 안 될 텐데...”
그렇게 그 사기꾼은 우물쭈물 계속 일을 했고, 이훈정과 함께 점점 더 많은 욕을 먹었지요. 맞습니다. 제가 매번 사기꾼을 그만두지 못하게 했죠. 정 힘들면 강단 있게 그만 두던가. 너무 잔인한 게 아니냐고요? 천만예요. 전 사실만 전달했을 뿐인 걸요. 저는 없는 이야기는 안 합니다. 담백한 사실만 말 하는 사람이지요.
7. 불쌍해. 네가 참 불쌍해.
그렇게 사기꾼 놈 장례식도 끝났어요. 이훈정이가 며칠 휴가를 가더군요. 그 시간이 끝나고 돌아오면 이훈정이는 완벽히 정상인이 되어있겠지요. 우리 같은 회색이 되어, 세상 속에서 잘 살아갈 거라 생각했어요. 정상인이 되어 나에게 인사하는 그 무표정의 표정이 보고 싶어서 시간이 잘 안 가더라고요. 근데 이훈정 그 놈이 휴가에서 돌아와서 한다는 말이, 그만 두겠다는 말입니다. 것 참. 이제 재미의 절정에 닿았는데, 김을 쫙 빼버리다니. 재수 없는 놈. 괘씸해서 붙잡지도 않았어요. 그래도 마무리는 깔끔하게 해야 뒤탈이 없으니 마지막 티타임을 가졌지요. 근데 그 놈이 한 말이 너무 불쾌하게 남았어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이게 찝찝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최고급 사우나에 매일매일 가는데 없어지지가 않아요. 그 대화가 뭐냐고요? 보채지 마. 어련히 말 해줄 텐데 아랫것이 왜 껴들어. 그냥 들어.
“관장님.”
“마지막으로 건의사항 같은 게 있을까요? 저희 기관을 위해서라면 뭐든 좋으니 말해주세요. 훈정 주임 같은 분들의 건의라면 제가 새겨들어야지요.”
“불쌍해서,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 아저씨가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요. 다만 좋게 생각해요. 훈정 주임 잘못도 아니고. 그 아저씨는 오히려 자기를 믿어줬다는 생각에 훈정 주임에게 고마울 거예요.”
“홍철 아저씨가 불쌍한 게 아니라.”
“아! 훈정 주임이 상대했던 기초생활수급자들이요? 괜찮아요. 나라가 돈도 주고, 다른 부분들에서도 보호를 하니까. 역시 훈정 주임은 마음이 참 따뜻해요. 마지막까지 저에게 감동을 주셔서 고마워요.”
“그 분들은 불쌍하지는 않아요. 다른 사람이 불쌍해서, 그걸 견딜 수가 없어서 그만두게 되네요.”
“음... 뭐 훈정 주임 나름의 뜻이 있겠지요. 기운 내시고. 다 잘 될 겁니다. 제가 연락해야 할 곳이 있어서. 이만 일어나 보지요.”
“그동안 감사드렸습니다.”
“개인적인 조언이지만 다음 직장은 사회복지 쪽 말고 다른 분야에서 찾는 게 좋을 거예요. 훈정 주임은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어요. 훈정 주임도 알 테지만. 사회에서 누락된 사람들 곁에 있다는 게, 그렇게 유쾌한 일은 아니니까요. 음. 그냥 고통에서 멀어지세요. 제가 훈정 주임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조언이에요.”
“고통이요?”
“네. 이곳 일이 좀 험해야지요. 이런 구렁텅이에 발목 잡히지 말고. 나아가세요.”
“전 이곳에서 일 하면서 고통스러웠던 적은 없습니다. 다만.”
“다만?”
“불쌍해요. 참 불쌍해요.”
“불쌍하다...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여튼. 좋은 일만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주 불쾌했어요. 이훈정이 그 새끼 눈깔도 마음에 안 들었어요.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그 눈이 아주 기분 더러웠어요. 동정인지 애정인지 모를 그 눈깔이 아주 짜증이 났다 이 말입니다. 한심한 새끼가 감히 누구한테. 그래도 아쉬운 감은 있지요. 오랜만에 찾아낸 장난감인데. 뭐 괜찮습니다. 비슷한 놈은 또 오겠지요. 다만 다음부터는 저를 그딴 눈깔로 바라보는 놈이 있다면, 가만 두지 않을 겁니다. 그 따뜻한 눈이 왠지 기분 나쁘니까요. 괜찮으시냐고요? 제가요? 저는 제법 괜찮습니다. 앞으로 또 좋은 일이 있겠지요. 근데 말입니다. 그... 제가 좀 껄끄러운 게 생겨서요.
“왜 저를 그렇게 보시죠? 당신도 같은 생각이실 텐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