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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라 변호사 Dec 14. 2021

내 학창시절과 이혼한 남자

이제는 이름도 생각 나지 않는 그 남자애가 썼던 소설은 "이혼한 남자"다. 고등학생이 썼다고 하기에는 너무 현실적이었던 소설이었다. 어렸던 그 당시에 고등학생이 그런 현실적인 소재를 구체적으로 소설에 담아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었고, 그에 비해 어리게만 느껴지는 나의 정신연령에 꽤 좌절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그 수업에서 다른건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소설의 제목은 뚜렷하게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 소설은 결혼한 남자가 자신에게 밥을 해주는 부인의 반찬이 어머니 맛과 다르다며 투정을 하다가 이혼당하는 이야기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이 타박했던 음식은 닭도리탕이다(표준어는 닭볶음탕이라고 하는데, 역시 닭도리탕은 닭도리탕이지). 그래서 닭도리탕을 먹을 때마다 그 남자애를 떠올릴 수 있었다. 고등학생이 반찬투성하다가 이혼당한 남자의 삶을 소설 속에 담아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에 대한 놀라움은 아직도 있고, 그 애는 지금 소설을 계속 쓰고 있는건지에 대한 궁금함이 있다. 그리고 2003년도에 한 고등학생이 그렸던 소설 속의 내용이 2021년의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는 현실이 놀랍다.


우리 고등학교는 부산시에서 공들여 키운 상당히 좋은 고등학교였고, 내가 입학하던 그 해에 우리학교에 부산시 언어영재교육원이라는 것이 설치되었다. 고 1은 창작영재반에 지원이 가능했다. 사실 나는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아 못붙을 줄 알고 안 쓰려고 했는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지원한다기에 지원했다가 덜컥 붙어버렸다. 합격하기 위해서는 창작시험을 봐야 했고, 나는 그 덕에 붙을 수 있었다. 내신 성적이 좋아서 당연히 붙을 줄 알았던 내 친구 한명은 라면을 파마머리에다가 비유하는 시를 써서 떨어졌다고 했다. 시 제목도 기억난다. "그녀는 파마머리". 나는 당시에 친구의 아이디어를 듣고 무릎을 치며 참신하다고 생각하면서 상투적인 시를 썼던 내 자신을 상당히 초라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떨어졌고, 나는 '이런 기성세대 같으니라고'하면서 속으로 심사위원들을 욕했다.


기숙사 생활을 했던 우리는 주말마다 귀가를 해야했는데, 창작반 수업은 토요일에 있어 우리는 모두가 떠나고 해가 저물어 가는 오후부터 저녁까지 학교에 남아있어야 했다. 나는 아무도 없는 텅빈 학교의 적막함을 깨고 우리의 목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이 좋았다. 복도에 점점 드리우는 어둠도 좋았다. 아무도 없는 학교에서 무슨 짓을 해도 들키지만 않으면 되었고 나는 악당이 된듯한 기분과, 아주 소수와만 은밀하게 공유할 수 있는 그 시간을 상당히 즐겼다. 물론, 나는 수업에서는 대체로 잠들어있는 학생이었지만 말이다.  


 시, 소설, 희곡, 한시, 문학 비평 등을 들었다. 특히, 시와 소설 선생님은 자기 작품을 가져와서 열심히 수업을 하셨었고, 우리는 그닥 그 시와 소설이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소설 수업에서 내준 숙제의 평을 하는 시간에서 명은 혹평을 받았다. 나는 당시에 엄청나게 명을 놀렸었지만 이제와서 고백하자면 나는 사실 그 부분을 좋았했다. 나는 명이 쓰는 대부분의 글을 좋아하고, 지금도 내 주변에서 글을 가장 잘 쓰는 사람은 명이다(물론, 글을 쓰는 사람도 명이 유일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명이 내 주변 사람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인 줄 알고 살았었다. 그리고 이건 친구들이 잘 모르는 사실인데, 내 숙제를 우연히 내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이 보시고 재능이 있는 것 같다면서 엄청난 칭찬을 해주셨다. 그렇지만 소설은 돈이 안되니까...  


나는 희곡 수업을 제일 좋아했다. 내가 희곡을 좋아해서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그 이유는 그 선생님이 희곡 수업은 제대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이야기들을 주로 해주었기 때문이다. 분명 수업을 빌미로 우리에게 전도를 하러 왔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이 어떤 시절인가, 배우는 것만 빼고 모든 것이 재밌는 시기 아닌가. 나는 그 수업이 가장 재밌었다.


창작반 담당자는 우리학교 선생님이었다. 우리에게 정말 친절했던 기억이 있다. 그 선생님은 한시를 전공하신 분이었다. 한자를 전혀 모르는 우리에게 한시 수업은 고역이었다. 그 수업 때 가장 사람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항상 웃는 얼굴로 우리를 대해주셨고, 맛있는 것도 종종 사주셨다. 같은 학교 학생인 죄로 우리는 1년간 수업 말미에 창작영재반 문집 발간을 담당해야했고, 그 때 그 선생님과 친밀함을 쌓을 수 있었다. 탕수육을 시켜주셨는데 그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선생님은 다음 해였던가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고, 몇 년 뒤에 그 선생님이 출근길에 쓰러져서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가슴 아픈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비극은 왜 항상 좋은 사람에게만 가까이 있는 걸까.  


우리 문집의 제목은 '이카루스'였는데, 내가 그렇게 하자고 했었다고 명이 그랬다. 맞다. 당시 이카루스를 내가 좋아했었으니 내가 맞다. 당시 고1병에 걸려있던 나는 역시 예술은 비극이라고 생각하며 비극적인 제목이 문집에 들어가야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졸업 후에 거기 실린 "이혼한 남자"와 친구들의 시들과 소설을 보고 싶어서(물론 내것도) 온 집을 다 뒤졌지만 그 문집은 찾을 수가 없었다. 명도 못찾았다고 했다.  그래 내 마음속에만 그냥 남겨두는 걸로 해야지. 그때 명이 썼던 소설은 "어떤 지하철"이었다. 당시 몇명이서 대구지하철 참사를 각기 다른 인물의 시선으로 옴니버스 형식으로 쓰기로 했었지만 결국 그 이야기를 쓴 이는 명하나였다. 역시 끈기의 아이콘. 그때가 2003년도니까 18년이 된 소설이구나.


"이혼한 남자"를 썼던 그 남자애는 우리 고등학교 학생은 아니었고, 창작영재반 수업을 들었던 다른 학교 학생이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그 남자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말없고 덩치가 약간 있고, 항상 구부정하게 있던 그 애의 실루엣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표정은 항상 수줍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한 번도 말을 해보지 않은  사이였다. 당시 내 친구들이 같이 수업을 들었고, 그들과만 이야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말을 걸 이유가 없었다.  낯선 이들과 구태여 친하게 지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고 내가 말을 걸었겠냐마는 그 친구들은 외롭게 수업을 듣지 않았을까하는 미안함이 밀려온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혼한 남자" 작가 외에도 나머지 친구들은 상당히 창작에 진심이었던 친구들이었던 것 같다. 다들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갑자기 소설을 쓰려고 보니까 "이혼한 남자"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리고 며칠전의 명과의 대화가 떠오는 것이다. 늦진 않았을까. 그래 100세 시대에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는거지.

 

"이혼한 남자"를 썼던 그 애의 지금이 가장 궁금하다. 소설가가 되었을까. 어쩌면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의 작가가 그 애는 아닐까 상상을 해본다. 우연이라도 그 애가 쓴 소설을 읽었기를 소망해본다. 그 애의 행복을 빌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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