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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지 Jan 28. 2022

공인인증서

국세청으로부터 세 번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18년, 19년, 22년 1월과 5월 비밀번호 변경 알림 문자다. 아마도  20년과 21년에는 비밀번호를 잘 맞춘 듯하다. 오늘은 5회 이상 틀릴까 봐 미리 포기했다.


디지털 치매인 나는 아내 휴대폰 번호도 가끔 잊어버린다. 아내 생년월일도 마지막 자리가 슬롯머신처럼 어지럽게 돌아다닌다. 호적상의 생년 월일과 한 달 정도 차이가 나서 실제 생일을 뇌에서 불분명하게 처리하는 게 분명하다.

샤워 후 수건을 화장실에 두고 나오는 것도 같은 원리다. 오늘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찾는데 10분이 걸렸다.


국세청 아이디는 기억하는데 비밀번호가 기억이 안 나고, 공인인증을 하라는데 은행에서 구입한 버튼 누르면 숫자가 뜨는 열쇠고리는 어디 두었는지 몰라 찾는 걸 포기했다.

비밀번호를 새로 발급받고 카카오톡으로 간편 인증에 성공해 진입한 국세청이란 성은 들어가는 문이 많았다. 문을 지날 때마다 자꾸만 내가 누구냐며 암구호를 대라 하는데 화랑/담배 말고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내야만 하는 미션은 현실이나 웹에서나 크게 차이가 없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만 나를 인증하기 위해 매달 990원의 정보이용료를 제공하는 것도 영 마땅치가 않다.


매년 한 두 번 세금 관련 서류를 제출할 때 필요한 절차인데 그 절차를 통과하는 통행세를 내라 하니 차라리 느리지만 국도로 가겠다. 낮에 등본을 발급받았는데 커다란 기계가 토해낸 종이 한 장에 무료라고 쓰여있어서 기분 좋았다.


'그래 이거지!'


물론 주머니에 챙겨 온 동전이 부끄러워 꺼내지는 않았다. 동전은 이제 코인으로 기억되는 후세의 유물이 될 것이다. 이번 달에는 현금을 한 차례밖에 쓰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아들 하나, 딸 하나 주려고 사탕 두 개를 사는데 카드 쓰기가 미안해서 지갑에서 천 원을 꺼냈는데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당연히 카드를 꺼내겠지 하는 마음에 카드리더기의 위치를 알려주다 황급히 자신의 손동작을 회수한다.


"여기 꽂으시..."

까지는 들었는데 지난 번 꽂다 지쳐 잠든 내게 "끝났어?"라고 묻는 아내처럼 부끄러움은 내 몫이다.


나는 보았다. 주먹을 내었다가 황급히 가위로 바꾸는 그 어색한 순간의 공기말이다. 층간소음의 대립각 주민이 서로 75층과 74층에 오르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마주한 것만큼이나 숨이 가쁘다. 등본이랑 바꾸려 했던 동전은 108층 아르바이트생이 주었던 바로 그 동전이다.


삶을 동전에 빗댄다면 영화 '다크나이트'가 떠오른다.


'영웅으로 죽거나, 오래 살아서 악당이 된 자신을 보거나.'


등장인물 하비 덴트가 가지고 있는 양면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삶의 태도이다. 집에서의 모습과 밖에서의 모습이 다른 사람이 그럴 것이며, 밖에서는 대통령 후보지만 집에서는 주전에 끼지 못한 후보로 치부되는 가장일 수도 있다.


내 글의 메인 빌런 아내 역시 동전 던지기나 가위 바위 보처럼 상대와 확률 싸움을 해서 자신이 해야 할 업무를 떠넘길 때가 많았다.


"술 사 오는 거 가위 바위 보!"


갑자기 말하고 손을 내밀지 않으면 졌다고 간주해 버린다. 그 틀을 깨는데 수년이 걸렸다.


"설거지하는 거 가위 바위 보!"


만약 자신이 져서 업무를 수행하면 "내가 이 거 해주는 대신 나 이 거 좀 해줘~"라며 새로운 업무를 요구한다. 빌런의 요구에 맞서 나는 디지털 치매로 대응했다. 결혼 사실도 잊고 싶었지만 충격이 큰 기억은 장기 기억으로 전환되어 오래 간직된다. 한 동안 '브로콜리너마저'의 음악을 들으며 잠이 들었다.


'잊어버리고 싶어요'


나는 나를 잊고 싶기도 하고 때론 버리고 싶기도 하다.


30분 동안 내가 찾던 건 다음 기회에 다시 도전해 보라는 국세청 네 이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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