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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우 Oct 19. 2023

 끝. 꼭 사라지거나 소멸해야 끝이 나는 건 아니다.

 끝을 맞이하는 데에는 그렇게까지 거창한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방법이 없을 때. 아무리 발악해 봐도 내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나는 아직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데, 너는 여기가 끝이란 걸 세상으로부터 직시당할 때.

 끝이란 그런 거다.

 생각보다 별 거 없다.



 어렸을 때는 나에게 끝이란 게 없을 줄 알았다.

 노력만 하면 어디로든 뻗어나갈 수 있을 거라 믿었고,

 현실의 한계란 게으른 사람들의 핑곗거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엄마 아빠한테 돈 많이 벌어오겠다고, 언젠가 호강시켜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할 때도

 그 말은 빈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몇 번이고 그렇게 장담했고, 몇 번이고 내가 그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병신같이.


 한때는 영화를 하고 싶었다.

 같은 영상이어도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아련한 감각이 좋았다.

 영화판에는 뚜렷한 길이 없었지만, 그렇기에 기회가 오면 닥치는 대로 잡았다.

 기회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악착같이 잡다 보면 결국엔 내 길도 보일 거라 생각했다.

 항상 돈이 들어오는 건 아니었지만, 항상 잠들 틈도 없이 바빴다.

 갈 수 있는 현장은 모두 따라다녔고 가끔은 무페이로 일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세월은 이미 한참 흘러버렸는데 길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미 내 길 위에 서 있고, 그 길이 여기서 끝났을 뿐이라는 걸.

 내 길은 이미 끝난 지 오래라, 아무리 내다봐도 더 나아갈 수는 없을 거라는 걸.

그 단순한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 참 미련하게도 오래 걸렸다는 걸.


 영화는 포기하고 중소 콘텐츠 회사에 편집자로 취직했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기 위한 바보 같은 쇼츠 영상들을 편집한다.

 허위 정보들이 가득한 자극적인 영상들을 뇌 없는 기계처럼 찍어낸다.

 그마저도 AI 편집 프로그램이 생기면서 외주 업체가 점점 끊기고 있다.



 아빠는 퇴직한 지 오래다. 연금이 나오지만 많지는 않다.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을 쪼개서 매달 용돈을 보낸다. 용돈보다는 생계비에 가깝지만.

 엄마 아빠가 먹고 싶다는 건 사줄 수 있지만, 내 명의 집은 없고 차는 중고다.

 일도 없이 집에서 놀고먹지는 않지만, 딱히 자랑하고 다닐만한 딸도 아니다.

 죽고 싶을 만큼 괴롭거나 불행한 건 아니지만,

 살고 싶을 만큼 즐겁거나 행복한 건 아니다.


 죽지 못해서 그냥 하루 더 살아가는,

 그 질려버린 표정을 내 얼굴에서 보는 건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엄마 아빠 얼굴에서 그 표정이 보이는 건

 아무리 나라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초밥을 포장해서 먹고 있었다. 

 마트 떨이로 산 싸구려 초밥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된 고급 초밥도 아니었다.

 적당히 가격도 있고 가성비도 있는, 그래도 본가에 온 김에 기분 내려고 산 초밥이었다.

 입맛에 맞아하는지 보려고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아빠 얼굴에서 그 표정을 봐 버렸다.

 어설픈 초밥 특유의 식초 맛에 물리듯이,

 더 이상 기대되지 않는 인생에 물려버린 그 표정.

 거울 속에서는 참 익숙했는데

 그게 아빠 얼굴에 있는 걸 보니 참을 수 없을 만큼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식탁을 엎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제발 행복 좀 하라고.

 그것 때문에 내가 이렇게 발버둥 치면서 사는데

 그냥 못 이기는 척 만족하고 행복 좀 하면 안 되냐고.

 꼭 그렇게 불행한 티 내면서 사람 죄책감 느끼게 해야겠냐고.

 나도 내가 얼마나 한심하고 병신 같은지 다 아는데,

 그래도 내가 이렇게 발악하는데,

 그냥 눈치껏 행복해주면 안 되냐고.


 그 말을 하고 집에서 나왔다.

 달궈진 말들을 뱉어낸 목구멍은 시원해지긴커녕 더 화끈거리기만 했다.


 주워 담을 수 없는 말들을 토해내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길.

 오늘도 끝난 지 오래지만 끝이 나지 않아서 버거운 인생을 하루 더 살아간다.

 그리고 오늘은 유독,

 더 버거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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