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이념
"하면 된다."
국민학교 3학년 수학여행,
말 없고 용기 없고 대신 수줍음이 많았던 나에게 잊지 못할 기억구슬이 생겼다. 담임 선생님은 1986년 시대정신에 투철했나 보다. 단체활동의 상품이 <하면 된다> 푯말이었고 내가 뭘 어떻게 해서 1등을 했는지는 잊었지만, 그 상품을 내가 받았다. 선생님은 친구들 앞에서 조목조목 하나씩 내가 잘한 점을 칭찬하시며 <하면 된다>가 깊게 음각으로 새겨진 푯말을 주셨다. 아직도 그때의 기분과 그 푯말의 생김새가 생생하다. 그건 칭찬을 상으로 받는 생애 첫 경험이었고 가치관의 시작이 됐다. 내가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는 자신감의 시작이 <하면 된다>였던 거다.
"하면 된다"의 파생 수식어
<하면 된다>의 정신은 수식어를 덧붙이며 여러 카테고리로 뻗어갔다.
혼자서 혼자 힘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가장 먼저,
이유 막론하고 어쨌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내가 맨땅에 헤딩했던 그 많은 것들, 그래서 어쨌든 해냈던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도 하기 싫다.
<하면 된다>에 수식어가 덧붙여지면서 위력도 더 커지는 게 사실이다. 성과는 더 큰 성과를 만들고 성공은 더 큰 성공을 이끈다. 그러나 어찌 됐든 인풋과 아웃풋은 정비례이다. 결과인 성과물은 커질수록 해야 할 것도 많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매번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처럼 나를 테스트했다.
이제는 체력도 없다. 의지도 없다. 동기도 없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일단 하면 뭐라도 된다. 그러나 한다고 꼭 뭐가 된다는 법은 없다.
물론, 일단 하지 않으면 뭣도 안 된다. 그러나 안 한다고 뭐라도 되지 않는 건 아니다.
말장난 같지만, <하면 된다> 사이에는 <뭐를?, WHAT?>이 빠져있는 게 함정이다.
그래서 이젠 폐기장으로 보냈다. WHAT이 빠진 '하면 된다'는 답이 없다는 것. 그것이 답이다.
그래서 <하면 된다. 하지만 안 해도 된다.>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신념 새로운 자아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며 살기로 했다.
내 자아의 본부에 새로운 신념을 가져왔다. 되고 안 되고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좋고 좋지 않은 거를 생각하며 좋은 것을 하면서 사는 게 좋겠다는 결론이다.
되고 안 되고, 성과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좋고 안 좋고, 그 가치를 생각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