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 10시,
자고 있다.
몸에 충전기 전선을 감은 채,
10살짜리 내 아들이.
아픈 곳은 없다.
살아있으나 꿈쩍을 안 한다.
참다못해 조심스레 전선을 잡아당겨 C타입 케이블을 콧구멍에 꽂아본다.
어라. 작동한다.
'아, 배터리가 없었구나'
아들은 꼬인 케이블을 신경질적으로 풀고 이내 바로 꺼졌다.
'밤새 충전을 해놨어야 하는데, 이 또한 내 탓이니. 내 탓'
침대 끝으로 뒤집어 누워서 다시 잠든 아들을 바라보며, 모든 우주의 기운을 끌어모아 혈압을 다스린다.
'화'는 이롭지 못하리니,
나는 그저 아들의 콧구멍에 다시 충전기를 꽂고 나왔다.
ㅜㅜ
2024.10.17
공교육에서 벗어난 아들을 키우는 건 참으로 괴롭다. 학교 안에서 '왜 학교에 가야 하는지'를 찾지 못하고, 삶 속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를 느끼지 못하는 아들 옆에서 나는 그저 있어줄 수밖에 없다. 왜 아무것도 안 하느냐 묻는다면, 이미 다 해봤기 때문이다.
육아의 목적, 양육의 방향성, 훈육의 지침, 자녀교육의 목표 등등
내 알고리즘을 도배하고 있는 정보들.
다 바른말들이나, 갖다 쓸려고 하면 정작 딱 맞는 게 하나도 없는 거처럼 내가 제시한 방법 모두 아들에게서 튕겨져 나온 상태다.
'어떻게'라는 방법이 아니라 이제는 근본적으로 '왜'라는 본질에 의문이 든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무슨 'why'를 가지고 자녀를 키울까?
"난 무슨 대학에 가든 상관없어요. 그저 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초연함을 가장한 가장 회피적인 대답이라 생각한다.
"난 아이와 친구 같은 부모가 될 거예요."
참 인생 모르는 사람이다.
"아이가 잘할 수 있는 일, 좋아하는 일을 찾아 주고 싶어요."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너는 찾았니?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는 게 부모죠. 항상 믿어주는 지지자가 될 거예요."
Oh, my God.
자녀양육 가치관에 대해서 하는 말을 가만히 보면 육아의 방향이 <길러지는 자녀의 입장에만> 치우쳐 있다. 자손이 삶의 가치가 될 수 없는 이 살벌한 세상에서 말이지. 자식의 입신양명이 이제는 부모에게 그저 영광일 뿐이지. 생활비가 되지 않잖니,
그래서들 육아전문가들은 요즘 주장한다.
<자녀의 독립>을 목적으로 삼으라고.
이보세요. 선생님들!
자식을 독립시키기 위해 양육하는 건 너무 동물적인 발상 같아요.
내가 독수리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고,
부모 입장에서 자녀의 존재란, 뭡니까?
100세 시대 사람한테요.
나는 왜 이렇게 피 땀 눈물 모아 키우고 있을까? 대체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양육의 goal을 어디에 둬야 할까?
자녀를 낳아, 공들여 키워서, 힘들게 가르치고, 하나의 인간으로 만드는 몹시 고단한 육아라는 일련의 과정이 결국 나에게 무엇을 남기느냐는 말이다. 육아의 전 과정을 마친 뒤, 나는 어떤 걸 느끼길 원하는 걸까?
생각이 단순해졌다.
60,70,80대의 나에게, 아들들은
30,40,50대 중에서 <절대 끊을 수 없게>
꾸준히 교류하는 한 세대 젊은 인간이면 된다.
책임과 의무, 권리와 보장
다 걷어내고 나면 부모자식도 결국 관계,
관계만 남는다.
지지고 볶으면서도 꾸준하게 좋은 관계만은 유지해 가면 되는 것이다.
깊은 성찰 후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집안을 어지르며 놀고 있는 고양이 두 마리를 양팔에 안아서
자고 있는 아들 위로 냅다 던져줬다.
뭐요?
오늘은
아들의 소중함과 고양이의 쓸모를 동시에 느끼며 시작하는
기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