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태어날 내 딸에게도 알려주고 싶은 것들
가을이 오면 엄마와 꼭 하는 리츄얼이 있다. 바로 정동길, 덕수궁과 덕수궁 돌담길을 거니는 것.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엄마는 내 손을 꼭 잡고 덕수궁으로 데려갔다. 엄마 껌딱지인 나는 엄마를 독차지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노랗게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와 따뜻한 햇살, 그리고 단아하며 아름다운 궁의 모습을 보면서 황홀한 감정을 느꼈다. 차가운 가을 날씨지만 엄마 손을 꼭 잡고 궁을 거닐던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며, 집에 가기 전 자판기에서 꺼낸 율무차를 근처 벤치에 앉아 마셨을 때 그 따뜻함은 지금 생각해도 몸과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렇게 매 가을, 엄마와 나는 같은 장소를 걷는다. 같이 팔짱을 끼고 걸으면서 엄마는 곳곳에 물든 엄마의 추억을 이야기해주셨다. 엄마의 첫 회사 (엄마의 직장이 시청 근처였다) 이야기, 첫 데이트 이야기, 아빠와 거닐던 돌담길 데이트 이야기, 왕복 3-4시간이 넘는 출퇴근 시간에 대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피곤하지만 이 악물고 공부했던 이야기, 그리고 치열한 회사 생활에서도 엄마가 지켜낸 신앙 이야기. 그때마다 나는 마치 타이머신을 타고 엄마의 10-20대의 발자취를 함께 걷는 듯 한 기분이었다.
엄마는 정동길을 거닐며 나에게 가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고, 계절을 즐기는 법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계절에 사랑하는 사람과 추억을 만다는 법도 알려주셨다. 엄마와 함께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떨어지는 낙엽에 얼굴을 맞고도 좋다며 깔깔대고 웃고, 달달한 케이크 한쪽과 커피 한잔을 시켜 같이 먹고 마시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이야기하는 것. 그래서 난 가을을 너무나 사랑하고 엄마와 함께 하는 이 리츄얼은 나에게 큰 선물이자 의미가 있는 행위이다.
유난히 예뻤던 이번 가을, 엄마와 정동길을 걸으며 마음이 새로웠다. 그렇기도 한 것이 올 해가 마지막으로 엄마랑 단 둘이 보내는 가을 리츄얼이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유모차를 몰고 할머니가 된 엄마와 엄마가 된 내가 딸과 함께 걷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기분이 묘했다. 아직도 엄마와 이 길을 오면 난 초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은데, 어느덧 나도 엄마가 된다. 곧...
돌아보면 엄마는 나에게 물질이 많지 않아도 삶을 즐길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꼭 돈이 많아야만 재밌게 지낼 수 있다는 주변 사람들과 달리, 엄마는 계절이 주는 아름다움을 통해 삶을 즐기는 법을 알려주셨고, 커피 한 잔 (어릴 땐 율무차 한잔)으로도 충분히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엄마는 거리를 거닐며 아름답고 눈길 가는 곳에 잠시 멈춰 바라보고 설명해주셨다. 분위기 있는 가게, 멋스러운 간판, 나무에 핀 한송이의 꽃, 나무에 앉아 노래하는 새, 예쁜 커피 잔, 독특한 색감 등등...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어떻게 즐기고 감상할 수 있는지 엄마는 나에게 가르쳐주셨다. 그런 것들이 하나씩 쌓이고 쌓여 엄마와 나는 수많은 추억 앨범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추억 앨범을 하나씩 꺼내서 같이 이야기하기도 하고, 새로운 앨범을 만들며 소소하지만 행복함을 만들며 살고 있다.
뒤돌아보니, 엄마는 내게 삶을 즐기는 것뿐만 아니라 문화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그 문화를 토대로 나는 나만의 취향이 생겼고, 나만의 분위기와 색깔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는 못하지만 정신적으로 충만함과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고 있다.
나도 내 딸에게 이런 것들을 가르쳐주고 싶다. 계절을 즐기는 법, 삶을 즐기는 법, 그리고 추억을 만드는 법, 그리고 자신의 문화를 만드는 법. 그래서 이 아이의 마음과 정신이 풍요로웠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며 즐길 수 있음에 감사하고, 그 안에서 삶을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자신의 취향과 문화를 만들어 나가 하나의 멋진 인격체로 자랐으면 좋겠다.
내년에 세 모녀가 함께 걸을 정동길, 덕수궁 돌담길, 그리고 덕수궁. 우리 딸은 할머니가 걸어온 이야기와 내가 걸어온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함께 계절을 즐기며 우리는 어떤 추억을 만들게 될까?
글: Joy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