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올림픽 굴렁쇠, 넓은 스타디움에 이어령이 쓴 一行詩(일행시)
아름다운 책이다. 어떻게 말이 이다지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필요한 부분만 읽곤 했는데 이 책은 어느 한 페이지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소개말이 길어지면 누가 되는 책이다.
서문: 어록은 이어령이 쓴 일행시다.
1988년 서울 올림픽 하이라이트였던 굴렁쇠 장면을 보고 시인 김영태는 ‘넓은 스타디움에 이어령이 쓴 一行詩(일행시)’라고 평한 일이 있습니다. 김영태시인의 이야기같이 이어령은 ‘일행시’를 쓰는 특기가 있습니다. 이어령은 순발력도 뛰어나 예고 없이도 어떤 자리 어떤 이야기든 수미일관하게 연설해 내는 저력이 있으며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12년간 신문 칼럼을 썼습니다. 신문 칼럼은 제약이 많고 어려운 글입니다. ‘그날 일어난 사건 중에서 社是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참신한 토픽을 골라, 두 시간 이내에 8매에 수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에게 논설위원을 시키지 못하나 27세의 이어령에게서 그 능력을 발굴한 분이 당시 서울신문 사장 오종식선생입니다. 그에게서 깊이 있는 일행시를 쓸 가능성을 감지하신 겁니다.
이어령은 긴 글보다 짧은 글에서 빛을 발하는 문인입니다. 굴렁쇠식 일행시를 통해 독자들을 열광시킵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바람이 불어오는 곳’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같은 감성적인 제목의 ‘일행시’들을 들고 문단에 등장했습니다.
짧은 글이 사람들의 내면을 흔들려면 굴렁쇠 scene 같은 함축의 깊이와 넓이가 있어야 합니다. 이어령의 글에는 번개처럼 섬광을 발하며 핵심을 꿰뚫는 빛나는 언어들이 있습니다. 날렵한 단도처럼 단수에 핵심을 찌르는 그의 낱말들은 참신한 비유법과 빈틈없는 논리를 겸비하고 있어 독자들을 전율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어령기념사업회에서는 그의 글 중에서 그의 어록들을 찾아냈습니다.
1. 마음: 사랑의 근원
진행형
실망과 희망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실망이 있기에 희망이 있고, 희망이 있었기에 실망이 있는 것. 어린아이들처럼 모래성을 쌓고 허물고, 허물고 쌓는 것이 인간의 생인지도 모른다. 사실 인간의 길엔 진행형만이 있을 뿐이지 결론은 없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정
정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라는 식으로 지적하며 흑백을 따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렴풋한 달빛처럼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감싸주는 것, 거기에 어떤 정겨운 따스함이 그윽하게 흐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무 뚜렷하면 정이 생겨나지 않지요.
행복
도마뱀을 천 배로 확대시켰다고 해서 악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갓난아이를 열 배로 확대시켰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재산을 배로 늘린다고 하여 행복이 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감사
감사하는 마음, 그것은 자기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감정이 아니라 실은 자기 자신의 평화를 위해서다. 감사하는 행위, 그것은 벽에다 던지는 공처럼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말
좋은 땅에 씨앗이 떨어지면 어떤 것은 30배, 60배, 100배 결실을 맺기도 한다. 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전해준 지식이나 말을 통해 우리는 몇백 배의 수확을 얻을 수 있다. 말은 그냥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가서 번식한다.
모순
인생은 비극이니까 희극인 것이다. 반대어가 아니라 동의어이다. 한국인의 마음은 고뇌의 술잔에 가득 찬 환희라고 할 수 있다. 미이 모순의 화합 속에서 인생의 꽃이 핀다.
기쁨
기쁨은 그보다 더 크고 집요한 욕망 때문에 더 쉽게 지나간다, 기억할 수도 없는 여름의 소나기처럼 언제나 급히 지나가 버린다.
가난
가난하다고 해서 비천한 것은 아니다. 가난을 의식할 때 그는 비천해진다. 부자라 비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기의 부를 의식할 때 비천해진다.
겸손
이 세상에 평생을 두고 공부해도 다 배우지 못할 많은 진리가 있다는 것을 알 때 인간은 겸손해진다.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고 또 자기 지식을 과신하지도 않는다.
2. 인간: 나의 얼굴
아이
‘있다’는 존재론이고 ‘되다’는 생성론이지.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만들어진 것은 이미 ‘있는’ 거야. 하지만 어린아이는 모든 것이 ‘되는’ 생성론이지. 출발점에 있으니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무서운 존재거든
인생
프로메테우스는 앞을 바라보며, 에피메테우스는 항상 뒤를 돌아보며 후회하지. 내 몸에는 이 두 신화의 형제가 살고 있어요.
죄인
스스로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실은 아무 죄도 짓지 못하고 있는 자가 많다. 예수처럼..., 그것이 인생의 역설이다.
생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거꾸로 현대인은 ‘생’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그 때문에 세상은 메말라지고 그 죄악은 더욱 어둠을 더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종말가 속에서 시작하는 사람, 죽음 속에서 시작하는 사람, 죽음 속에서 삶을 느끼는 사람만이 생의 완전함을 지닐 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식
어머니의 미소에는 사랑만이 아니라 슬픔과 아픔의 눈물이 존재한다. 이 세상에 나와서 탯줄을 끊는 그 아픔 말이다. 아이를 만나는 순간이 곧 아이를 떠나보내는 순간이다. 물린 젖을 떼고 채웠던 기저귀를 떼고 혼자 걸을 수 있도록 발걸음을 떼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은 걸어 나간다. 내 품 안에서 밖으로 만 발씩 멀어져 간다. 그때마다 어머니의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기억
기억은 술과도 같아서 시간 속에서 발효하고 변질된다. 기억이란 결국 시간이 낳은 또 하나의 사생아일 뿐이다.
인간관계
인간관계는 부조리하다. 내가 잘해주려고 해도 어떤 때에는 상처를 주고, 상처를 주려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이 잘 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관계는 깜깜한 밤중에 날아오는 돌처럼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길
타인과 영원히 같이 걸을 수 있는 길이란 없다. 혼자 걸어야 하는 길, 미아처럼 울면서 혼자서 찾아다니는 길, 그것이 바로 고독한 인간의 자아일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