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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고 쓰기

1104. 동양 철학 에세이 2권(1)

(김교빈著, 동녘刊)

by 물가에 앉는 마음

1권 발간 후 21년 지나 2권이 발간되었다. 어쩌면 책 내용보다 저자의 집념, 출판사의 인내가 더 대단한지 모른다.


책머리에

“동양 철학 에세이 1권”이 진시황이 통일을 이룰 때까지의 제자백가를 다루었다면 이 책은 한나라의 통일 이데올로기를 만든 동중서부터 현대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한 모택동까지의 사상을 다룬 것이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21년이 걸렸다. 일찍이 2권을 쓰려했으나 내 스스로 익지 못했으니 늦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사이 40대였던 필자도 어느덧 60대를 넘어섰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부족하지만 우선 엮어 세상에 내놓는다.


동중서: 유가 독존 이천 년을 열다

동중서는 한무제에게 글을 올렸다. “대의명분을 가지고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 세상의 영원한 법칙이며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보편적 정의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이상한 주장을 펼치고 있으며, 제자백가 또한 방법과 뜻하는 것이 모두 다릅니다. 그래서 통치자는 통일을 유지할 수가 없고 백성들은 법과 제도가 자주 바뀌기 때문에 무엇을 지켜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제가 생각하건대 육예과목이나 공자사상에 맞지 않는 것은 모두 없앤다면 사악하고 치우친 주장들이 모두 사라질 겁니다. 그런 다음에야 기강이 하나로 통일되고 법률제도가 분명해져서 백성들이 좇을 바를 알게 될 것입니다.”

무제가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가를 높이고 다른 학문을 내쫓은 뒤부터 유가는 지배세력의 지원아래 정통학문으로서의 권위를 얻었다. 특히 무제는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같은 유가 경전마다 전문가를 들여 博士(박사) 칭호를 주었으며 이를 五經博士(오경박사)라고 한다. 오늘날의 박사호칭도 여기에서 왔으며, 박사는 학교를 만들고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또한 한마라는 유학을 익힌 사람들을 관리로 임명했으므로 이천 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유학과 정치의 연결고리가 완성되었다.


죽림칠현: 세상을 등진 영원한 자유인들

중국의 심장인 황하의 중간쯤에 하남성이 있다. 선사시대부터 황하는 역사의 중심이었기에 하남성 또한 중국문화 발상지중 하나로 번성했으며 수많은 역사적 인물을 배출했다. 노자, 법가사상가인 상앙, 과학자 장형, 시인 두보, 승려 현장, 장군 악비도 하남 인물이다. 竹林七賢(죽림칠현)도 하남출신으로 대나무는 군자의 절개와 겸허한 자세, 높고 우아한 기품으로 때 묻지 않은 선비의 상징한다.

이들은 세상을 등지다시피 하고 대나무 숲에 앉아 술을 마시며 고담준론을 나누었고 세상은 이들을 名士(명사)라고 불렀다. ‘널리 알려진 사람’, ‘이름난 선비’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본래는 竹林七賢같이 특수한 사람에 대한 호칭이었다. 명사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속세의 이야기가 아닌 맑고 깨끗한 이야기라 하여 淸談(청담)이라 불렀고 청담의 주제는 玄學(현학)이라 불렀다.

玄은 검다는 뜻으로 깊은 물이 한없이 검게 보이는 것처럼 玄學은 깨닫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학문을 의미한다. 玄學의 대상은 조자 장자 주역으로 이를 三玄이라 불렀다.


이처럼 죽림칠현은 명예니 이해관계니 하는 세상일을 떠나 유유자적하면서 좋은 벗들과 청담을 나눈 자유인들이었다. 그들은 이야기의 내용뿐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과 자세도 오직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판단했고 자신들의 기준에 맞을 때 비로소 명사로 인정해 주었다. 그래서 당시는 명사가 사람을 재는 최고의 가치기준이었고 명사로 인정받을만한 사람이라야 참다운 귀족으로 대접받거나 귀족과 왕래하고 혼인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해능: 깃발을 흔드는 것은 네 마음이다

집안이 어려웠던 혜능은 공부는커녕 나뭇짐을 해다 판 돈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겨우 먹고 살 정도였다. 22살 때 어머님께 하직을 고한뒤 5조 홍인대사를 찾아 배움을 청하곤 허드레 일을 하게 되었다. 홍인대사가 혜능을 6조로 삼은 후 달아나라고 했다. 혜능이 후계자가 된 것을 시기한 제자들이 혜능을 잡으러 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혜능은 15년간 숨어 살다 ‘바람과 깃발 문답’을 통해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혜능이 남해지방 이름난 선승 인종대사의 열반경 강의를 듣던 중,

마침 깃발이 바람이 불자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한 승려가 말했다.

‘바람이 불어서 깃발이 펄럭이네’

그러자 다른 승려가 말했다.

‘아닐세, 바람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저것은 깃발이 스스로 펄럭이는 것이라네.’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모습을 지켜본 혜능이 말했다.

‘바람이 깃발을 흔드는 것도 아니고, 깃발 제 스스로 펄럭이는 것도 아닐세. 오직 그대들의 마음이 깃발을 흔드는 것일세.’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놀라 한순간 조용해졌다.

이 이야기를 ‘풍번문답’이라고 부른다. 이 유명한 일화는 육조대사 혜능의 설법을 기록한 책 ‘육조단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만큼 혜능의 선문답인 셈이며 바로 이 문답을 통해 혜능이 중국 선종의 대표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인종대사가 ‘그대는 어디에서 진리를 얻었는가?’라며 혜능에게 묻자, 혜능은 홍인대사가 스승이라 답했다. 인종대사가 다시 물었다. ‘홍인대사께서 전하신 진리가 무엇입니까?’ 혜능은 열반경을 인용하면서 불교의 진리는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지 않는 것임을 설명했다. 혜능의 설명을 들은 인종대사는 합장하며 말했다. ‘내 열반경 해설이 깨진 기왓장이라면 당신의 설명은 순금입니다.’

혜능이 흥인대사에게 인정받았으나 사실 이때까지 혜능은 정식 승려가 아니었다. 인종대사는 혜능의 머리를 깎아주고 정식 승려가 되게 한 다음 오히려 그의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이때 혜능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조금 전까지 덕망 높았던 스님은 그의 제자와 함께 스스로 혜능의 제자가 되었다. 혜능은 한동안 법성사에 머물며 가르침을 주다가, 자신이 머물던 조계마을 보림사로 돌아갔다. 그 후 보림사에서의 가르침은 동아시아에서 으뜸가는 선종의 가르침이 되었고 오늘날 한국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뿌리가 되었다.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면서 혜능의 설법을 기록한 책을 ‘육조단경’이라 이름 붙인 것은 파격이다. ‘經(경)’이란 성인의 말씀을 기록했다는 뜻인데 혜능의 깨달음이 붓다의 깨달음과 같음을 의미하며 혜능의 설법과 부처의 말씀이 조금의 차이도 없다는 뜻이다.

육조단경에서는 배움이 전혀 없더라도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깨우치는 순간 모든 지혜가 완성된다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대부분의 종교는 성인의 말씀에 따른 교리를 익혀서 깨달음에 이른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러한 지식과 상관없이 일자무식이어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은 일반인들에게는 놀라움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선종의 이상을 보여준 최고의 경전으로 높여졌으며 부처님 말씀이 아님에도 유일하게 ‘經(경)’이란 이름이 붙을 수 있었다.


어느 날 비구니가 혜능에게 물었다. ‘그대는 글도 모른다며 어찌 진리를 안단 말이요?’ 혜능이 답했다. ‘진리는 하늘에 떠있는 달과 같지만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오. 달을 봐야 한다면 손가락을 볼 필요는 없지요.’ 선종에서는 이런 가르침을 불립문자라 하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한 문자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서 선종은 교종과 달리 부처님의 말씀을 모아놓은 경전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 깨달음이 달인데 멍청한 것들이 손가락에 불과한 경전만 본다는 것이 선종의 생각이다. 그래서 선승들은 글을 남기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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