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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 도전정신, 안전빵

‘모험’없이 돈 벌수 있는 사업은 세계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by 물가에 앉는 마음

대학 졸업 후 동기 중 일부는 공기업에, 다른 불특정 다수는 민간 기업에 취업했다. 공기업직원들에게 부족한 것은 도전정신이라 하지만 처음부터 도전정신이 부족한 동기가 공기업에 취업한 것은 아니었다. 기업문화와 근무환경이 후천적으로 사람의 성격을 바꾼 탓인데 공기업의 문화는 ‘도전과 진취’ 보다는 소위 ‘안전빵’에 가깝다. ‘私益(사익)’보다는 ‘公益(공익)’을 우선하는 기업설립 취지도 조직문화에 영향을 끼치게 되므로 업무스타일도 ‘보수적’, ‘안정적’으로 자리잡게 된다.

발전소를 운전하기 위한 연료 구입 시에도 ‘값은 헐하나 불안정한 공급처’보다는 ‘값은 비싸지만 안정적 공급이 가능한 거래처’와 계약 하게 된다. 민간 기업은 연료부족으로 발전 불가능 상태에 빠져도 양해되지만, 공기업은 연료부족에 의한 발전불가능상태에 빠지면 수요공급도 예측하지 못하는 무능집단으로 매도되는 것뿐 아니라 징계가 불가피하다. 물론 비싼 가격에 연료도입을 하게 되면 비효율적이고 무능한 공기업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도전과 진취’의 또 다른 표현은 ‘모험’이 될 텐데 ‘모험’이 용인되는 문화라면 공기업직원도 싼 가격의 연료를 도입할 수 있다.


R&D업무를 관장했을 때 가장 어려운 난제가 현장적용이어서 정부 고위관료들과 회의할 기회를 이용해 이 문제에 대해 건의했다. ‘쓸 만한 연구결과물이 나왔는데도 우리 회사가 발전설비를 보유하고 있으며 시범 적용할 Pilot Plant가 없다. 이것은 우리나라 산업계의 난제이기도 해서 신기술, 신제품을 개발해도 현장 적용할 기회가 없다. 발전중인 설비에 적용하려해도 해당 발전사, 발전소장이 발전소 정지위험 등의 사유로 신기술 활용을 꺼린다. 발전소 정지시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나서서 신기술, 신제품을 적용할 경우 발전정지가 유발되어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제도를 마련해 줬으면 한다.’

사실 공무원들 또한 ‘안전빵’ 문화에 길들여져 있어 쉽게 풀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건의 했다. 이 문제는 산자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기업 평가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기재부도 설득해야 하는 문제로 산자부 공무원이 기재부 공무원을 쫒아 다니며 설득할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답답한 마음에 이야기 해봤다. (* 수년이 지난 후 정부에서 불이익이 없도록 조치해줬다.)


GT정비기술센터가 보유한 로터벤딩 교정기술이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나 국내 경쟁사가 보유한 기술대비 효능이 있다. 하지만 실전경험이 많지 않은 것이 단점으로 외국 선진사는 100케이스가 넘었고 우리는 이제 걸음마 수준이지만 언제까지 실험과 연구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업화를 하겠다고 하자 여러 군데서 기술의 불완전성을 지적하며 사업화했을 때의 위험성을 이야기 했다. 실패했을 경우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고 했으며, 심지어는 굴러가는 낙엽도 피해가야 하는 제대말년에 뭐가 아쉬워서 그렇게 위험한 사업을 벌이냐는 애정 어린 충고도 있었다.

올해 로터벤딩 교정기술을 활용하여 20억 원 정도 매출을 올렸다. 특이한 내부구조를 갖고 있는 터빈에 대한 교정은 성공 하지 못했다. 임상경험이 부족한 탓이나 나머지 사례는 성공했고 시장가격도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런칭시켰다. 매출도 중요하지만 실전에서 실패와 성공의 임상경험 축적이 커다란 소득이었다. 기술진을 독려하여 ‘모험’ 했던 배경은 책임 배상보험에도 가입되어 있어 어느 정도까지 실패에 대한 금전적 담보가 되어있었으며 굴러가는 낙엽에 치어봐야 제대말년이 얼마나 다치겠나 하는 오기도 있었다.


정부의 제도적인 뒷받침에 대해 언급했지만 실무자들이 위험성을 느끼는 사유의 상당부분은 내부에도 있다. 아무런 탈 없이 성공했다면 이에 대한 보상은 없지만 실패했을 때의 비난을 온몸으로 막아내야 하며 금전적 손실이 발생된다면 징계가 수반된다.

- 그것 봐라, 내가 안 된다고 하지 않았냐. 정확한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모험하지 말라는 이런 부류의 목소리가 커진다. 반대 입장에서 이야기 하는 사람이 의미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면 언제나 환영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 교정실패로 페널티가 발생되어 금전적 배상뿐 아니라 윗분들이 고객들에게 아쉬운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되면 이에 대한 징계와 도의적 책임도 뒤따른다.

- 소위 ‘사고 친’ 사람이 승격대상자인 경우에는 징계 받는 것도 치명상이지만 사내에 정비실패사례 당사자로 널리 광고되는 불이익도 감당해야 한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된다면 더 이상 ‘모험’을 강행할 수 없으며 해당 사업을 영원히 접어야 한다. 이로 인해 ‘안전빵’문화가 고착되어 ‘중간’만 가려는 부류가 증가하며 이것이 조직문화가 된다. 회사 앞날이 어둡고 칙칙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승진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될 것 같다고 ‘모험’없이 ‘안전빵’으로만 갈 것인가? 담당자들은 소신에 따라, 기술자적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 하며, 회사는 사업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실패는 용인하고 넘어가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나 같이 더 이상 승격이 필요 없는 처장들이 선배로써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는 것도 필요하다. 공기업에서도 ‘안전빵’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어 이미 석양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험’없이 돈 벌수 있는 사업은 세계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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