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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가에 앉는 마음 Jul 18. 2024

893. 삶의 고수, 두 낚시꾼

지각생의 詩, 박남수

 자주 가는 유료낚시터에 가면 구석자리에 아무 생각 없이 앉아 낚시한다. 바닥이 고르지 않고 경사져 조황도 좋지 않은 자리지만 대부분이 꺼리는 자리이기에 한적하고 조용하다. 그날은 어르신들이 구석자리 부근에 먼저 앉아계시기에 지나가며 낚시꾼들의 의례적 인사를 건넸다. 

‘일찍 오셨어요?’ (많이 잡으셨어요? 와 함께 지나가기 멋쩍어하는 의례적인 인사다.)

‘아니 지금 왔어요.’ (1~2시간 전에 왔어도 지금 왔다고 한다.)

 낚싯대를 펴고 나니 인사 한마디 건넸다고 어르신들이 맥심 인스턴트커피를 타서 주며 말씀하신다. 

‘그 자리는 경사져서 입질이 지저분해요.’ 

본격적으로 낚시하기 전에 자리를 옮기라는 권고다. 

‘괜찮습니다. 물 보러 왔습니다. 커피 감사합니다.’

 단박에 그분들이 상당한 연배와 釣歷(조력)의 고수임을 알아차렸다. 종이컵에 인스턴트커피를 건네주시는데 커피 봉지로 휘휘 저어 주시는 모습과, 설탕과 크림이 가득한 맥심 모카골드를 남김없이 타셨기에 대략적인 연배를 알아차렸다. 다방커피 세대임에 분명했고 70대 중, 후반은 넘어 보이 신다. 또한 양어장 물밑 지형과 자리 특성을 알고 계시는 분들이니 단골조사이시며, 같은 길이의 낚싯대 2대 편 것이 전형적인 양어장낚시 솜씨다. 또한 찌맞춤 실력을 보니 수십 년 釣歷의 내공이 느껴진다.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으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 정상이지만 달달한 커피 한잔 얻어먹는 바람에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커피는 입으로 마셨으나 귀가 옆자리로 향하는 의도치 않은 도청이었다. 두 분은 87세와 85세 어르신으로 겉모습이 정정하시다. 연장자이신 어르신이 병으로 한동안 낚시를 하지 못하다 해가 바뀌고 최근에서야 나오신듯하다.

‘이제는 낚시하는 법을 잊어서인지 챔질 타이밍을 잡지 못하겠네.’

‘이 시간대는 입질 없어요. 그냥 물보고 있는 거지요.’

‘입질은 하는데 찌를 시원하게 올리지 않아, 깔짝거리기만 하고.’

‘토종붕어가 아니고 잉어와 붕어의 교잡종인 잉붕어라 그럴 거예요.’

여기까지는 여느 낚시꾼들의 일상적인 대화다. 입질이 까다로운 날에는 붕어 탓, 날씨 탓, 미끼 탓을 하지 본인 실력 탓은 하지 않는다. 


 어르신들 대화가 계속되었다. 과장되거나 허풍스럽지 않은 두 분만의 일상적인 잔잔한 대화였다. 

‘오랜만에 나오니 자주 보이던 사람들이 보이질 않아. 김 사장도 보이지 않고, 이 원장도 보이지 않아. 낚시터를 다른 곳으로 옮겼나?’

‘우리 연령대에서 보이지 않으면 요양병원 입원했거나 죽은 거예요. 말 많았던 이 씨는 작년에 죽었고요. 이 원장은 올 초에 죽었다고 하던데요. 김 사장 소식은 모르겠어요. 형님은 그래도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 이제 낚시 못하겠구나 했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

‘그렇죠. 우리는 죽기 전까지 부지런히 낚시해야 해요. 언제 죽을지 모르고 이제는 정말로 병원입원하면 끝이에요.’

 반나절 낚시를 끝내고 가면서 의례적인 인사를 드렸다. ‘많이 잡으세요!’ 두 어르신은 7~8시간 앉아 낚시하시는 것을 보니 아직 체력은 좋으신 것 같다. 아마도 내년 이맘때 또다시 낚시터에서 뵐 것 같다.


 죽음에 대해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연배가 되어서인지 두 어르신들 대화는 거부감도 없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물론 두 어르신이 돌아가실 연배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욕쟁이 할머니의 욕처럼 자연스럽다는 이야기다. 낚시 고수이자 삶의 고수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진 ‘죽음’이라는 단어가 그리 무겁지도 그리고 가볍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느낌이랄까, 연륜이 만들어낸 조화다. 

 퇴직 후, 인생과 죽음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몇 권의 책을 읽어 봤지만 ‘죽음’이란 단어가 아직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았다. 무겁고, 어둡고, 슬프고, 모습이 낯설다. 부인하고 거부해도 다가오는 것인데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된 탓이다. 


 두 분 어르신들의 대화를 듣고 최근 읽은 책 내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리 문화권에서는 죽음과 싸우고, 죽음에 저항하고, 죽음을 부정하는 것을 영웅적이라고 묘사할까요? 죽음은 왜 늘 무찔러야 할 적이나 모욕으로, 실패로 그려질까요? 저는 죽음을 삶의 반대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탄생의 반대에 더 가깝지요. 증명할 순 없지만, 저는 늘 죽음 저편에 뭔가가 있다는 확신을 느껴왔습니다. 때로는 뭔가 경이로운 모험이 저를 기다린다는 느낌마저 들어요.

 숨을 거둘 날이 오면 그날이 언제든 저더러 싸우라 하지 마세요. 오히려 제가 다 내려놓을 수 있도록 어떻게든 도와주길 바랍니다. 제 곁을 지키며 다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세요.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들을 다 기억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때가 됐을 때 제가 늘 원했던 끝이 어떤 것인지 기억할 수 있도록 당신의 열린 손바닥을 보여주세요.

 엘리사베트, 그대 아직 내 곁에 누워있지 않다면 얼른 침대에 올라와서 나를 안아주구려. 그리고 내 눈을 바라봐요. 내가 이생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게 당신의 눈이었으면 좋겠소 I may be wrong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著, 다산초당刊)

     

 좋은 죽음을 맞기 위해 어떻게 고통을 줄일 수 있을까 준비해야 합니다. 그다음은 원한 있는 사람들, 고마웠던 사람들 다 만나서 풀고 가야 하고요. 세 번째는 재산은 세상을 떠나기 전 정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준비해도 정말 중요한 것은 죽음을 정말 행복하게 맞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인데 그건 그 사람의 인격과 생애로 누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이란 게 마라톤 경기에서 결승선에 골인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마라톤을 시작했으니 결승선을 통과해야죠. 여기까지 최선을 다했다면 그다음이 무엇인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최선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게 아닐까요? 동물과 같이 죽음을 모르고 산다면 최선의 인생을 못 살지도 모르지요. 김형석의 인생문답 (김형석著, 미류책방刊)

     

 미국 사는 누이가 알려준 죽음과 관련된 詩(시)가 있다. 박남수시인(1918.05.03 ~ 1994.09.17)께서 76세로 돌아가시기 직전인 1994. 04.01 ‘小路’라는 제목의 시집을 발간했다. 친구들 다 떠나고 홀로 남은 외로움을 노래했다. 시집 발간 후 불과 5개월 만에 친구들 만나러 하늘나라로 가셨다.

     

지각생의 詩

     

나 보다 젊은 친구들

하나 둘 가더니, 이제는

무더기로 지는 가랑잎처럼

우수수 진다. 나는

언제나 지각생, 죽는 데도

지각생이 되었으니

염라대왕 앞에 가면

초다리 좀 맞을까 보다.

내가 난 달은 토러스

가장 게으른 별자리란다.

수영이 청마가고

지훈 목월도 가고

용래 봉건 종삼이 갔고

서둘러 상병이도 歸天하더니

이제 光均도 갔다는군,

약삭 빠르게 살작살작

빠져나간 술판처럼 허전하고

기운 빠진 소주 마시듯

싱겁게 혼자 남았는가베.

혜산 미당 슬쩍가면 어쩌나

게으른 지각생이

이제사 외로움을 느끼며

매달려 놓지 않을거라고

쭝얼거려 본다. 

                        - 박남수 (小路, 시와시학사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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