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품질을 자랑하는 독일이 왜 눈금을 그어놓지 않았는지?
손녀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 커피 내리는 빈도가 늘었으나 그라인더, 드리퍼, 여과지가 다르니 같은 원두라도 집에서 내리는 커피 맛과 다르다. 드리퍼와 여과지에 맞게 핸드그라인더 분쇄도를 조정하면 되겠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꾀가 나서 사용하던 장비와 같은 것을 한 세트 들여놓았다.
전동 그라인더는 Delonghi KG89를 구매했다. 조작이 간단하고 청소하기 쉬운 구조다. 가격도 합리적이며 성능도 준수하다. 단점은 그라인딩과정에서 정전기가 발생해 커피 컨테이너에 미분이 달라붙는 것인데 커피 맛에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Container에 달라붙은 미분을 굳이 떼어내 커피를 내리려 하지 말고 버리면 된다.
사용 중인 Delonghi KG79와 모든 제원이 같으나 외장만 다르다. 79는 외장이 플라스틱인데 반해 89는 일부를 무광 스테인리스스틸로 고급스럽게 꾸몄다. 시운전을 해보니 신품이라 소리도 부드럽고 잘 갈린다.
전동그라인더는 소리가 커서 층간소음 문제로 아침 일찍 사용하기 어렵다. 정숙해야 할 시간에는 핸드그라인더를 사용하고 소음에 민감하지 않을 시간대에는 전동그라인더를 사용할 예정이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싶은 것이 문제이기는 하다.
Dripper는 손녀집에서는 Kalita(사)제품을, 집에서는 CHEMEX(사)제품을 사용하는데 커피 내리는 속도가 서로 다르다. Dripper는 간단한 도구지만 커피 맛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구조가 상이하여 같은 분쇄도의 커피파우더를 사용하면 Kalita(사)의 커피추출속도가 1.5배 정도 빨라 묽고 싱겁게 추출된다.
CHEMEX(사)제품의 장점은 Dripper와 Server가 일체형으로 Dripper가 아닌 Coffee Maker로 관리하기 편하다. CHEMEX(사)제품은 Kono Type과 같이 중앙에 커다란 홀이 한 개 있으나 Rib가 없어(Rib역할을 하는 Air Channel이 한 개 있다.) 커피 내려가는 속도가 느리다. 대신 진한 에스프레소급 커피원액을 얻을 수 있다.
계속 사용하던 CHEMEX는 많은 장점을 갖고 있고 사용에 익숙하지만 단점은 추출된 커피가 모이는 Server에 눈금이 없어 추출된 커피 용량을 눈대중으로 어림짐작해야 한다. CHEMEX판매사에서도 본체에 Button이라 부르는 볼록한 배꼽모양의 돌출부가 있는데 그것을 기준으로 추출량을 가늠하라고 권하고 있다.
CHEMEX 커피메이커는 1941년 독일 화학자가 발명해 꽤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비이커, 메스실린더 같이 눈금 있는 기구를 사용하는 화학자가 발명했는데, 그것도 완벽한 품질을 자랑하는 독일에서 만들었는데 왜 눈금을 그어놓지 않았는지? 발명할 때는 그렇다 쳐도 80년 넘게 커피를 내려마신 사람들은 왜 눈금을 그려달라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연합군에 비해 우월한 성능의 무기를 갖고 있는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유는 ‘기술의 완벽성 추구’라는 장인정신도 한 가지 이유다. 성능이 떨어지는 무기를 사용하는 미국, 소련은 물량공세를 펼쳤지만 독일은 성능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출고시키지 않았다. 비행기, 전차, 기관총, 미사일 등 모든 무기의 성능이 정밀하고 우세했으나 연합군의 물량공세에 밀렸다.
CHEMEX는 기계로 제작한 보급형 Classic과 장인이 수작업으로 제작한 Hand Blown이 있다. 수작업으로 제작한 Hand Blown은 사이즈가 제각각이라서 눈금표시를 하지 않을 수 있다 해도 기계로 제작한 Classic에는 왜 표시를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500ml 용량을 기준으로 Hand Blown 23만 원, Classic 8만 원 정도 하니 눈금표시 정도는 해줄 만한 가격이다.
물론 커피를 추출할 때 시간을 기준(2분 30초 이내)으로 하면 굳이 눈금이 있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여러 가지 Server와 Coffee Maker를 사용해 봤지만 눈금 없는 것은 CHEMEX(사)제품이 유일했다.
CHEMEX(사)제품과 동일하게 생긴 중국산 짝퉁을 구입했다. 눈금이 그어져 있기에 편하다. 하지만 중국산은 짝퉁답게 어딘가 모르게 표시가 난다. 마감은 거칠고 모양은 조금 다르다. 그중 압권은 눈금 용량이 부정확하다는 것이다. 물 120cc를 따랐더니 200cc, 240cc를 따랐더니 400cc 눈금 표시와 맞는다.
틀린 눈금이지만 일관성 있게 틀리니 정확하다고 표현해야 하나? 보통 한잔 아니면 두 잔 용으로 120cc 또는 240cc를 추출하니 200/400cc 눈금에 맞게 추출하면 된다.
아무튼 중국산 짝퉁에는 앙큼하게도 눈금 표시가 되어있다. 외양도 비슷하고 눈금이 그어져 있으니 커피 내릴 때 아주 유용하다. 진품 CHEMEX가 가품에게 배워야 할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