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가자!”
작년에 열린 탁구대회에서 경품으로 서귀포 호텔 숙박권이 등장했을 때 이곳저곳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같은 제주도 내에서 숙박권이 별거랴마는 그래도 제주시에 사는 우리에게 서귀포는 특별했다. 우리 탁구장 누구도 숙박권에 당첨되지는 않았지만, 서귀포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우리 마음 구석에 자리 잡았다.
한라산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산남’이라 불리는 서귀포는 관광의 도시이자 여유로움의 도시다. 제주도청을 비롯해서 대부분 기관, 학교, 편의시설이 ‘산북’인 제주시에 집중돼 있다. 그러다 보니 인구수도 2배 이상 차이가 난다. 생활권으로 제주시를 선호하기에 직장에서는 ‘제주시 지역 만기’라는 단서를 달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서귀포로 발령을 낸다. 어떤 곳은 처음부터 제주시, 서귀포시 구분해서 직원을 뽑기도 한다. 육지 사람들이 보기에는 1시간 정도의 거리에 똑같은 제주도 같지만, 토박이 제주인에게는 제주시와 서귀포시가 한라산을 사이에 둔 애틋한 동상이몽의 도시다. 누군가가 서귀포에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겼다고 하면 ‘뭐? 서! 귀! 포!’라는 놀라운 반응을 보인다. ‘조심히 잘 다녀와’라는 걱정 섞인 말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지난번 서귀포에서 열린 ‘서귀포시장배 탁구대회’에 출전했을 때다. 대회장에서 마주친 다른 동호회에 언니에게 물었다. “오늘 언니네 동호회 회원들이 별로 안 보이네요?” “응, 우리 구장에서 오름부만 대회 신청했어. 서귀포 멀! 어! 서!” 나는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서귀포 너무 멀어요. 저희 구장도 평상시 반 정도 신청했어요” 제주시 탁구장에서 서귀포 대회장까지는 인터넷 길 찾기로 자동차 소요시간 58분이다. 제주인에게 제주시와 서귀포시는 시간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가 확연히 다른, 가깝고도 먼 그런 곳이다.
그런 서귀포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떠나고 싶은 마음, 신선한 콧바람의 끌림 때문인지 올해 8월 드디어 작년 그날의 탁구 초보 오름부 여자 셋은 서귀포행 탁구원정을 준비했다. 3명이 가능한 날짜가 정해지자 숙소를 검색했다. 숙소는 서귀포 시내와 가깝고 원정 갈 탁구장과도 근거리인 서귀포 올레 시장 이중섭 거리로 정했다. 대회에서 매번 초보 그룹끼리 게임을 하면서 알게 된 서귀포 탁구장 동생과 사전 연락을 했다. 주말이어도 그곳 탁구장 문은 열려있겠지만 우리와 같이 탁구 쳐줄 사람이 필요했다. 서귀포 동생은 우리의 프로젝트를 반기며 주말에 올 수 있는 회원들을 모집하겠다는 의지를 알려왔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첫날은 서귀포 동생네 탁구장에서 탁구를 치고, 다음 날은 서귀포에 새로 생긴 ‘탁수인 탁구장’에 들려서 구경하기로 했다. 하지만 국내 최고의 관광 도시 ‘서귀포’를 가는데 탁구만 치고 오기에는 아쉬웠다. 계획은 변경됐다. 둘째 날은 육지에서 내려온 관광객 모드로 다니기로. 여행자라고 추측할 수 있는 복장에 태양을 피하기 위한 선글라스를 쓰고 여행지의 낯섦 속에 자유로움을 한껏 느껴보기로.
한 시간을 달려 서귀포에 도착했다. 서귀포 에이스탁구장은 3층 건물 2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3층 건물인데도 엘리베이터가 있고 외관도 깨끗한 것이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탁구장 문을 열자 환한 시야 속, 경쾌한 탁구공 소리가 들렸다. 평상시 반지하 탁구장에 익숙했던 내게 2층에서 바라보는 시원한 창밖 풍경은 한라산에 오른듯한 기분마저 주었다. 탁구장은 레슨실이 따로 있고, 그 옆쪽으로 일반 탁구대 6대가 일자로 길게 놓여있었다. 열 명은 족히 넘는 사람들이 탁구를 하고 있었다.
우리 도착에 맞춰 서귀포 동생이 양손 가득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렁주렁 들고 왔다. “언니들! 시원한 커피 드세요. 회원님들 커피 드세요!” 대회 때 얼굴 몇 번 본 게 전부인 동생인데 이런 격한 반김에 입이 벌어졌다. 그곳 회원들 역시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었다.
놀이터에서 처음 본 아이들과 뒤섞여 술래잡기하는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그곳에서 첫인사를 나눈 후 게임을 시작했다. 우승자를 결정해야 할 대회도 무언가를 건, 내기도 아닌, 그냥 어른들의 놀이였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환호성과 즐거움이 파도타기처럼 서로에게 전파됐다. ‘게임에서 이기면 기쁘고, 행복할까?’라는 질문은 그곳에선 의미 없어 보였다. 탁구 라켓을 잡은 모두가 태초에 같은 동족일지도 모르는 알 수 없는 연대감 속에 모두가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