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주에 산다. 제주 토박이 부모님 밑에서 나고 자랐다. 어릴 적 엄마, 아빠와 해안가 근처 봉우리인 사라봉 둘레길을 걷다가 조금 더 걸어 옆 동네 화북동 해안가로 난 길로 들어설 때면 아빠는 아무것도 없는 휑한 곳을 가리키며 저곳에 마을이 있었다고 했다. “마을이 어디 있어? 아무것도 없는데요” “옛날에 있었다. 4.3 사건 때 군인들이 마을을 불태워서 흔적이 없어진 거야.” “사람들은요? 집도 없는데 어디서 살아요?” “다 죽었어. 단체로 학살당했지. 살려고 도망친 사람들은 한라산에 올라가 숨었어. 이유가 없었어. 폭도라고 하면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폭도고 폭도 가족인 거야. 죄다 빨갱이 취급을 한 거지. 그때 죄 없는 사람들이 많이 죽었단다” 1944년생인 아빠는 자라면서 주위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곤 했다. 그때 난 마을이 하룻밤 사이에 통째로 사라졌다는 게 신기할 뿐, 죽음이 주는 의미에 대해 특히, 억울한 죽음에 대해 알지 못했다.
불타버린 마을과 학살의 이야기가 나에게서 희미해지는 사이 ‘4.3 특별법’이 생기고, ‘제주 4.3 평화기념관’이 개관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커졌다. 학교에서는 4.3 교육을 하고, 교육청에서는 매년 4.3 행사가 진행됐다. 그러던 중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소식을 듣게 됐다. 4.3 사건을 다룬 그녀의 작품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해서도. 역사는 인류가 성장·발전하기 위해 되새겨야 할 의미의 문화지만 난 역사를 스토리로 다룬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전쟁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사건들을 다룬 소설은 더욱 그렇다. 소설이라면 아무리 슬픔과 비탄에 가슴이 먹먹해져도 허구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내 안의 울음을 잠재울 수 있지만, 아픔의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은 비록 허구의 주인공들이지만 그 배경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에 좀처럼 무거워진 마음이 떠나지 않아서다.
오래지 않은 비극적 역사의 기억으로부터 길어올린, 그럼에도 인간을 끝내 인간이게 하는 간절하고 지극한 사랑의 이야기가 눈이 시리도록 선연한 이미지와 유려하고 시적인 문장에 실려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 ‘작별하지 않는다’ 책 소개 중-
하지만 ‘인간을 끝내 인간이게 하는 지극한 사랑의 이야기’라는 ‘작별하지 않는다’의 책 소개는 내가 책을 읽을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17살인 언니와 13살의 엄마가 심부름 다녀온 사이, 엄마의 아빠, 엄마, 오빠, 8살 동생이 학살됐다. 어린 자매는 눈 덮인 보리밭에서 가족의 유해를 찾았지만, 오빠의 유해는 찾지 못했다. 그때 13살이었던 엄마는 자라면서, 학살 현장에서 수습하지 못한 유골, 혹시나 어딘가 살아 있을지 모르는 실종된 오빠를 찾기 위해 그날의 흔적을 쫓는다. 그러던 중 엄마는 4.3 사건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아빠를 만나 결혼했고 인선을 낳았다. 8년 전 서울 생활을 접고 제주로 내려간 딸 인선은 4년간 엄마 곁에서, 마침내 아픈 엄마를 떠나보내며 자신이 공포의 그날에 있었던 것처럼 엄마의 기억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 후 인선은 엄마가 축적해 둔 많은 학살의 자료들 속 오래돼 삭아 부서지는 신문 속 기사를 보며 엄마가 평생 품고 살았던 아픔의 조각을 맞추고 있었다. 폭력과 공포로 가득했던 그날의 흔적이 자신의 것인 것처럼 수천 개의 정강이뼈, 수천 개의 해골, 수만 개의 늑골 더미, 중(中) 자가 새겨진 교복 단추들의 사진들을 보며 과거를 더듬고 있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또 한 사람. 인선의 친구 경하. ‘작별하지 않는다’는 경하의 시선으로 풀어나가는, 인선과 인선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가족의 사랑 이야기였다.
우리에게 4.3 사건은 문헌으로, 어른들의 이야기로, 교육으로 알게 되는 역사다. 하지만 인선 어머니에게는 아빠와 엄마, 자신의 피를 먹여서라도 살려내고 싶은 8살 동생, 끝까지 찾아내 만나야만 하는 오빠의 이야기다. 그녀의 이야기는 거대한 역사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며 더 빛을 발한다. 아마도, 아픈 역사이기 이전에 내 이웃의, 내 친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리라. 4.3 사건이라는 불행한 역사 속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삶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작가는 전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어떤 사회적 폭력에도 가족과 작별할 수 없다는, 작별하지 않겠다는 다짐. 가족을 향한 끝없는 사랑을 말이다.
그 시대를 살았더라면 나는 인선의 어머니일 수도, 어머니의 8살 동생일 수도, 사살되어 갱도로 떨어진 어머니의 오빠 일수도, 어쩌면 누군지 모를 가해자였을 수도 있다. 사실적인 학살의 장면 속에도 섬뜩하지 않고, 죽음의 오싹한 공포보다 연민과 안타까움이 먼저인 건, 지금 내가 사는 세상과 소설 속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안타까움과 먹먹함의 여운은 다른 시대 속에 현재를 사는 나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 삶에 대해 질문하게 했다. 제주인에게는 4.3 사건이 과거 아픔의 역사지만, 현재의 우리가 그로 인해 삶의 의미를 되돌아볼 수 있는 교훈의 역사가 된다면 과거와 현재를 통해 미래의 우리 후손에게는 그 아픔 또한 선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에게 ‘작별하지 않는다’는 고통스러운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이기 이전에 나의 이야기일 수 있는, 가슴속에 쿵 하고 파장을 일으키며 현재에 감사하게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