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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이 Apr 09. 2022

배추흰나비의 추억

시암제를 하면서

오늘은 시암제(始巖祭)가 있는 날이다. 도봉산 입구에서 등반 친구들을 만나 우리는 시암제를 지낼 장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내가 등반에 참석한 것은 지난해 가을 도봉산'배추흰나비의 추억' 등반 중 추락사고 이후 딱 6개월 만이다.

"오늘의 꽃은 선규야. 선규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올해 등반의 질이 좌우된다고 봐야지."

옆에서 걸어가던 등반대장이 말했다.

그동안 등반대장은 선규를 선등 등반자(등반할 때 맨 앞 선두에 서서 암벽에 자일(밧줄)로 생명선을 설치하여 뒤에 따라오는 대원들이 안전 등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자)로 교육시켰고, 선규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등반대장의 교육을 잘 따라주었다고 했다. 선규가 선등 연습을 많이 하고 있다는 소식을 간간히 들었었지만,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선등으로 내세울 것이라는 계획을 들으니, 그렇게 금방 선등에 선다는 것은 좀 빠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하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선규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는 상자를 들고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뒤에 처지는 일행을 기다렸다가 조금 뒤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은 아담하고 양지바른 장소였다. 삼월이라 바람이 차갑기는 했지만 따뜻한 햇살이 있고 바위가 바람을 막아주듯 서 있어 시암제를 지내기에는 딱 좋은 곳이라며 다들 좋다고 했다.  먼저 암벽장비들을 제단 옆에 쌓아두고, 가지고 온 제물들을 접시에 정갈하게 담아 내놓으며 진설한 뒤 진지하고 담담하게 시작했다.

 우리는 시암제를 지낸 후. 오늘 정복할 바위 앞에 섰다.  1 피치(마디) 구간으로 형성된 거대한 암벽이 눈앞에 있다.  대원들은 가지고 온 암벽장비를 들 꺼내어 착용하였다. 난 구경만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한발 물러나 바위가 잘 보이는 쪽으로 옮겨 앉았다.  등반대장의 지시에 따라 선등은 선규로 정해졌다.  선규가 왼손으로 오른 손가락들을 감싸 쥐고 꾹꾹 누른다.  손을 떨고 또다시 반복하며 다섯 손가락 관절들을 정성껏 풀면서 눈앞에 떡 버티고 서있는 거대한 바위를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 계산이라도 하는 듯 쏘아보고 있다. 잠시 후 그가 마음을 굳혔는지 바위 앞에 바짝 붙어 선다. 그리고 오른쪽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아 붙인 다음 가습 앞쪽 바위를 잡았고, 반대편 손은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머리 위에 돌기처럼 돋아있는 바위를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두 발도 바위 위에 올라선다. 마치 거미 한 마리가 붙어있는 듯 보였다. 순간 작은 숨소리조차 멈춘 듯 조용했다. 지켜보고 있던 대원들은 그의 손과 발에 눈을 모아다. 작은 몸짓 하나에도 함께 집중하고 함께 숨을 쉬어야 할 시간이었다.   선등자는 최선을 다해 집중해서 한 발 한발 나아가야 하고, 대원들은 등반자가 집중할 수 있도록 잡답을 금지하고 눈으로 등반길을 익혀야 한다.

 널따란 바위가 수직으로 서 있다.  표면은 까슬까슬 모래알이 섞인 듯 거칠어 보였는데, 홀더(손이나 발로 잡을 만한 홈)가 별로 보이지 않고 매끈하다. 70도의 경사도로 길이는 30~40미터쯤 되어 보였다. 이런 바위를 등반 용어로 슬랩이라고 말한다. 슬랩은 바위에 홈이 거의 없고 매끄럽다. 그래서 손톱으로 바위를 긁듯 미세한 홈을 찾아 잡고, 발바닥과 몸을 최대한 밀착해서 몸의 무게중심을 최대 한 넓게 분산시켜야 한다.  그리고 손가락들을 모아 첫째 마디 부분에 최대한 힘을 응축하여 바위를 힘껏 누르며 바짝 붙이고 그 힘을 엄지발가락 끝으로 연결하여 사용하며 등반해야 한다.  그래서 경험이 많은 등반자라도 몹시 까다로운 코스라고 말을 여러 번 들어서 인지 더욱 긴장하며 지켜보았다.

 선규는 지켜보는 가운데 10미터쯤 기어올라 첫 번째 볼트(등반 중 안전을 위해 바위에 박아놓은 동전만 한 고리)에 퀵도르(볼트와 자일을 연결하기 위한 등반장비)를 걸고, 그 바위 위에서 떡하니 상체를 젖히고 버티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강인한 모습이 바위와 한 몸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그가 다시 바위에 붙어 오르기 시작했으나, 일 미터쯤 올라간 후론 그 자리에서 거의 멈추어 있는 것 같았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장순이가 일행을 둘러보며 눈앞에 바위의 실체를 훤히 다 꿰고 있다는 듯 말했다.

"지금까지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바위가 살아있어서 큰 문제는 없었는데, 지금부터가 힘들 거야. 나도 두 번인가 미끄러지다가 성공했으니까."

장순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규가 쫘르르르 추락하는 것이 보인다.

"어. 어. 어!"

지켜보는 대원들의 놀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만세 자세로 바위를 더듬으며 가볍게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그리고 바위 중간에 대롱대롱 매달리는가 싶더니 다시 기어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그럼, 그렇지."

선규가 경쾌하게 물방울이 툭 튕기듯이 제자리를 찾아 다시 오르는 것을 보며 장순이가 실망하지 않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이번엔 성공하겠지 하는 대원들의 간절한 마음과는 아랑곳하지 않고 또 순식간에 추악이다.  그리고 또다시 도전.  이번에는 돌멩이가 튀듯 툭 툭툭 거칠게 떨어졌다.  힘이 점점 빠져서 몸의 중심이 흐트러지고 있는 것이다. 부상이 예고되는 모습이었다. 손가락이 성하지 않을 ㅓㅅ라고 걱정하는 소리도 들었다. 난 갑자기 바위에 붙어있는 선규가 개미처럼 한없이 작아 보였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길을 내어주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바위의 위엄도 느껴졌다. 바위는 강하고 거기에 비하면 한없이 약한 인간의 도전이 눈물겹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쯤 해서 지켜보는 대원들도 선규가 그만 포기하고 내려오기를 바랐는지 여기저기서 술렁거렸다. 급기야는 등반대장이 소리쳤다.

"안 되겠으면 내려와!"

그러나 선규는 다시 기어올랐다.  지나가던 등산객들도 두서넛씩 모여서 웅성거렸다.

"이야, 암벽등반 하나 봐. 어떻게 저길.... 대단하다."

선규는 바위와 사투를 벌이고 있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한동안 시간이 멈춘 듯 조용했다. 그리고 거미처럼 바위에 바짝 붙어 고지에 가까이 다가가는 선규의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성공이다.

"와! 와! 와!"

환호성 소리와 함께 박수소리도 들렸다. 숨죽이고 바라보고 있던 대원들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여섯 번째에 성공하다니, 대단한 놈이야!"

누군가의 소리도 크게 들렸다.

내 안에서도 잠잠했던 피가 온몸으로 빠르게 돌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지난해 가을. 그러니까 암벽을 시작한 지 2년째 초가을이었다. 적벽(설악산에 있는 붉은 바위)을 만나러 가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아직 초보 딱지를 떼지 못한 나로선 분에 넘치는 제의였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설악산 첫 등반(한 편의 시를 위한 길)에 갔을 때 눈앞에 우뚝 솟아있는 범상치 않은 붉은 바위(적벽)를 보고 멋진 모습에 그만 반하고 말았었다.  그리고 언젠간 등반기술을 익혀 꼭 올라가 보리라 마음속에 꼭꼭 접어 숨겨 두었던 그 적벽을 만나러 가지 않겠느냐는 제의는 말로만 들어도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다. 그곳을 가려면 무엇보다도 내 몸을 단단히 준비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체력이 좋아야 한다는 말을 제일 많이 들었으므로, 먼저 체중을 줄이며 체력을 기르는 일에 주력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저녁식사를 반으로 줄이는 것으로 체중조절을 시작했고, 체력을 키우기 위해 주말이면 도봉산으로 북한산으로 달려가 등반을 하며 힘들 때마다 아름다운 적벽과의 만남을 생가하며 참아 냈었다.

 그날도 도봉산 자운봉 아래에 연결되어 있는 '배추흰나비의 추억' 등반길에 두 번째로 나가게 되었었다.  등반은 등반대장 포함 4인으로 단출하게 시작되었다. 등반길은 총 일곱 피치(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등반대장이 선등에 서고 첫 번째 피치, 두 번째 피치, 세 번째 피치를 순조롭게 등반하고, 네 번째 피치 앞에선 앞서가는 팀들의 등반 모습을 지켜보며 잠시 쉬었다.

 멀리서 도봉산을 보며 커다란 바위 서너 개가 어깨를 나란히 우뚝 우뚝 솟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일 높이 만장봉이 보이고, 그 앞에 선인봉, 그리고 옆으로 자운봉이 보였다. 나는 자운봉 아래로 연기봉으로 연결되어 있는 암벽길 '배추흰나비의 추억' 4 피치에 서 있다.  오른쪽으로 포대능선과 아직 개척되지 못한 넓은 바위 두 개도 보인다.  이쪽에서 알록달록 사람들의 움직임이 마치 봄에 소풍 가는 아이들이 줄지어 가는 것 같다고들 말하는데, 그쪽에서는 이쪽을 보며 우리들을 까맣게 개미처럼 붙어 있다고들 말한다. 서로가 본 대로 느낀 대로 이야기하며 웃는다. 왼쪽 아래에서 강하고 짧게 외치는 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여기에선 사람들이 보이지 않지만 선인봉과 만장봉의 크고 작은 등반루트에서 땀방울을 흘리며 암벽 등반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한참 후 우리는 네 번째 피치를 정복하고 다서 번째 피치를 지나 여섯 번째 피치 앞에  섰다. 지난달에도 이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에는 등반대장이 갑자기 사정이 생겨 빨리 하산해야 한다고 하여 옆길로 빠져나와 등반을 포기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더 오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상했다. 언제부턴가 어려워 보이는 피치를 만나면 무섭기보다는 가슴이 먼저 설레었다.

앞에 등반대장이 선등 하는 모습이 보인다. 꼭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지켜보았다.  선등 등반대장은 작은 추락을 몇 벙이나 하면서 힘들게 성공하여 자일을 내려주었다. 첫 번째로 선등 빌레이(선등자가 안전하게 등반할 수 있게 자일을 잡아주고 추락사고를 예방하는 사람)가 올라가고, 내가 두 번째로 올라가가 되었다. 나는 십 미터쯤 오르다가 앞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어 머뭇거리다가 옆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작은 홀더를 가까스로 잡으려다 놓쳐 순식간에 미끄러지고 말았다. 추락하는 순간 자일이 눈앞에서 느슨하게 출렁이는 것을 보았고, 그 순간 얼마쯤 떨어질까 계산이 되지 않아 아찔했었다.  추락은 5미터쯤 떨어지다 자일이 팽팽해지면서 멈추었다.  다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다 생각하며 다시 바위에 왼발을 딛고 올라서려다가 깜짝 놀라 발을 떼었다. 발을 디딜 수 없을 만큼 무척 아팠다. 발이 브르르 떨면서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  난감했다. 아래에서 다음 등반 차례를 기다리는 일행의 걱정하는 소리도 들렸다.  당혹스러운 이 순간을 어떻게든 모면해야 한다는 생각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발을 디딜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곳으로 조금 이동하여 한 손은 자일을 잡고, 한 손으로 암벽화를 벗겨 하네스(암벽장비를 걸을 수 있는 벨트)에 걸고 바라을 주물렀다. 그리고 괜찮다고 걱정한 ㄴ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안심시켜주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엄지발가락 쪽에 힘을 가해도 참을 만했다. 하지만 발목과 발뒤꿈치 부분은 시큰거려서 디딜 수가 없을 만큼 아팠다.  나는 발목을 최대한 자극하지 않고 앞쪽 발바닥만을 사용하여 남아있는 등반을 가까스로 마쳤다. 정상에 섰을 때 멀리 인수봉 쪽에 사고가 있었는지 헬기가 북한산을 뱅뱅 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음날 아침. 발목이 많이 부었고 걸 수 없을 정로로 아팠다. 정형외과 선생님은 발목 인대가 늘어난 것 같다며 3주 깁스 진단과 함께 목발 사용법을 가르쳐주었다.

왜 추락할 때 부상으로 이어졌을까? 등반 중 추락은 간혹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렇지만 그날은 예상보다 긴 추락이었다.  있을 수 없는 사례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그때 빌레이는 뭐 하고 있었을까? 그래도 이만하기 천만다행이지. 이런저런 상황을 곱씹으며, 그날 나를 빌레이 했던 대원을 원망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몸 고생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나에게 "너를 빌레이 해준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느냐. 그러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등반을 했어야 했다."는 등 내 추락사고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라며, 있을 수 없는 부상이라며 주변에선 내 정곡을 콕콕 질렀다. 발목보다 마음이 더 아픈 시간들이었다.

 그러다가 시난이 지맘에 따라 발목은 차차 좋아졌다. 마음의 상처도 좀 편해지면서 그날의 상황을 수없이 되짚어 보면서 일차적인 잘못은 나한테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등반하면서 빌레이와 소통하지 않았다는 것, 그 순간 자일이 늘어져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큰 요인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간과하였던 것이었다.  그것은 자만이었다. 어쩌면 그날 사고는 더 큰 사고를 막기 위한 경고 내지 일침이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암벽 등반하면서 위험했던 순간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순간순간 아찔하게 모면했던 장면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려 섬뜩섬뜩 소름으로 돋아 나왔다.


선규가 선등을 마치고 정상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등반 준비 완료!"

자일이 바위 위에서 꿈틀거리며 내려오는 내려오는 것이 보인다.

 나는 주먹을 꼭 쥐고 벌떡 일어나 바위를 향하여 걸어 나갔다.

'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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