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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연 Mar 15. 2023

나를 행복하게 하는 말

<미움받을 용기>처럼, 현재를 긍정하기


"오늘은 왠지 평온한 느낌이네요. "


오늘 아침 둘째가 안방 창문을 열며 베란다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내고 있는 나를 보고 한 말이다. 아이는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니?"

"그냥 왠지 오늘은 그런데요."

"그럼 다른 날은 평온하지 않았단 말이야?ㅎㅎ"


둘째의 평온하다는 말에 기쁜 마음이 듦과 동시에 그럼 다른 날은 어땠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확인하기 좋아하고 의심 많은 엄마인지라 이렇게 물어보고 나서 아차 싶었다. 어쨌거나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이런 말을 아침부터 듣다니 왠지 아이에게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덕분에 아침을 먹는 둘째를 보며 아이의 어렸을 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마침 내일이 남편의 생일이어서 아빠의 얘기도 더불어 이어졌다.


"너 어렸을 때 어린이집 갈 때 기억나? "

"기억 안 나요."

"아빠가 출근길에 너 데려다주면서 진짜 마음 아파하셨어. 매일 어린이집 앞에만 가면 울었었는데."

"그래요?"

"막내가 엄마 뱃속에 있어서 엄마가 힘들어서 네가 어린이집을 좀 일찍 갔지."



뱃속의 셋째를 핑계로 어린이집에 둘째를 일찍 떼어놓은 게 미안해서 꺼낸 말이다.

이번에 고1이 된 둘째는 나와는 성격이 너무도 달라서 내 딴에는 참으로 버겁다 느껴지는 아이였다. 6살 때인가 어린이집에서 재롱잔치를 하는데 뭐가 맘에 안 들었는지 다른 모든 아이들이 무대에서 화음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데, 입을 꾹 다물고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아이였다. 황당하고 민망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오히려 선생님께서 당황해하시며 엄마인 나에게 미안해하셨던 기억이 난다.


합기도를 보내 놨더니 한동안은 합기도도장 앞 계단에 앉아 있다가 오기도 했다. 초등저학년 때는 담임선생님께 죄송했던 기억이 있다. 상담을 하러 갔더니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고충을 이야기하셨다. "활동을 하라고 시키면 다른 아이들은 다 열심히 하는데 OO 이는 끝까지 안 하고 가만히 있어요. 아무리 달래고 채근해도 소용없어요. 자기가 내켜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놔두고 있어요." 죄송스러운 마음 가득한 채 나는 "아이가 고집이 세서..... 죄송한데 조금 기다려주시면 나아질 거예요."라며 고개를 숙였다. 5학년까지는 학년 초에 이런 상담을 하러 선생님을 뵈러 가곤 했던 기억이 있다.








성격이 급하고 학습의 결과가 중요했던 나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아이가 따라오지를 않으니 힘들어서 싫은 내색을 참 많이도 했었다. 뭘 하나 시키려면 내 안의 에너지를 다 쓰고도 아이는 요지부동인 탓에 '뭐가 문제일까? 왜 아이가 이 모양일까?'를 참 많이도 고민했었다. 등짝 스매싱에 협박성 멘트는 기본이고 때로는 너무너무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발로 엉덩이를 차기도 했다. 그렇게 무섭고 까칠한 엄마였다. 엄마표 영어도 중도 포기, 수학도 함께 풀다가 역효과가 날 것 같아 중단하고 학원을 보낸 게 중1이었다. 중학교 과정까지는 함께 공부해야 한다는 강박? 이 있었던 나는 아이와 했던 많은 것들을 실패했다고 생각하며 씁쓸해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아이는 크고 있었다. 친구들은 잘 사귀는지 걱정스럽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내성적인 아이였는데, 고1이 된 지금은 고등학교에서 즐겁게 잘 지낸다고 했다. 내성적인 것은 여전하지만 특유의 여유로움과 자존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합기도도 축구도 어려웠던 아이에게 그래도 꾸준히 운동을 시켰더니 지금은 농구클럽 대표팀으로 재미있게 운동도 하며 앞으로도 계속 다니겠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큰 아이 사춘기 때 아이와 거리를 두면서 두 살 터울인 둘째로부터도 적당한 거리를 찾으려고 했었던 것 같다. 아이에게서 떨어져 지켜보는 시간이 쌓일수록 아이는 더 안정이 되었던 것일까. 내가 간섭하고 밀고 당기고 하던 시간보다 혼자 크는 시간이 더 많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입에서 나온 "평온"이라는 한 단어가 가져온 온화한 기운에 아이들과 함께 복작복작 지냈던 나의 젊은 엄마 시절을 떠올려 보니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면 하지 않을 행동들을 그때는 무심코 혹은 일부러 하거나 으름장을 놓으며 상처를 주는 말도 많이 했었다. 엄마로서 단속을 잘한다고 했던 것들이 아이에게 지나친 강요와 협박이 되어 아이가 눈물을 흘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아이는 지금도 크는 중이어서 가끔씩 나의 레이다에 걸리는  행동들에 대해서는 내 잔소리 또한 끝이 없지만, 이제는 조금 부드럽게 넘어갈 줄도 안다. 하루는 둘째가 엄마의 잔소리로 만든 유튜브송이 재밌다며  영상을 틀어주는데,  만화 속 잔소리를 쏟아내는 엄마 모습이 너무 재미있었다. 세상의 엄마는 다 그렇게 똑같은 건지, 나의 모습과도 꼭 닮아 있어서 한참을 웃었다.



"OO아, 있잖아. 옛날에 엄마가 너한테 막 뭐라 그러고 큰소리내고 막 엉덩이 발로 고 그런 거 말이야, 혹시 마음에 너무 안 좋게 남아 있니? 그럴까봐 엄마는 그게 걱정이다."


얼마 전에 쑥스러운 마음으로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했더랬다.


"아니, 괜찮은데요." 아이는 나의 눈을 바라보며 괜찮다고 얘기해 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아이는 현재를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순간 나에게 너무나 큰 위로가 되었다. 아이를 위한다고 했던 것들이, 결국에는 나의 욕심은 아니었는지, 내가 참지를 못해서 아이에게 그토록 싫은 티를 낸 것은 아니었는지 고민하던 차에, 아이에게 던진 물음은 그렇게 엄마에 대한 한없는 믿음으로 되돌아왔다. 


지금의 나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려고 할 때 그 사람의 과거는 어떤 톤으로 물들게 될까? 답은 하나, 즉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이렇게 되어 다행이다라고 결론 내리게 되지... 우리의 세계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과거 따위는 존재하지 않네. 열 명이 있으면 그 열 명이 각기 다른 지금에 의해 채색된 각각의 해석이 있을 뿐이지. 과거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네. <미움받을 용기 72쪽>


최근에 읽었던 <미움받을 용기>의 내용을 자주 떠올린다. 현재에 의해 채색된 각각의 해석으로 존재하는 과거,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심리학자는 말한다. 그러니 지금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아들러의 주문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다.


아이의 '평온하다'는 말이 엄마의 마음마저 평온하게 만들어준 행복한 아침에 감사하다. 한 마디 말에 오늘 은 꽤 맑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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