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들
얼마 전 읽은 소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 보면 꼬마 마이클과 외할머니의 대화가 나온다.
"부끄러워도 돼요. 부끄러운 건 귀여운 거예요. "
"마이클은 다정하구나."
"맞아요, 엄마가 그랬어요. 마이클은 너무 다정해, 한국 할머니처럼."
"정말?"
“근데 너무 다정한 건 나쁜 거래요.”
평생을 가족에게서 상처만 받아왔던 할머니는 손주의 대답을 듣고 자신을 떠나지 않은 과거 상처를 떠올린다. 할머니는 자신의 다정함이 때로는 딸에게 유약함과 동일한 단어로 비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작고 연약한 아이의 ‘다정’이란 말로부터 잔잔한 위로를 받고, 자신이 아이와 연결되어 있음에 안심한다.
“다정도 병이다”란 말이 있듯이, 정이 많은 사람은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으나, 어쨌든 나는 다정한 사람이 좋다. 마음을 그대로 내보이다 보면 상처를 받을 수도 있지만, 굳이 강함으로 포장하면서 자신의 다정함을 감추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옛날을 돌이켜보면 나야말로 강한 척하며 유약함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강하면서도 다정한 것은 힘들고도 아름답다. 다정함이 유약함이 아니라 부드럽게 휘어지는 강함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내 안에서 그 작업은 열심히 진행 중이다.
“엄마는 다정한 엄마니, 못된 엄마니?”
어느 날, 둘째에게 물어보았다. 다정함의 반대말이 ‘못된’ 건 아니었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며칠 전 본의 아니게 아이에게 폭풍 잔소리를 하고, 급 후회를 하며 아이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건네었다. 굳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해놓고서야 아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묻는 것이다. 혼낸 것이 찔리기도 하고, 엄마가 조금은 더 노력해 보리라 하는 마음의 표현을 하고도 싶었다. 히스테릭한 엄마에서 급 다정한 엄마로의 모드 변경이다.
“반반이에요.”
“아, 그래?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구나.”
뜸을 들일 줄 알았는데, 바로 대답이 나오니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미안한 마음이 더 커졌다. 반이라도 내게 다정함의 코드가 있다고 말해준 게 기뻤다. 특히나 나와 코드가 잘 맞지 않는 둘째에게 나는 못된 엄마 노릇을 참 많이도 했었기 때문이다. 벌써 고1이니 시간이 흘러 어느 날, 이 녀석이 내게서 떠나간다면 얼마나 아쉬운 마음이 들까. 물론 독립해서 잘 떠나보내는 게 중요하겠지만, 아마도 나는 더 다정하지 못했음을 분명히 후회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더 마음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너한테 더 다정한 엄마가 되고 싶은데 잘 안될 때가 있어. 그래도 노력하고는 있는데, 조금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니?.”
“네”
“지금은 어떠니? 엄마가 좀 나아진 거 같니?” 슬그머니 한 번 더 묻는다.
“음, 괜찮아요.”
“아, 그래? 하하~ 그렇게 말해주니까 기쁘네, 엄마가 더 노력해 볼게.”
아들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은 늘 짧다. 둘째는 물어보는 말에만 대답을 하기 때문에 자세히 물어봐야 한다. 그래도 긍정의 대답을 해준다는 건 엄마에게 늘 안심이 되는 일이다. 아이들의 눈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진짜 긍정인지 아닌지를.
아이에게 막 돼먹게 굴었다가 되려 사랑을 달라고 조르는 모양새지만, 그렇게라도 아이들의 피드백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것도 내 욕심인가.
아이들이 스무 살이 되면 나는 아이들을 독립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물론 경제적으로 진정한 독립은 멀고 멀겠으나, 마음으로라도 조금씩 떨어지고 싶다. 그러니까 조금 더 마음을 내어야 한다. 가까이 있는 지금이라도 아이에게 좀 더 다정하게 엄마가 필요하다. 나를 못된 엄마로 기억하면 너무 슬플 테니. 앞에 앉은 아들은 별생각 없이 폰을 보고 있는데, 엄마만 마음이 복잡해진다. 정말 다정도 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