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나를 위하여

음식이 말해준 자기 고백에 대하여

by 운조

흑백요리사를 보고 난 뒤, 책장에 꽂혀 있던 문장들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이창래의 〈Coming Home Again〉과 미셸 자우너의 『Crying in H Mart』. 둘 다 “엄마가 떠난 뒤에야” 이해하게 되는 사랑을 음식으로 읽어내는 이야기였다. 나는 처음엔 흑백요리사의 승부도 그런 계열의 감동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엄마의 맛’이 마지막까지 사람을 울릴 거라고.

그런데 아니었다. 그 결승의 핵심은 정반대였다.


우승이 말해준 것은 ‘엄마’가 아니라 **‘나’**였다.

우승자는 늘 남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온 셰프였다. 손님을 위해, 팀을 위해, 심사위원을 위해. 그런 사람에게 마지막 미션은 이상하게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주문이었다. “자신을 위한 음식을 만들라.”


그때 그의 요리는 확 달라졌다. 정답을 맞히려는 요리가 아니라, 설명하려는 요리도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재료를 골랐다. “이게 사람들이 좋아할 맛”이 아니라 “이게 내가 좋아하는 맛”이라는 선택. 그 선택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단단했다. 취향은 사소해 보이지만, 사실은 한 사람의 삶이 응축된 형태이니까.


그리고 그는 소주 한 병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장면에서 나는 오래 멈춰 섰다. 소주는 장식이 아니었다. 트릭도 아니었다. 그는 덧붙였다. 요리가 끝나고 집에 가면 소주 한 잔을 마시고 잠자리에 든다고. 그러니까 그가 올려놓은 건 ‘술’이 아니라, 하루를 끝내는 자기만의 의식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반복되는 습관. 한 사람이 삶을 견디는 방식.


그 순간 나는 ‘스토리’라는 말을 다시 생각했다. 요즘 우리는 스토리를 사연으로 오해한다. 눈물, 극복, 가족, 희생 같은 단어들로만 스토리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흑백요리사가 보여준 스토리는 그 반대에 가까웠다. 그것은 누군가의 불행을 전시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야기였다. “나는 이런 맛이 좋다.” “나는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 말이 요리를 설득력 있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창래와 자우너가 말한 음식도 결국 같은 질문을 품고 있었다. 우리는 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늘 뒤늦게 알게 되는가. 왜 사랑은 말로 오지 않고 음식의 형태로 남는가. 미역국의 온도, 칼질의 속도, 밥상이 놓이는 순서 같은 것으로. 살아 있을 때는 한 번도 문장으로 번역되지 않았던 사랑의 방식.


다만 두 작가가 통과하는 길은 다르다.

이창래의 〈Coming Home Again〉에서 아들은 암으로 죽어가는 어머니 곁으로 돌아와 음식을 만든다. 하지만 그 요리는 화해라기보다 지연된 이해에 가깝다. 이창래의 문장은 절제되어 있고, 그 절제 속에서 말해지지 않은 감정이 더 크게 남는다. 그의 세계에서 사랑은 침묵과 예의와 몸짓으로 전달되고, 그래서 글을 덮고 나면 무엇이 말해졌는지보다 무엇이 끝내 말해지지 않았는지가 오래 남는다.


반면 『Crying in H Mart』의 미셸 자우너는 침묵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녀는 어머니와의 갈등, 분노, 사랑, 죄책감을 숨기지 않고 말한다. H 마트는 그녀에게 단순한 한인 마트가 아니라 어머니의 세계가 마지막으로 보존된 장소다. 그곳에서 울 수 있다는 사실은 연결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자우너에게 울음은 약함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다. 말함으로써 버티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다시 세운다.


이 두 책을 읽을 때, 나는 오래 ‘엄마의 밥상’을 떠올렸다. 이민자 어머니들의 사랑은 종종 기능의 형태를 띤다.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었고, 그래서 자식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배우지 못한 채 자란다. 어머니가 떠난 뒤에야 그 기능에 이름을 붙인다. 그게 사랑이었음을, 그게 생존이었음을.


그런데 흑백요리사의 결승을 보고 나서, 나는 그 질문이 조금 다른 방향으로 돌아나가는 것을 느꼈다. 엄마의 밥상만이 아니라, 나의 밥상은 어디에 있었을까.


우승자는 남을 먹이던 사람이었다. 우리도 그렇다. 가족을 먹이고, 일을 해내고, 역할을 지키느라 늘 누군가를 위한 밥을 차린다. 그러다 보면 정작 나를 위한 식사는 끝끝내 미뤄진다. 내가 좋아하는 재료가 무엇인지, 내가 편안해지는 맛이 무엇인지 잊어버린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책임 때문에 먹고, 피곤해서가 아니라, 루틴 때문에 살아간다.


그래서 마지막 미션이 더 정확하게 꽂혔다. “자신을 위한 음식.” 그 말은 요리사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주문 같았다. 나는 나를 위해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나는 하루가 끝나면 무엇으로 나를 달랠까.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나의 하루를 무사히 접기 위해.


음식 앞에서 우리가 울게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곳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말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창래는 그 말을 끝내 다 하지 않고 남겨두고, 자우너는 가능한 한 끝까지 말하려 한다. 그리고 흑백요리사의 우승자는 그 말을 ‘말’이 아니라 취향으로, 습관으로 보여준다. 소주 한 병처럼 작고 사적인 물건으로, “나의 하루”를 증명한다.


어머니를 잃은 뒤, 우리는 음식을 통해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그 귀환은 늘 조금 늦고 조금 불완전하다. 동시에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음식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남을 먹이느라 비어버린 나의 식탁을, 언젠가 한 번은 나를 위해 차려야 한다.


흑백요리사를 보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우승은 음식이었지만, 우승을 만든 것은 스토리였다.

그리고 그 스토리는 결국 한 사람의 고백이었다.


“오늘은, 나를 위해.”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