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 오라 / Nevermore

김소월의 「초혼」과 포의 「갈까마귀」가 내게 남긴 반복의 언어

by 운조



사람은 상실 앞에서 새 문장을 만들지 못한다.

말이 많아질수록 진실은 흐려지고, 위로는 더 가벼워진다.

그래서 결국 남는 것은 한 문장이 아니라 한 단어다.


그리고 그 단어는 이상하게도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상실은 말의 끝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꾸만 되풀이된다.


오라.

오라.


다시는 없다.

다시는 없다.


김소월의 「초혼」과 에드거 앨런 포의 「갈까마귀」는 서로 다른 언어와 시대에서 태어났지만, 내가 보기에는 같은 지점에서 만난다.

떠난 사람을 떠나보내지 못한 자의 입술에서, 반복되는 말로.


김소월의 시에서 화자는 부른다.


“오라, 오라.”

“내가 부르다 죽을 이름이여.”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나는 한 사람의 등 뒤를 본다.

어딘가 서 있는 사람.

어쩌면 달빛 아래 들판일 것이고, 어쩌면 바람이 마른 나뭇가지를 흔드는 밤일 것이다. 그러나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그 사람의 목소리만이 중요하다. 그 목소리 속에는 단 하나의 믿음이 들어 있다.


부르면 올지도 모른다는 믿음.

부르면, 적어도 혼이라도 돌아올지 모른다는 믿음.


그 믿음은 어쩌면 미련일지 모른다.

그러나 미련이 아니라면, 인간은 상실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김소월의 반복은 애원 같지만 사실은 의식이다.

부름 자체가 살아 있는 자의 의무가 되는 순간이 있다.

그는 상대를 움직이기 위해 “오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오라”를 되풀이한다.


그래서 이 시의 반복은 처절하면서도 뜨겁다.

끝내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의 체온이 남아 있다.


반복은 이상한 언어다.

슬픔은 보통 사람을 침묵하게 만들지만, 어떤 슬픔은 오히려 사람을 말하게 만든다. 다만 새 말을 하게 하지는 않는다. 슬픔은 사람에게 새 문장을 줄 만큼 친절하지 않다.


슬픔은 단지, 같은 말을 하게 만든다.


나는 그 사실을 내 삶에서도 배운 적이 있다.


어느 날 병원 침대에 누워 있을 때였다.

창밖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맑았고, 간호사의 발걸음 소리는 지나치게 일상적이었다. 나는 그 평범함이 이상하게 두려웠다. 내 몸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지고 있는데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괜찮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내 안에 닿지 않았다.

괜찮음이란 말은 너무 멀리 있었다.


그때 내 입에서 자꾸만 흘러나오던 말이 있었다.

누구에게 하는 말도 아니었다.

그저 혼잣말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 말은 병을 부정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상황을 바꾸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말이었다.

내가 아직 나라는 것을 붙잡기 위한 말이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사람은 절망 속에서 더 똑똑한 말을 찾지 않는다.

사람은 그저, 자기 영혼이 붙잡을 수 있는 가장 짧은 말을 반복한다.


반복은 희망이 아니라 생존이다.


에드거 앨런 포의 「갈까마귀」를 읽으면, 반복은 전혀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


포의 시에서 화자는 한밤중 방 안에 홀로 앉아 있다.

책을 펼쳐놓고 있지만,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죽은 연인 레노어의 이름이 마음속에서 계속 살아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사랑을 끝내지 못한다. 사랑은 죽은 뒤에도 남아 있는 사람을 계속 붙잡는다.


그때 창문이 열리고 갈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든다.

검은 새는 팔라스 여신의 흉상 위에 앉는다.

그 모습은 새라기보다 판결문처럼 느껴진다.

마치 삶이 보내온 사자처럼.


그리고 화자가 말을 걸자, 갈까마귀는 단 한 마디를 내뱉는다.


Nevermore.

다시는 없다.


처음에는 우연처럼 들린다.

누군가에게 길들여진 새가 배운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말이 반복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의미가 된다.


반복은 의미가 되는 순간부터 잔인해진다.


화자는 묻는다.

처음에는 가벼운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질문은 점점 진심이 되고, 진심은 절규가 된다.


내가 다시 레노어를 만날 수 있느냐고.

천국에서라도, 죽은 뒤에라도, 다시 만날 수 있느냐고.


그리고 갈까마귀는 대답한다.


Nevermore.

다시는 없다.


김소월의 반복이 “부르는 말”이라면, 포의 반복은 “끊어내는 말”이다.

김소월이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반복을 한다면, 포의 갈까마귀는 희망을 하나씩 부숴버리는 반복을 한다.


그 반복은 마치 망치질 같다.

화자의 마음이 희망을 붙잡을 때마다, 그 말은 내려앉아 그것을 깨뜨린다.


그래서 포의 시는 공포시가 된다.

귀신이 등장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무너지는 과정을 너무 정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이 두 시를 나란히 놓고 읽을 때마다, 인간이 상실 앞에서 얼마나 비슷한 방식으로 흔들리는지 새삼 놀란다.


김소월은 부른다.

오라. 오라.


포는 대답한다.

Nevermore. Nevermore.


한쪽은 초대이고, 한쪽은 거절이다.

한쪽은 생명의 마지막 온기이고, 한쪽은 현실의 냉정한 문장이다.


그런데 그 두 문장이 가리키는 곳은 같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

사라진 이름.

그리고 그 이름을 떠나보내지 못한 마음.


어쩌면 상실은 우리에게 선택지를 주지 않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국 두 문장 중 하나를 붙잡게 된다.


“오라.”

혹은

“다시는 없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둘 다를 안고 살아간다.


우리는 부르면서도 알고 있다.

우리가 부르는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알면서도 부른다.

부르지 않으면 정말로 완전히 사라질 것 같아서.

부르는 순간만큼은, 그 사람이 내 곁에 있는 것 같아서.


상실이란 결국 그 모순을 끌어안고 사는 일이다.

이별을 인정하면서도 인정하지 못하는 일.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떠나보내지 못하는 일.


그렇게 마음은 매일 같은 말을 한다.


내가 병원 침대에서 되풀이했던 “아니야”라는 말도 결국 같은 종류의 반복이었다.

그 말은 나를 낫게 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잠시 붙잡아 주었다.


상실은 늘 죽음으로만 찾아오지 않는다.

어떤 날은 몸으로 오고,

어떤 날은 기억으로 오고,

어떤 날은 내가 나를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순간으로 온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반복한다.


괜찮아.

괜찮아.


아니야.

아니야.


오라.

오라.


Nevermore.

Nevermore.


반복은 상대를 움직이기 위한 언어가 아니라,

나 자신을 버티게 하기 위한 언어다.

사람은 무너질 때 가장 논리적인 문장을 만들지 못한다.

사람은 다만, 자기 영혼을 붙잡을 수 있는 가장 짧은 말을 반복한다.


김소월의 「초혼」을 읽고 나면 “오라”라는 단어가 오래 남는다.

그 말은 간절함이 아니라 인간의 마지막 사랑처럼 느껴진다.

떠난 사람을 향해 던지는 마지막 불씨.


포의 「갈까마귀」를 읽고 나면 “Nevermore”라는 단어가 오래 남는다.

그 말은 공포가 아니라 현실의 단단함처럼 느껴진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끝내 인정해야 하는 삶의 문장.


나는 이제 이 두 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김소월은 부르며 살아남았고,

포는 대답을 들으며 무너졌다.


그러나 결국 둘 다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떠난 이름 앞에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 앞에서.


그리고 그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하나뿐이다.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사랑하는 이를 잃은 뒤에도

사람은 살아간다.


다만 그 삶은

더 이상 새로운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남는 것은 오직

반복되는 말뿐이다.


오라.

오라.


Nevermore.

Nevermore.


그 반복이 멈추는 날,

아마 내가 끝나는 날일 것이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