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건너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저 친구가 보낸 글을 읽었을 뿐인데, 그 안에 들어 있던 한 문장이 하루 종일 나를 따라다녔다.
“강에 다 왔어요.”
누군가에게 길을 알려주는 말이었을 것이다.
이제 거의 다 왔다고,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그런데 나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강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경계처럼 느껴진다.
여기까지와, 그 너머.
돌아갈 수 있는 쪽과 돌아갈 수 없는 쪽.
누군가의 삶에서 강은 마지막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시작일 수도 있다.
물은 흐르지만, 사람은 돌아오지 못하는 곳.
그 영화 속 인물에게도 그 강은 단순한 물길이 아니라 운명의 선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문장을 붙잡고 있다가 문득 오래된 시 한 편을 떠올렸다.
알프레드 테니슨의 「Crossing the Bar」.
해가 질 무렵, 그는 모래톱을 건너 바다로 나가겠다고 했다.
떠나는 일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두려움을 크게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조용히, 바를 건너겠다고 했다.
그 시의 마지막 문장은 늘 마음을 흔든다.
“바를 건넌 뒤,
나는 나의 조종사를 얼굴을 마주해 보기를 바란다.”
누군가에게 그 조종사는 신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운명일 것이며,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온 삶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시를 생각하다가 또 한 곡의 노래를 떠올렸다.
조용필의 〈소녀〉.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
그 노래는 사랑 노래이면서도 어쩐지 사랑보다 더 큰 무언가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사라진 시간, 되돌릴 수 없는 장면, 돌아오지 않는 사람.
꽃다발을 들고 서 있던 소녀는 결국 강을 건넌 사람이다.
시간이라는 강을, 돌아갈 수 없는 쪽으로 건넌 사람.
그런데도 우리는 그 노래를 부른다.
그녀를 잊지 않으려고.
아니, 사실은 그때의 나를 잊지 않으려고.
노래는 결국 기억을 건너는 방식이니까.
친구의 글은 역사에 대해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내가 건너온 강들을 떠올렸다.
미국으로 오던 날.
공항 게이트 앞에서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을 때,
아버지는 손을 흔들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 짧은 끄덕임이 작별 인사라는 걸,
나는 비행기 안에서야 알았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던 순간,
나는 이미 강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강.
병원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날.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말이 입 밖으로 제대로 나오지 않던 그 시간.
그때 누군가 내 곁에서
“강에 다 왔어요”라고 말해주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의 강은 대개 혼자 건너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하지만 가끔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끝까지 걷게 한다.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라고.
당신은 여기까지 왔다고.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강에 다 왔어요.”
그 말은 끝이 아니라,
지금까지 버텨온 사람에게 건네는 조용한 확인 같은 말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여기까지 왔다고.
당신은 아직 걸어가고 있다고.
테니슨은 바를 건너며 조종사를 만나길 바랐다.
나는 강을 건너며 누군가 내 이름을 한 번만이라도 불러주길 바란다.
그 언젠가 꽃다발을 전해주던 소녀처럼,
아무 말 없이 그저 내 손에 작은 무엇을 쥐여 주는 마음처럼.
그게 노래가 될 수도 있고,
글이 될 수도 있고,
기억이 될 수도 있다.
오늘 나는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그 문장 하나 덕분에 나의 강가를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말은
사랑해요도, 괜찮아요도 아니라
어쩌면 이런 말일지 모른다고.
“강에 다 왔어요.”
당신은 지금, 어떤 강 앞에 서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