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궁금하지 않을 자유
유통기한이 지난 전화번호는 538개였다.
연락처에 저장된 710개의 번호에서 지우고, 삭제하고, 솎아내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를 수차례 반복한 결과 172개로 줄어들었다.
기분 탓이겠지만 내 휴대폰이 꽤나 가벼워진 느낌이다. 옷방 깊숙이 꽉 메운 물건들을 몽땅 비워버린 듯한 홀가분함 마저 느껴진다.
버릴 땐 길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어차피 존재조차 모르고 살던 물건들이며 지금 눈에 들어온다고 반드시 필요한 물건도 아니기 때문이다. 전화번호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연락도 안 하는 번호들은 오랫동안 성가시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삭제해 버릴 번호들
잠깐 고민해 봤던 번호들
그리고 지웠다가 다시 저장한 번호들도 있었다.
그러기를 며칠새 반복한 결과가 172이란 숫자다.
아마도 내가 은퇴를 선언하게 되면 100여 개의 번호가 추가로 지워질 것 같다.
ㄱ부터 ㅎ까지 그리고 그다음 A부터 Z까지 연신 위아래로 스크롤을 반복하면서 그 사람들을 잠시 떠올려 보기도 했다.
연락 한 번도 안 했음 삭제
연락 안 한 지 1년 넘었음 삭제
후배(나)한테 계속 얻어먹고 부끄러운지도 모르는 선배 놈 삭제
잘난 고등학교 동기 삭제
고마웠던 친구 저장
다단계에 빠진 사촌 삭제
극단적 정치성향에 세뇌된 지인 삭제
내 뒤통수를 친 선배 저장
분기에 한번 만나도 지난주에도 만난 것 같은 친구 저장
매번 하소연이나 신세한탄만 늘어놓는 후배 삭제
싹퉁바가지 사촌 누나 저장
ㅎㅎㅎ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 삭제
옛날 고객들 삭제
그냥 미친 X 삭제
전화번호를 왜 교환했는지 모르겠음 삭제
음 그냥 삭제
...
그러다 내 손은 카톡을 눌렀다.
원래도 카톡은 이 브런치 때문에 다시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카톡 없이 살았다. 그래서 이 카톡으로는 지금도 거의 소통을 하지 않는다. 알림톡 받는 정도? 간혹 카톡으로 연락이 오는 경우에는 그게 사업적이든 개인적이든 문자로 연락해 달라고 소통 채널을 조정한다.
아버지, 어머니, 와이프, 아들을 제외하고 모두 지웠다. 어차피 카톡을 소통수단으로 쓰지도 않을뿐더러 남의 '선별된 투뿔 등급의' 가공된 프로필 사진이나 들여다보면서 괜히 비교하는 마음이 올라오는 자체가 싫기 때문이다.
그리고 썅력 가득한 싹퉁바가지 사촌누나의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섬세하고 감수성 흘러넘치는 프로필 사진과 상태메시지가 시야에 잡히는 것도 꽤나 고역이다.ㅋㅋ
사람들의 나 이만큼 잘 지낸다는 사진과 메시지는 속내가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 같아서 언제나 변함없이 오글거린다. (귀엽기도 하고 가엾기도 하고 그런다.)
물론 사진과 상태 메시지를 미리 훑어보고(파악하고) 고객과 상담하는 것도 힌트가 되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카톡 없을 때도 충분히 잘했다. 오히려 프로필 사진이나 메시지가 없을 때(미리 가늠이 안될 때) 답답함을 느낀 적도 있었다.
어쨌든 카톡 친구 목록은 사실상 다 지웠다.
내 친구목록에서 삭제했지 차단한 것은 아니므로 상대가 해오는 연락은 받을 수 있다. 뭐, 필요하면 연락하겠지 싶다.
이제 염탐이나 하는 시간을 좀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단 몇 분이라도 말이다. 그렇게 남는 시간 책 읽고 재미있는 영화 한 편이라도 더 봐야겠다.
https://brunch.co.kr/@jaemist/6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