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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닝레인 May 25. 2023

종이로 만든 마을, 도미니크 포르티에

- 에밀리 디킨슨이 사는 비밀의 집


미국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실험적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인생을 

캐나다 퀘백의 소설가 도미니크 포르티에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여 만든 책이다. 

도미니크는 자료를 바탕으로 하되 쓰는 사람의 상상도 가미되었으며 '만약 독자들이 이를 구분할 수 없다면 잘된 일'이라 적었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옮겨본다. 



에밀리 디킨슨은 새하얀 백지, 텅 빈 장막이다. 에밀리가 인생 말년에 파란색 옷만을 입기로 마음을 바꿨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을 것이다. - 13


(번개가 치던 밤) 숙모가 어린 에밀리를 안심시키려고 끌어안았다. 에밀리는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번개에 매혹되어 차가운 차창에 이마를 대고 혼잣말을 했다. 

"불이다." - 14


(아버지가 꽃을 말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모두가 아는 날짜를 이용하여 페이지수를 정하고 거기 넣어두라느 이야기였지만 에밀리는 다른 방식을 택했다. '재스민'이라고 적힌 페이지에 재스민 꽃잎을 넣어 말렸다.) 에밀리가 사전의 표제어에 삽화를 만든 것이다. - 20


아버지는 계속해서 선생님처럼 말했다. 뭔가를 가르칠 때는 언제나 그런 어조였다. 다시 말해 항상 선생님처럼 말한다는 뜻이다. 


"표본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하려면 모두가 아는 날짜로 쪽수를 고르는 것이 좋단다. 이를테면...  백년전쟁이 언제 시작했지?"

아버지가 답을 기다렸다.


"1337년이요."


오스틴, 라비니아, 메일리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스틴과 라비니아는 책을 빼서 책갈피 사이에 조심스럽게 꽃잎을 넣으며 "독립선언" "로마제국의 멸망" "어머니 생일"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에밀리는 오빠와 여동생과는 달리 영어사전에 아무렇게나 집어넣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아무 데나 넣으면 나중에 어떻게 찾으려고 그러니?"


에밀리는 미소를 지었다. 


"저는 다 기억할 수 있어요."


몇 달 뒤 한겨울에 디킨슨 삼 남매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여름 꽃을 찾았다. 에밀린ㄴ 망설이지 않고 사전을 펼쳤다. 오스틴과 라비니아가 숫자들을 중얼거리는 동안, 에밀리는 마법의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단어 하나만을 외쳤다.

"재스민!"

재스민이 나타났다. 

에밀리가 사전의 표제어에 삽화를 만든 것이다. 


- P. 19~20


에밀리는 박하잎, 장미, 캐모마일을 함께 모아 어머니에게 드렸다. 이것들을 표본집에 넣지 않는다. 부엌에 매달라 말리고 겨울에 차를 우려 마실 것이다. 

에밀리는 여름이 끝날 무렵에 새들에게 훔친 씨앗을 조그만 주머니에 넣어 소중히 보관했다. 주머니는 곧 정원이 될 것이다 - 21


(아버지가 '왜 나는 항상 이가 빠진 접시로 먹어야 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을 때 에밀리는 접시를 깨버리고 말한다.) "다시는 그럴 일이 없을 거예요." - 23


에밀리의 책장에 있는 책들은 차렷 자세를 한 병사들처럼 줄을 맞춰 반듯하게 꽂혀 있다. 새에 관한 책과 패류에 관한 책, 태양계에 관한 책이 있다.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셰익스피어 전집과 모든 진실을 담은 성경도 보인다.

에밀리의 방에 이 모든 것이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이 있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이 빈 공책들에 쓰이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새, 나무, 행성이 비밀의 방과도 같은 에밀리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 34


에밀리는 시계 보는 법을 배우기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 40

 

"그런데 이 도시는 존재하지 않아."


오스틴이 손가락으로 린든을 짚었다. 

에밀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오빠를 쳐다보았다. 분명히 린든이라는 글자가 다른 도시의 이름처럼 똑같이 적혀 있는데, 지도가 거짓말을 한다는 건가?


"지도에만 존재하는 도시야. 내가 스무 번 넘게 지나간 길이라 잘 알고 있어. 자그마한 숲과 옥수수밭이 다야. 오두막 하나 없는 곳이야."

"그럼 왜 린든이라고 적혀 있는 거야?"


에밀리가 오빠에게 물었다. 


"린든은 종이 마을이야. 지도를 제작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마을이지. 자기들이 제작한 지도를 다른 사람들이 훔치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적어놓은 거야."

"마을을 훔친다고?"


에밀리는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을을 훔치는 게 아니라 마을 이름과 지도를 훔치는 거야. 이 지도를 만든 사람들이 린든이란 마을이 있는 지도를 발견하면 자기들의 지도가 도둑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돼. 표절의 증거가 되는 거지."


오스틴이 에밀리에게 설명해주었다. 


"종이 마을... "


에밀리는 한 번 더 되뇌었다.


- P. 47~48


책은 절대 닫히는 법이 없는 문이다. 에밀리는 십만 개의 바람이 들어오는 방에서 살았다. 그래서 항상 담요가 필요했다. 


- P. 49


에밀리는 위층 자기 방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에밀리에게 글 쓰는 재능이 있다면 그 사람은 존재하게 될 것이다. 


글자는 종이에 핀으로 고정하기에는 너무 연약하다. 글자는 나비처럼 방 안을 날아다니거나 옷에서 나온 좀벌레처럼 기어다닌다. 글자는 화려한 색과 모험심이 없는 나비다. 


그날 저녁 에밀리는 백 번의 인생을 산 어느 유태인의 이야기를 읽었다. 백 번의 인생... 좋은 것인가? 한 번도 하능를 나는 새로 살아보지 못했는데.


- P. 50


책은 사물에 대해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학생들은 수세대를 거쳐 선배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 내려오며 먼지가 쌓인 두터운 책에서 바위,별, 곤충 등을 배웠다. 하지만 에밀리에게는 사물 역시 끊임없이 책에 대해 말했다. 

어느 날 아침 에밀리는 창가에 서서 숲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별안간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는 듯한 미동이었지만 곧 나무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 65


에밀리는 유용하고 반복적인 동작을 좋아했다. 식탁에 나이프를 놓을 때마다, 포크를 놓을 떄마다 자신을 땅에 고정시키는 닻을 내린다고 생각했다 - 71


굵고 명확한 목소리를 가진 시인이 아주 큰 소리로 말했다. 마치 넓은 강당의 연단에서 맨 끝에 앉은 사람들까지 잘 들리도록 크게 말하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에밀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밀리도 창문을 힐끔 봤다.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잔가지로 만든 둥지에서 잠을 자고 있는 푸르스름한 새알 세 개를 보기 위해서.

그것이 시라는 것을 에밀리는 알고 있다. 시는 시인의 화려한 언어 속이 아니라 얇은 알 껍질 속에, 태어날 존재의 아주 작은 심장 속에 숨어 있다. - 74


에밀리는 어렸을 때부터 오리온자리를 찾을 줄 알았다. 모래시계의 가는 허리와 멀리 앞서 뛰어가는 개를 찾고... 에밀리는 오래전에 오리온자리를 자신의 다음 집으로 결정했다. - 85


그러면 한 달에 며칠 동안만 여자가 될 거야. 나머지 날에는 글을 쓸 거야 - 90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어제보다 더 나은 산책을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같은 정원을 매일 산책하는 것이다 - 105


라비니아는 단 한 번도 마법사를 꿈꾼 적이 없었다. 마녀가 될 수 있는데 왜 마법사가 되고 싶겠는가? - 114


들판에 사는 에밀리는 한 번도 바다에 간 적이 없었다. 파도가 일렁이는 시퍼런 바다는 에밀리에게 공포심을 일으켰다. 에밀리는 방 유리창에 맺혀 있는 물 한 방울의 프리즘 안에서 완벽한 편안함을 느꼈다. 꿈에 바다가 나타나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물에 빠질까 두려웠다. 무한과 맞부닺칠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까 -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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