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이든.. 심리학이든.. 영성학이든 이런 책을 여럿 들고 날라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거기서 하나 같이 하는 말이 ‘감사하기’라는 것을.
오늘은 그 길고도 오래된 감사하기의 쇠망사와 그 후 또 어떤 것의 부상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감사하기’라는 토픽은 마치 계속해서 묵살하는데도 계속해서
네가 좋아할 거라고 추천해 주는 OTT 영화 리스트 같았다.
내겐 ‘감사’라는 말은 ‘존경’이라는 말처럼 두드러기 나기도 하고
또 애초에 그 글이 있는 책 자체를 사는 게 벅차 집어든 것인데 그런 말이 있으니
좀처럼 흡수되지 못하고 계속 심드렁하는 게 사실.
감사를 하자니요 지금 이 상황에.. 차라리 불에 기름을 부어요
우울증 환자한테 그런 얘기하지 말고..
이미 우울과 울화로 마음이 만석인데
세상에 이런 기만이 어딨단 말인가..
그게 진정으로 누군가를 위한 말이긴 한단 말인가
그 말을 제안한 사람.. 이 세상을 살아본 사람이기는 하단 말인가..
라는 말만 에코로 광광 내 마음에 울릴 뿐.
왜 아니겠는가
그래서일까? [감사하기]는 여타 모든 정신건강관련 된 책에서는 전부 들어봤지만
정작 눈앞에 있는 당신의 주치의에게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유인 듯하다
정신과 의사 목숨은 하나이기 때문에.
지금 어깨 쳐 저 시름을 내뿜는 사람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정신과 의사 목숨이 두 개라면 몰라도
‘감사일기를 써보세요.’라고.
감사하기, 감사일기
하나 같이 그것을 권하는 이유는 접시에 코 박고 막 죽으려는 사람의 어깨를 일단
들어 올리는 데 있는 듯하다.
그리고 둘러보라고 느껴보라고 네가 가진 게 정말 하나도 없는지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모든 건 상대적이라고 그러니 감사할 것도
얼마든지 크고 작든 찾을 수 있다고 권하는 것이다.
인식이든 생각이든 뇌든 감사하기를 로딩하는 순간 괴로움의 소용돌이도 일단 멈추고
후에 감사할 것도 떠오르니 일석이조인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부정적인 경향성에 일단 나뭇가지를 끼우는 것이 급선무인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이유에서 나도 그만 진정하고 한동안 감사일기를 쓰기에 돌입한 적이 있었다.
너무 너무 좋다고 해서 했는데 뭐랄까..
한동안은 감사하기와 생각의 속성(꼬리의 꼬리를 물기)이 맞물려서
그래.. 참 그렇지.. 내가 가진 게 맞네.. 하고 내 상황과 나를 조망하게 되는 순간이
여럿 있었지만 뭐랄까 그 과정이 좀 거추장스럽고 더뎠달까. 타율이 너무 낮았달까.
그래서 결국은 갈수록 부담이 되고 숙제가 되고 보고 싶지 않은 친구가 됐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나는 이게 진심이 아닌 지문 읽듯이 연기를 한 배우 같은
행동이었다는 걸 알았다. 한마디로 내게 감사하기는 좀 품이 많이 드는 행위였다.
그러던 내가 만난 게 바로 ‘ 칭찬하기’ 였던 것이다.
나는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인생에서 내리기 같은 것을 유튜브에 검색했던 것 같다.
참으로 어두운 나날이었다.
네이버 필터링에 비하면 여기는 아비규환이니까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너무 다행히도 심리학자 선생님의 강의가 가장 먼저 떴고 나는 새삼 썸네일용
크고 굵은 글자와 클로즈업되어 테두리 따진 강연자 모습이 퍽 마음에 들어 클릭하게
되었다.
나는 내용보다도 그 선생님의 완벽한 딕션과 톤, 목소리에 매료되었다.
완벽했다. 그 목소리를 더 듣고 싶어 나는 곧장 다른 영상을 하나 더 틀었고
거기서 본인이 치료하면서 가장 많이 내주는 숙제가
자기 자신 칭찬하기 3개라고 하자마자 나는 그다음 날 부로 당장 따라 했고
그 효과.. 상큼했다.
일단은 나는 한 개인의 자존감 역할을 견인하는 건 누가 뭐래도 어린 시절 자신에게
한 부모의 입버릇이라고 생각하고 지금도 딱히 변함은 없다.
딱히 사랑도 칭찬도 애정도 받지 못하고 자라면 딱히 욕도 혼도 나지 않아도
본인은 굉장히 볼품없으며 가치 없다고 그렇게 세상 갈라질 때까지 믿는
그런 무서운 믿음은 어린 시절 생기고 그걸 상쇄할 방법은.. 그걸 영화로 찍고자
하면 나니아 연대기 같은 장편드라마가 돼버리는 하여간 그런..
그런데 하루에 나 스스로를 칭찬해 주면서 나는 마치 어린아이가 칭찬받는 것처럼
어딘가 모를게 굉장히 우쭐해지는 구석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게 너무나 신기했다. 이런 기분일까 우리 애 기죽이지 말라고 한 부모가 지킨
그 ‘기’가 이토록 깨끗하고 탄탄한 마음인 걸까 싶었다.
이제 어른으로 산다는 것, 다시 제대로 된 어른으로 산다는 건 이제부터 내가 나 자신의
양육자라고 생각하고 잘해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선명한 방법과 효과는 처음
이었다. 이를테면 감사하기로는 내가 운동 간 것으로 요리하기 애매한데 칭찬하기는
오예 오늘 힘든데 운동 갔네 대견하네 용하네 장하네 소리는 쉽게 나올 수 있었다.
술어가 바뀌니까 모든 게 편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이렇게나 패배주의에 찌들고 비관적이고 깜깜한 내면을 갖고 있어나
라는 생각에 놀랐다. 숨 쉬듯이 나 자신을 질책해서 그런 줄도 몰랐다. 물밖에서 공기가
뭔지 딱히 모르는 것처럼. 나는 내 긴 인생에 고작 칭찬 몇 가지 던지자 내가 어둡기의
정도가 가늠됐다.
신기함이 신남을 불러서 100개 써볼까 했다가 학을 떼고 다시는 못 돌아올 것 같아서
3개만 적고자 하는 것도 나름대로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리고 이것 역시 좀 뭐랄까 관성적으로 3개 툭 던지게 되는 순간이 또 오기도 했다만
그래도 감사하기보다는 훨씬 더 경쾌한 작업이었다.
지금은 또다시 to-do list만 깨끗이 적고 체크하고 나서도 다시 칭찬 한번 없어졌지만
그래도 다시 필요하다면 다시 할 메모장은 이미 준비가 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