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막의 연금술사 Oct 28. 2022

라인 VS 라이언

신입 승무원 교육 기간 중 커뮤니케이션 수업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는 간단한 게임을 통해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배워보기로 했다. 먼저 두 명씩 짝을 지어 등을 맞대고 앉은 후, 왼쪽에 앉은 사람들에게만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림을 본 사람들은 등을 지고 앉은 짝꿍에게 그림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설명하고, 오른쪽 사람들은 그 설명을 토대로 그림을 그리는 게임이었다.


나는 오른쪽에 앉은 이들 중 하나였는데, 사선을 그려라, 동그라미를 그려라 그 위에 사각형을 그려라 등의 짝꿍의 설명을 들으며 그림을 그리다 보니, 사선의 각도, 길이를 포함하여, 동그라미의 크기까지 모든 것이 헛갈렸다.


도중에 서로 마주 보거나 그림을 보여주는 것은 금지되었기에 나는 그저 내가 이해한 대로 그려나갔다. 주어진 시간이 끝나고, 우리는 모두 그림을 제출했다. 총 10장 남짓한 그림들은 서로 비슷한듯하면서 모두 달랐다. 역시나 사선의 길이는 제각각, 도형들의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그림을 자세히 비교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모두의 시선을 잡아끄는 그림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A4용지 한가운데 버젓이 그려져 있는 사자 한 마리!!!!


잉? 사선에 원형과 사각형 등을 그리는 거였는데? 갑자기 웬 사자?? 예상치도 못한 사자의 등장에 모두의 웃음보가 터졌고, 그림을 그린 크루의 설명이 이어졌다. 알고 보니, 그녀는 짝꿍이 그리라고 한 라인(=선)을 라이언으로 들었단다. 본인도 당황했는지 머쓱해하며 설명하는 그녀의 모습에 우리는 다시 한바탕 크게 웃었다.




수많은 국적의 크루들이 모인 우리 항공사의 공용어는 ‘영어’이다. 회사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을 포함, 브리핑, 비행, 디브리핑 등 모든 일들은 영어로 진행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며, 모국어를 배우고 말한 시간이 영어를 사용한 시간보다 훨씬 긴 탓에, 영어 발음은 모국어의 영향을 받게 되고, 그 차이는 꽤 커다란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불러온다.


한국어의 경우 알파벳 L과 R을 모두 ㄹ(리을)로 발음하고, Z와 J를 모두 ㅈ(지읒)으로 발음하기에, 이 알파벳이 사용된 단어를 한국어 식으로 발음할 경우, 외국인이 그 단어를 이해하지 못할 확률은 매우 높다. 하지만 이런 발음의 문제는 비단 한국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데, 중국, 태국을 비롯한 아시아 계열부터 아랍, 아프리카, 유럽에 이르기까지 다들 발음하지 못하는 단어들이 있거나, 아니면 모국어의 억양이 섞인 어투로 영어를 사용한다.


심지어 영어를 잘하는 필리핀 사람들의 영어에도 그들만의 악센트가 존재한다. 이를 ‘따갈리쉬’라고 부르는데, 이는 필리핀의 언어인 따갈로그에 잉글리시가 합쳐진 단어이다. 비슷한 예로 싱가포르식 영어를 의미하는 ‘싱글리쉬’가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가장 알아듣기 힘든 영어 악센트 중 하나로 꼽는다. (진짜 안 들린다. 분명히 영어인데 진심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우리 항공사는 노선과 위치의 특성상 전 세계의 온갖 국적의 손님들이 비행기에 탑승하고, 크루들의 국적도 정말 다양하기에, 서로의 억양이 낯설 경우,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더욱 커진다.


언젠가는 갤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인도 손님 한 분이 오시더니, 물 잔을 타악! 내려놓으며 말씀하셨다.

“아니!! 내가 물을 달라고 했는데!! 마시려고 하니까 알코올 냄새가 나잖아??? 대체 나한테 뭘 준거야???”


담당구역의 크루의 설명을 들어보니, 인도 손님이 ‘워터(=물)’라고 한 발음을 ‘보드카’라고 들었다고 한다. 한국어로 들으면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인도의 억양이 섞인 ‘워터’라면 ‘웍터’에 가까웠을 테니 ‘봇(드) 카’와 헛갈릴 만도 하다.




기내 근무환경은 이런 언어장벽을 더욱 심하게 만드는데, 비행 내내 착용하는 마스크, 비행기 엔진 소음, 갤리(=기내 간이부엌) 냉각장치 소음, 좌석과의 거리 등으로 인해 손님과 크루들 간의 의사소통은 쉽지 않다.


이럴 때 의사소통을 효율적으로 하는 유일한 방법은 ‘배려와 인내심’이다.


내 말을 듣는 사람을 배려해서 적당한 속도로 또박또박 말하고, 혹시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했더라도, 이해하며 다시 천천히 말하는 것. 반대로 내가 알아듣지 못한 경우에는, 양해를 구한 뒤 다시 말해달라고 부탁하고, 상대방이 말하는 내용을 정확히 숙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어렵다면, 최대한 간단하고 명료한 단어를 사용해서 단어 단어로 대화하는 방법도 있고, 약간의 보디랭귀지를 사용해도 좋다. 주스나 음료의 경우는 패키지를 직접 보여드리기도 하고, 해당 노선의 모국어를 할 줄 아는 크루에게 간단한 몇 마디 정도를 배우거나, 그 언어로 메뉴를 알아두는 것도 꽤 도움이 된다. 사소한 것에도 고맙다 표현하고, 양해를 구하거나 사과를 표하는 일에 인색하게 굴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 단 진심을 담는 것은 잊지 말고 말이다. 거기에 친절함과 미소까지 얹는다면? 만점짜리 커뮤니케이션이다.




마무리 이야기.

손님이 물을 주문한 건지 보드카를 주문한 건지 헛갈린다면, 나는 다음의 순서를 따른다.

첫째, 손님께 다시 한번 여쭤본다.

둘째, 그래도 못 알아들겠다면, 술 보드카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고 다시 확인한다.

셋째, 만약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경우일 경우, 그냥 물을 드린다.


술은 종교 및 알레르기의 이유로 위험할 수 있지만. 물을 안 마시는 사람은 없으므로 나는 물 서빙을 택한다. 만약 손님이 보드카를 원하신다면? 아무리 영어를 못하셔도 이 말씀은 꼭 하시더라.


“노노노노! 디스 노우!!!! 봇카 봇카(=보드카)”


그렇게 손님의 주문을 확인하면, 나는 안심한 뒤 웃으며 말한다. “네! 손님.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이전 이야기* https://brunch.co.kr/@a7lchemist/42


작가의 이전글 기내 응급 상황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